사가와 규빈 사건
東京佐川急便事件
일본의 거대 운송회사가 정치권에 광범위하게 일본정치권에 불법자금을 제공한 정치스캔들.
같은 회사가 2001년에 나라현 경찰과 관련된 나라 사가와 규빈 사건과 구별하기 위해 '''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자민당 정권에게는 4년 전에 일어난 리크루트 사건과 같이 크리티컬한 치명타을 먹은 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계기로 55년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이후에 집권한 첫 비자민당계 총리인 호소카와의 실각도 이 사건과 연관돼 있다.
1992년, 사가와 규빈(佐川急便)[1] 이 정치권에 대규모 정치자금을 공급한 사실이 불거지고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자민당 계파인 경세회의 좌장 가네마루 신 부총재가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정계를 물러났으며, 이에 경세회 일원이자 당내 2인자 오자와 이치로 역시 사건에 연루돼 증인소환이 불가피한 위기상황에 몰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당내 최대계파 경세회는 급속히 와해되어 계원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그리고 자민당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개혁성향의 일부 의원들이 탈당한다. 그렇게 생겨난 당들이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이다.[2] #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가 구마모토현 지사시절이던 1982년 사가와 규빈으로부터 1억엔을 무이자로 빌린 사실과 이 자금을 유용해 구입한 아파트를 담보로 장인이 NTT 주식을 구입한 과정의 사실유무등을 둘러싼 의혹으로, 결국 1994년 호소카와는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비단 실각의 원인은 이 의혹뿐만 아니라 호소카와 내각은 국민복지세 신설 철회로 인해 연립 파트너인 사키가케, 사회당과 심각한 내분에 휩싸있었고 그의 총리직 사퇴는 이미 시간문제였다.
파발꾼의 훈도시라는 도시전설의 유래 중 하나로 이 사건이 거론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