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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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에 존재했던 일본의 정당으로 1993년 6월 23일 창당하여 1994년 12월 9일, 신진당으로 신설합당되었다.
존속 기간은 1년 반 남짓으로 짧았지만, 그 사이에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총리도 배출하는 등 일본 정치를 오래 지배해오던 55년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정당이다. 당시 오카다 가쓰야, 마쓰자와 시게후미, 우에다 기요시, 오자와 이치로 등 현재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 인사뿐 아니라 이시바 시게루, 니카이 도시히로, 에사키 데쓰마, 나가노 시게토 등 자민당 인사들도 있던 정당이었다.
2. 상세
2.1. 창당과 38년만에 성공한 정권 교체
1993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자민당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일본의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장기 경제 침체가 시작되면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대규모 공적 자금 투입을 시도했지만, 극도로 보수적인 정계와 경제계의 반대로 실패하고 크게 휘청이고 있었는데 리크루트 사건까지 터지면서 자민당 정권이 레임덕 상황에 봉착하고 만 것.
이 상황에서 자민당 내에서 개혁파 역할을 맡았던 하타 쓰토무 전 농림수산대신과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이 손을 잡고 개혁포럼21 계파 소속 36명 중의원들과 손잡고 탈당을 선택한다. 내각불신임결의를 당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일본국 헌법 제69조에 따라 중의원을 해산시킨 후 치러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정치 개혁을 외치며 의석수를 55석으로 불리며 선전했다.
비슷한 시기 신생당과 마찬가지로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자민당을 탈당하고 창당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일본신당, 하토야마 유키오의 신당 사키가케까지 선전하면서 자민당이 과반 의석을 상실하는 55년 체제 성립 이후 첫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자민당은 이 신당들과 연정을 구성하여 정권을 유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신생당 간사장이었던 '''오자와 이치로'''가 이 발상을 뒤집어 국민적으로 인지도가 높았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신임 총리로 세우는 것을 골자로 신생당,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사회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공명당까지 자민당도 그렇다고 공산당도 아닌 8개 정당을 합쳐 전후 최초의 비자민-비공산 연립내각을 성사시키며 무려 '''38년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다.
2.2. 연정 붕괴와 오자와의 승부수
38년만에 출범한 비(非) 자민당 정권에 국민 지지도가 정권 초기 무려 74%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는듯 하였지만, 위기는 정권 수립 후 1년도 되지 않아 빠르게 찾아왔다. 정권 교체라는 명분 아래 8개 정당이 똘똘 뭉치긴 했지만, 이 목표가 달성되자 정작 연립 정당 간에 생각 차이가 커도 너무 컸던 것. 연립 정권은 내부적으로 각 정당의 간사장으로 구성된 여당 대표자 회의를 구성하는 등 후속 대책을 마련했지만 선거제 개혁[2] , 소비세 문제 등을 두고 연립 정당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특히 신생당의 오자와 간사장과 공명당의 이치카와 유이치 서기장이 이 회의를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정당들의 반발도 커졌다.
결국 1994년 1월, 사회당의 반대로 정치개혁법이 참의원에서 부결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고[3] 뒤이어 호소카와 총리가 사가와 규빈 사건에 연루되어 집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퇴하면서 기대를 모았던 기대를 모았던 연립 내각이 파국을 맞이했다.
정권 상실의 위기를 맞이한 신생당과 오자와는 후임으로 하타 쓰토무 대표를 차기 총리로 세우며 기존 연립 정당들의 지지를 받아 1994년 4월 25일, 중·참 양원에서 겨우 총리 지명을 받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타 총리는 취임 직후 공공요금 연내 동결을 선언하는 등 이탈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지만 결국 연정 멤버 중 소외감을 가졌던 사회당[4] 과 신당 사키가케가 자유민주당과 연정 구성에 합의한 후 내각불신임결의를 제출하면서 6월 30일, 취임 2개월만에 퇴진해야했다.
일반적으로 내각 책임제에서 총리가 불신임결의를 당할 경우, 중의원 해산으로 대항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앞서 호소카와 내각 때 정치개혁법 통과에 따라 선거제가 소선거구제로 전환됐는데 이후 계속된 정치 분란으로 선거구 획정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불신임결의를 당해버려서 그대로 총선을 진행할 경우, 기존의 중·대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 이렇게 될 경우, 연정을 합의한 자민당과 사회당의 틈바구니 속에서 승리의 가망이 없어서 중의원 해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후문.
차기 총리 지명 선거에서 사회당, 자민당, 사키가케는 합의에 따라 사회당 당수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차기 총리 후보로 추천했는데 이에 반발해 가이후 도시키 전 총리가 자민당을 탈당하자 오자와 간사장이 가이후와 손잡고 자민당, 사회당 이탈표를 노리고 가이후를 남은 연립 정당들의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실제로 자민당과 사회당에서 상당수의 이탈표가 나와 1차 투표에서 총리가 지명되지 않았고(무라야마 241 vs 가이후 220), 결선 투표에 가서야 무라야마 위원장이 단순 다수표에서 승리(무라야마 261 vs 가이후 214)해 가이후 전 총리를 누르고 하타 쓰토무의 뒤를 이어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2.3. 신진당 합류와 해산
무라야마 도미이치 연립 내각이 출범하면서 졸지에 야당이 된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자유개혁연합은 오자와의 구상 아래 힘을 합쳐 신진당을 창당하기로 한다. 여기에 가이후 전 총리, 에다 사쓰키 등 자민당 이탈파까지 합류하면서 55년 체제 출범 이후 최초로 자민당과 1대1 승부가 가능한 사이즈의 거대 야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생당은 1년 6개월 정도의 짧은 당생을 마무리하고 소멸했다.
3. 역대 선거결과
3.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직전회차 선거 의석 수와의 비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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