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모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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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55년 체제를 무너뜨리고 비 자민 연립 정권을 이룩'''했던 제79대 내각총리대신.
2. 배경
에도 막부 시절 구마모토 번의 영주, 히고 호소카와 가문(肥後細川家)의 제18대 당주(장손). 게다가 그의 외할아버지는 귀족 중의 귀족이자 2번 연임 총리에 빛나는 고노에 후미마로다. 모리히로는 일본 유수의 명문 조치대학을 나와 중도 좌파 신문인 아사히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호소카와 가문은 미나모토 씨로 아시카가 쇼군의 방계이며, 1633년부터 12대 238년간 구마모토 번의 영주를 거쳐 메이지 유신 때 후작에 봉해졌다.[1] 중시조가 되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실이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가라샤지만, 타다오키의 서자 중 하나의 후손을 중간에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모리히로는 아케치 집안과 직접 혈연은 없다.
그의 아버지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우리 가문에는 옛날에는 더 좋은 보물들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거의 불탔답니다. 아, 태평양 전쟁(1945)이 아니라 오닌의 난(1467) 때."라는 조크를 하기도 했다.[2] 이 조크는 후에 모리히로가 한 것으로 와전된다.
패전 후 일본은 카조쿠(화족, 일본귀족) 제도가 폐지됐지만 그의 혈통은 일본 전통 신분제의 최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환경 운동, 반핵 운동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만 33세 나이에 참의원 진출(일본 상원, 1971~83)을 이룬 것은 집안 배경 탓인지 몰라도, 그가 일본의 구체제를 깨고 최초의 비자민당 총리가 된 건 전적으로 그의 정치관과 스스로 이룬 정치 이력 때문이다.[3]
3. 정치 활동
1938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현 도쿄도 치요다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본적지는 구마모토현이었다.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에 입사해 5년간의 짧은 정치 기자 생활을 마치고 68년 퇴사했다. 퇴사 직전 소위 김희로 사건(金嬉老事件)[4] 을 심층 취재하면서 재일 한국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1969년 그는 처음엔 일본 사회당 당수 마츠마에 시게요시(松前重義)를 통해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일본은 보수의 자민당과 진보의 사회당이란 양강 구도로 정치를 꾸려갔었다. 그러나 결국은 무소속으로 자기 본적지인 구마모토 1구 중의원(일본 하원)에 출마했다. 이유는 자신이 사회당보단 보수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서였단다. 같은 지역구에 후지사키 히사오라고 사회당도 후보를 냈다. 안 그래도 자민당이 센데 표까지 갈라먹은 셈. 당연 낙선.
출마 당시 그의 아버지 모리사다는 '정치라니 그딴 야쿠자들이 하는 짓을 니가 하려느냐'며 말렸다고. 후일 그의 친동생 고노에 타다테루(近衛忠煇)는 그 일로 문예춘추 인터뷰에서 독자들을 웃겼다고. "아니, 우리 집안 장손이면 뭘해요, 공주랑 결혼한 저보다도 인지도가 없었는데." 유머 감각은 집안 내력인 모양. 그래서인지 낙선이야 했지만 그가 집집마다 방문한 동네는 이상하게 득표를 많이 했다고.
결국은 1971년 자민당에 입당해 참의원 선거에 나선다. 극우 작가 겸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지원 유세를 받는 등, 역시 너도 별 수 없구나 소리를 들었지만 자민당 내 중도 좌파였던 다나카 가쿠에이[5][6] 의 계파로 들어간다. 소위 칠일회 혹은 목요 구락부라 불렸던 모임을 통해 중의원만 40명인 자민당내 대형 파벌을 형성하면서, 좌장인 다나카 가쿠에이가 1972년 총리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일본 참의원은 6년 임기로, 전반 3년, 후반 3년 임기를 보장받는데, 다나카 총리의 계파였던 그도 후반에는 대장성 정무 차관, 자민당부간사장 등 요직을 맡게 된다. 후반 임기 중 구마모토 현 지사 출마를 표명하고 선거 준비에 들어간다.
83년 구마모토 현 지사에 당선된 그는 소위 '니뽄히토즈쿠리운동(日本一づくり運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지방 자치 운동을 벌였다. 각 지방마다 특산품을 하나씩 만들어 경제도 살리고 지방 분권의 초석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구마모토 현을 예술향으로 만들기 위해 대형 현립극장을 만드는 등 노력했다. 재선까지는 지사로서 열심히 노력했고 인기도 많았다. 3선은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갑자기 '권불십년'을 외치고는 출마를 단념한다.
1991년 퇴임한 그는 도쿄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문예춘추를 통해 '일본자유사회연합(自由社会連合)'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냉전구도 속에서 리베이트 사건 등 일본이 부패로 썩어간다고 주장하면서, 대 정치, 행정 개혁을 통해 일본을 변혁하자고 주장했다. 아울러 보수 자민당, 진보 사회당 구도의 양당 구도를 반드시 박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자민당을 탈당했다.
1992년 일본신당을 결성한 그는 당대표에 올랐고 참의원에 재선됐다. 이듬해인 1993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에 실패하자 야7당 연립정권을 만들어 자민당을 뒤엎고 총리가 됐다. 38년 만의 비(非) 자민당 총리로 정권 출범 최초엔 지지율이 74%에 달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라든가, 한국 경주시를 방문하여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94년 5월에는 니시신주쿠 게이오플라자호텔에서 암살미수 사건을 겪었다. 범인은 송혼숙(松魂熟)이라는 일본 우익단체의 회원인 52살의 노조에 마사카츠. 흉기는 38구경 리볼버 권총이었으며, "호소카와 전 총리가 국회에서 태평양전쟁은 침략행위라고 한 발언과, 예산안 통과 전 사퇴한 것에 불만을 품어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여러모로 일본 극우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4년 4월 28일 정치자금 문제(사가와 규빈이라는 기업으로부터 1억 엔을 빌렸다)로 돌연 사퇴했다. 하지만 이미 연립정권의 붕괴는 1월부터 그가 염원하던 정치개혁 법안이 사회당의 비토로 저지되면서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또한, 기존의 소비세를 국민복지세로 바꿔 그 비율을 3%에서 7%로 올리는 구상도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어 정권의 구심력을 잃고 말았다. 후임인 하타 쓰토무 총리는 두 달 만에 사임하며 반자민당 연립은 1년도 못 가 붕괴되고 만다.
"잎이 흩어짐은 때를 아는 것, 이 세상 꽃은 꽃대로 사람도 사람대로"라며 1998년 환갑과 함께 중의원을 사퇴했다. 이 말은 먼 선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실인 가라샤의 사세구를 인용한 말이다. 가라샤의 원 사세구는 "질 때를 알았을 때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요, 사람도 사람이리라(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1998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1. 정계 복귀 시도 및 깜짝 출마
2007년에 도예가로 전직하며 일선 정치에서 진짜 물러난 것으로 보였지만, 2014년 1월 돌연 도쿄도(都)지사 보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에 정부가 손을 놓으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1월 14일 출마선언장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자민당) 전 총리가 전격 참석해 지지 연설을 했다.''' 2007년 은퇴했던 고이즈미 총리 역시 후쿠시마 사태 속에 반핵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치에 복귀한 것. 그 자리에서 탈원전을 추구하는 호소카와 후보를 지지하기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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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총리가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파격인데다가, 천하의 고이즈미까지 가세했다. 그래서 호소카와 전 총리가 도쿄도지사에 당선될 경우 아베 정권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되었다. 여기에 비주얼계 락그룹 LUNA SEA의 SUGIZO가 탈원전을 주제로 호소카와와 대담을 진행하면서 힘을 실어주었고, 이는 큰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2월 9일 도지사선거 결과, 아베 신조 총리와 자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마스조에 요이치 前 후생노동상의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낙선하고 말았다. '''그것도 더블 스코어였다!''' 관련 아사히신문 보도. 마스조에 후보는 211만2천979표, 호소카와와 우쓰노미야는 각각 95만6천63표, 98만2천595표를 획득했다.
전날 일본 간토 지방을 강타한 20년 만의 폭설로 인한 낮은 투표율도 선거에 영향을 미쳤지만, 마스조에가 내건 복지 공약과 2020 도쿄 올림픽에 대한 어젠다가 호소카와 전 총리의 탈원전 공약보다 도쿄도민들에게 더 큰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비여권 내 표의 분산도 커다란 패인이었다. 탈원전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우쓰노미야 겐지[7] 후보와 단일화를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민주당의 지원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역시 패인이었다.
만약 두 후보의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 단순 계산으로 211만 vs 193만으로 상당히 근접한 수준이 된다. 거기다가 사표도 줄었을 것이라 그야말로 해볼만한 선거였을 것이다. 이런 양자구도가 되면 주민들에게 먹히는 공약과 민주당의 지원을 통한 바닥민심 확보 등으로 승리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이야기. 결국 그의 패배로 아베 총리의 아베노믹스를 비롯한 경제, 정치, 외교정책들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선거 이후에도 꾸준히 탈원전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선거에서 당선 된 마스조에 요이치가 정치자금 문제로 사퇴하여 2016년 7월에 다시 보궐선거가 치뤄지게 되었다(...) [8] 다만 고이즈미 전 총리와 호소카와 전 총리는 이번 선거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9]
4. 여담
- 2010년에는 "한일 병합은 강제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2004년에는 경남 산청을 방문해 도자기를 직접 만들었다. 첫 번째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산청군에 방문한다고. 본래 호소카와 집안이 역사적인 명문가로[10] 에도 시대 도자기 공예와도 연이 깊은 집안이라서 원류를 찾아왔다고. 도자기에 대한 열정이 크다고 한다.
- <내일은 없습니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총리 시절의 일기인 『나이쇼로쿠(内訟録)-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대신 일기』펴내기도 했다. 논어의 말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책망하는 이가 없다란 의미.
- 과거 김영삼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열림기획 작 YS는 잘맞춰 라는 게임의 대전액션게임 파트에서 당시 일본 국가원수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했다. 2020년 현재 이 게임에 등장한 국가원수 중에서는 빌 클린턴과 더불어 둘밖에 안되는 생존인물이기도 하다.
- 최근에는 대한항공 광고 '일본에게 일본을 묻다' 캠페인에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은...
- 사이고 다카모리를 존경한다고 한다.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1] 근세 호소카와 가는 호소카와 유사이부터 시작된다.[2] 참고로 '''호소카와 가문은 오닌의 난을 주도한 가문 중 하나'''다. 자세한 것은 오닌의 난 문서로.[3] 여담으로 비서 중에 나가하마 히로유키가 있었다고 한다.[4] 김희로 사건: 폭력단원 김희로(나중에 권희로로 개명, 1928~2010)가 빚을 받으러 갔다가 인질극을 벌이면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는데 경찰이 인종 차별 발언을 했다며 수차례 기자들에게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등 사건을 벌였다.[5]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의 전 총리, 사업가 출신으로 표 계산이 컴퓨터같다는 평을 들은 정치 달인. 밤의 쇼군, 흑막 등 살벌한 별명으로 불려 당시 일본 정계를 맘대로 주물렀다. 부정부패도 있었지만 의외로 처음 정치를 시작한 건 일본 진보당으로, 자민당 내에서 중도좌파의 길을 걸었다.[6] 사실 자민당내에서 진짜 좌파는 미키 다케오였고 다나카는 요시다 시게루-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보수본류라인이었으며 다나카 본인 스스로도 보수본류의식이 매우 강하였다.[7] 前 일본 변호사협회 회장. 공산당, 사민당이 지지한 후보. 혐한시위 등의 극우 활동을 반대했다.[8] 2016년 도쿄도지사 선거 문서로.[9] 참고로 2016년 선거로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 현 지사는 호소카와 전 총리를 통해 정계에 데뷔했고, 고이즈미 전 총리 내각에서 입각한 경력이 있다.[10] 가마쿠라 막부 시대 다이묘에서 기원한다.[11] 1993년 7월 사퇴(제4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출마)[12] 1998년 5월 7일 중의원의원 사퇴[13] 2013년 12월, 전임자 이노세 나오키 도쿄도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및 벌금형 확정으로 인한 도지사직 상실에 따른 보궐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