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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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존속했던 일본의 민주당계 중도우파 정당.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대신으로 배출하였으나 국정 경험 부족으로 국정 원동력을 잃어 10개월만에 총리직을 잃었으며, 2년만에 오자와 이치로의 신진당으로 합당되었다. 이후 일본신당 출신의 정치인들은 입헌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2. 역사
1992년 5월 7일 자민당 소속 구마모토현지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자민당을 비판하며 당의 쇄신보다 새로운 집을 차려야한다면서 신당 창당을 선언했고, 5월 9일 문예춘추 6월호에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이념을 정리한 <자유사회연합 창당선언문>이 게재되었다. 호소카와는 자유사회연합 창당선언문에서 55년체제로 구축된 관료주의의 타파를 주장하며, 정치의 투명화와 경제 개혁을 강조했다. 경제 정책으로 국민연금 부담 상한 40%로 억제하며, 과도한 인허가 등 정부 규제 시스템을 철폐하고 시장 메커니즘과 이를 적절히 보완하는 국가의 경제 통솔을 주장했다. 또 지방분권을 통한 작은 정부와, 평화 헌법 수호를 통한 평화주의 외교, 그리고 교과서 검정제도 폐지와 교사선택의 자유, 대학 민영화 등을 통한 교육 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5월 18일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신당 창당을 위해 치요다구에 당사를 얻고 당명을 응모했다. 200개 이상의 후보에서 헤이세이 신당 과 일본신당이 최종적으로 골라졌는데, 이중 호소카와가 '일본신당'이 좋다면서 일본신당이 당명으로 결정되었다. 1992년 5월 22일 일본신당은 본격적으로 초대 당대회를 열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대표로 하는 일본신당을 창당한다.
2.1. 제16회 참원선
제16회 참원선에서 비례 1순위로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비례 2순위로 NHK 기자 출신의 '''고이케 유리코'''[4] 가 지명되었다. 3순위로 데라사와 요시오가, 4위로 다케다 구니타로가 정해졌는데 9순위인 사토 나오코 후보는 비례 순위에서 고이케 유리코가 너무 높은 순번을 받은것에 불만을 품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고이케 유리코가 2순위라는 특례를 받은것에 일부 당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호소카와 대표의 인기에 힘입어 제16회 참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은 괜찮게 나오던 편이었다.
선거 결과, 지역구에서는 1석도 얻지 못했지만 비례구에서 '''3,617,235표 (7.73%)'''를 얻어 선전한다. 옹립된 후보 17명중 4명이 당선되었다. 이는 당시 3대 주요정당이었던 자민당, 사회당, 공명당에 이은 비례 득표율 4위였고, 심지어 군소정당중에서는 역사가 길고 조직력이 강했던 일본 공산당과 민사당보다도 지지를 더 받았다.
2.2. 제40회 중원선
16회 참원선에서의 선전에 이어, 니가타현 시라네시 시장 선거에서도 사회당과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후보를 상대로 일본신당 후보가 승리하면서 지지율이 폭등했다. 인재 영입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변호사 출신의 에다노 유키오(당시 29세)를 영입하며 젊은 피 수혈에 공을 들였다. 이 외에도 노다 요시히코, 모테기 도시미쓰 등 젊은 정치인들이 일본신당 지지를 선언하며 일본신당에 합류하기에 이른다. 물론 트러블이 없는것은 아니라서 당총무위원장이었던 마츠자키 테츠히사가 부적격 심사를 받고 출당당하는 일도 있었다.
국회에서 정치 불안정과 내각의 낮은 지지율, 헤이세이 경제위기 등이 겹쳐져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대신이 불신임이 국회에 상정되자,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정국 돌파를 목적으로 중의원을 해산시킴에 따라 제40회 중원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6월 21일에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해 일본신당과의 연대를 모색했고 당내 서열 2순위였던 오자와 이치로와 하타 쓰토무가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을 창당했다. 당연히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은 위기에 빠졌고, 일본 신당은 이 틈을 타 하토야마 유키오가 이끌던 신당 사키사케와 연합을 선언했다. 이 와중에 6월 27일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일본신당이 추천한 22명의 공인후보중 20명이 당선되고 추천 7명을 포함해 27명이 일본신당 회파를 결성하면서 도의회의 제3세력으로 올라섰다.
이후 중의원 선거 공천으로 고이케 유리코의 주도 아래에 57명의 후보가 옹립되었다.[5] 제40회 총선 결과, 일본신당은 '''8.05%'''를 얻으며 '''35석'''을 얻어 대약진했다. 특히나 29세의 정치 초년생이나 다름 없던 에다노 유키오가 무려 '''2위'''로 당선되었고, 치바현 제1구의 30대 젊은 정치인 노다 요시히코는 '''1위'''를 기록하며 압승했다. 선거에서 선전한 일본신당은 신당 사키사케와 공동회파를 구성했으며 이에 따라 52석을 얻어 제5세력으로 부상했다.
2.3. 역사적인 첫 집권
무엇보다 자민당이 창당 이후 최초로 '''과반의석을 상실함'''에 따라 집권 가능성이 열렸으며, 야권 지도자중 가장 인기가 좋았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총리감으로 거론되었다. 1993년 7월 23일 일본신당은 비자민 비공산 정치개혁구상을 발표했다. 야당간의 연정이 사실상 확실시될때, 공직경험이 풍부해 유력 총리권 후보로 꼽혔던 오자와 이치로가 호소카와에게 총리직을 양보하면서 8개 정당의 연합으로 호소카와 모로히로가 미야자와 기이치를 중의원 투표에서 앞지르고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된다. 이로서 호소카와 총리는 1948년 가타야마 데쓰의 실각 이후 '''45년만의 비자민계열 총리'''라는 대기록을 쓰게 된다.
국민의 기대 속에서 정권 초반 내각 지지율은 역대 최고인 '''74%'''를 찍어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 이후 이정도의 초기 내각 기록을 달성한 총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하토야마 유키오를 빼면 전무하다.[6] 그러나 국민의 기대와 별개로 일본신당 내 대부분의 의원들이 20~30대였던데다가, 공직 경험과 정치 경험이 전무하여 연립여당에 휘둘렸다. 특히 의원수가 사회당에 많이 모자라 경제정책에서는 사회당에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성향도 각자 보수주의(신생당), 개혁보수(일본신당), 사회주의(사회당), 사민주의(민사당), 불교정당(공명당)으로 달랐고 특히나 외교 관련해서 강경 반한, 반중파였던 민사당과 리버럴, 친한이었던 일본신당은 매일 충돌했다. 때문에 8당 연합은 시작부터 정책에 대한 노선 차이로 삐걱거렸으며, 이럴바에는 뭐하려 55년 체제를 끝냈냐는 일본 국민들의 실망 속에서 8당 연합체의 지지율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2.4. 몰락과 합당
1994년 우여곡절 끝에 정치개혁 4법이 통과되었지만, 사회당의 반대속에 일부 법안이 저지되면서 정권 내 분열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어 소비세를 국민복지세로 바꿔 7%로 인상하려던 정책도 사회당의 격렬한 반대와,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무산되면서 호소카와 내각은 원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다른 정당들의 분열도 심각해졌고 특히나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하토야마 유키오가 대립하는 형국이 되면서 공동회파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이런 가운데 호소카와 총리의 정치 자금 문제가 터져 곤혹에 빠졌다. 호소카와 총리가 사가와 규빈 사건에 연루되면서 1억엔을 무이자로 빌린 과정이 수상쩍다고 추궁당한것. 결국 호소카와 총리는 1994년 4월 8일 공식으로 총리직 사임을 선언했으며 신당 사키사케와의 공동회파 해산을 선언했다.
10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호소카와 총리는 정치 개혁을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일본 식민통치 사과 등 주변국가와의 관계 강화도 물색했지만, 결국 일본 정치의 유서깊은 문제인 계파 갈등과 정경유착에 발목을 잡혀 불명예 퇴진하면서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성향이 판이하게 다른 8개 정당을 단순한 반자민 반공산 목적으로 연정을 맺었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에 가까웠다.
이후 당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해 4월 25일 호소카와 내각이 총사퇴했다. 민사당과 연합을 맺는것도 잘 안돼서 사회당이 크게 반발했고 급기야 연정 탈퇴설도 나오기 시작했다. 5월 20일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의원이 호소카와 1인 체제를 비판하며 일본신당을 탈당해 민주의 바람을 창당했고, 고이케 유리코 등이 이에 반발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6월 25일, 하타 쓰토무 내각총리대신이 사퇴하고 자민당과 사회당이 연정을 선언하자, 일본 신당은 이에 반발해 연정에서 탈퇴했다.
1994년 10월 30일, 일본신당은 소선거구제 도입을 위한 정치개혁 연합회를 결성했으며 오자와 이치로와의 합당을 결정했다. 1994년 12월 9일 최종적으로 정당이 해산되고 오자와 이치로의 신생당과 합당하며 신진당을 창당해, 2년여간의 굵고도 짧은 일본신당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오자와 이치로와의 합당을 반대한 4명의 의원들은 가이에다 반리를 중심으로 1995년 시민리그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3. 역대 대표
4. 역대 선거 결과
4.1. 참의원 선거
4.2. 중의원 선거
5. 일본신당 출신 정치인
위 '역사' 항목은 2010년대 일본 정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꽤 흥미진진하게 읽었을 것이다. 현재 민주당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중진 의원들이 20~30대때 일본 신당에 참여했으며, 일부 자민당 의원들도 일본신당에 참여했기 때문에 출신 인물들중에 거물이 '''매우''' 많은 편이다.
-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총리대신)
- 에다노 유키오 (내각관방장관, 외무대신, 경제산업대신)
- 가이에다 반리 (경제산업대신)
-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방위대신, 환경대신)
- 노다 요시히코 (내각총리대신, 재무대신)
-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 경제산업대신)
-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대신, 국토교통대신)
- 카와무라 타카시 (나고야시장)
- 아라이 사토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나가하마 히로유키 (환경대신)
- 가모시타 이치로 (환경대신)
- 오자와 사키히토 (환경대신)
- 다루토코 신지 (총무대신)
- 나카가와 마사하루 (문부과학대신)
- 에다 사쓰키 (법무대신, 환경대신)
- 후지무라 오사무 (내각관방장관)
- 가와우치 히로시 (중의원 의원)
- 다나카 겐(1966) (에도가와구의원)
- 아즈미 준[7] (재무대신)
[1] 선수가 대표 치고 많이 낮아보이지만 이는 총리대신 지명을 위해 중의원에 출마한 것이며, 이전에는 참의원 3선의원을 지냈다. 보통 참의원은 3선부터 중진 대우를 받는다.[2] 비례대표 4석[3] 지역구 35석[4] 친한파인 호소카와와 혐한파인 고이케의 성향 차이를 보면 의외일 수 있지만, 둘은 외교를 제외하면 성향이 비슷해 2016년 도쿄도지사 선거 당시 호소카와 전 총리가 고이케 도쿄도지사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5] 참고로 에다노 유키오를 사이타마 5구에 공천한 고이케 유리코는 24년후 희망의당을 이끌며 에다노 유키오의 입헌민주당과 야당의 밥그릇을 두고 혈전을 벌이게 된다(...). 결과는 에다노 유키오가 이끄는 입헌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고이케 유리코의 커리어가 사실상 도쿄도지사에 머물며 정치 인생이 끝장남에 따라, 에다노 유키오는 뜻하지 않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 됐다.[6] 그나마 스가 요시히데 내각이 74%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타이 기록을 세우긴 했다.[7] 일본신당에 소속된적은 없지만, 무소속으로 활동할때 일본신당과 뜻을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