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위

 

1. 서진황족 초은왕(楚隱王) 위(瑋)
1.1. 개요
1.2. 일생
1.3. 기타
2. 서진의 황족 의양왕(義陽王) 위(威)
2.1. 개요
2.2. 일생
3. 서진의 황족 하비왕(下邳王) 위(韡)


1. 서진황족 초은왕(楚隱王) 위(瑋)





司馬瑋
(271 ~ 291년 음력 6월 13일)

1.1. 개요


서진의 종친. 자는 언도(彥度). 무제 사마염의 5남이자 혜제 사마충의 동생. 봉토는 초(楚), 작위는 왕(王), 시호는 은(隱).
팔왕의 난에서 벌인 행적을 요약하면 '''형처럼 지적 장애인은 아니었지만 결국 흔한 막장 종친이었고 자진해서 가남풍의 장기말이 되었다.''' 두 번째 훙서자이자 첫 번째 내란자.
생모는 미인 심씨로 장사왕 사마예의 동복형이다. 성품은 성취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호탕하게 베푸는 것도 좋아했다고 내려온다. 무리의 마음을 빼앗는 매력이 있었는지 이런 저런 막장 사건에도 불구하고, 죽었을 때 슬퍼하는 백성들이 사당도 세웠다고 전해진다.

1.2. 일생


277년 8월 21일 6세 나이로 시평왕에 봉해졌으며, 그와 동시에 둔기교위로 있다가 초를 봉지로 받으면서 289년에 도독형주제군사, 평남장군, 진남장군이 되었다.
290년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이 황제가 되자 외척 양준이 권신이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은 계략을 꾸며 양준을 무고하여 몰아내고자 한다. 이때 황후 가남풍은 종실의 번왕들에게, 상경하여 양준을 제거하라는 밀서를 내려보냈다. [1] 이때 가장 먼저 상경한 것이 초왕 사마위였다. 사마위는 이때 형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291년 2월 상경해도 된다는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회남왕 사마윤과 함께 수도 낙양에 도착한다. 같은 해 3월 8일 정변이 일어나자 가남풍은 혜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양준의 모반을 선포한다. 사마위는 사마문에 주둔하면서 입구를 지키다가 금군 400명을 이끌고 가 양준을 잡아 죽이고 그 수하 전원의 목을 자른다. 황제의 어지가 내려질 때 양준은 황가의 무기창고 남쪽 편 요새 형태 자기 거처에 있다가 군사들이 몰려오자 마구간으로 몸을 숨겼다. 양준은 금군의 창에 찔려 참혹하게 죽고 가남풍은 양준의 일가와 삼족을 멸한 뒤 대권을 장악한다.
3월 19일 가남풍과 혜제 사마충은 초왕 사마위를 접견하여 궁을 호위하는 금군수령위장군(禁軍首領衛將軍)으로 임명하고 북군중후(北軍中侯)를 겸하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양준 때문에 쫓겨나 있던 여남왕 사마량도 다시 불러 태재(太宰)에 임명하고, 태보 위관과 함께 보정을 하도록 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마위는 성격이 거칠고 문체가 과감하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특히 형벌을 잔인하게 주어 위엄 세우기를 좋아해 온 조정이 그를 꺼렸다. 사마위가 사람죽이기를 좋아한 것 때문에 고명대신인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2] 위관 등이 사마위를 싫어한 것이다. 사마량과 위관은 사마위의 포악한 성품을 미워해 여러 차례 진언을 올려 사마위의 병권을 빼앗고자 했다. 처음엔 배해를 북군중후로 대신하게 하려 했으며, 이것이 실패하자[3] 대응으로 여러 친왕들을 봉국으로 가게 한다.
일련의 사건에 그야말로 격노한 사마위는 사마량과 위관을 원망하고 분해하며 가남풍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가남풍은 막 정권을 잡았지만 마땅히 정무를 보좌할 사람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조정에 돌아온 대신들도 가남풍을 좋게 보지 않았다. 사마량은 선황대부터 황제의 고문이었던 명망가였고 위관은 추앙받는 문인이었다. [4] 이들이 은근하게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가남풍은, 친왕인 사마위가 보좌해주는 것을 그나마 힘으로 여겨 사마위의 편을 들어주게 된다.
사마위에겐 덕행이 부족함에도 총애하는 수하 둘이 있었으니 장사 공손굉과 수행원인 사인 기성이다. 사마위는 이들을 시켜 황후 가남풍을 찔러보게 시키고, 이들의 수작을 받아들인 가남풍은 사마위를 태자소부에 임명하여 사마위가 봉국으로 가지 않고 계속 남아있게 해준다.
두 수하 중 기성은 원래 양준과 친했었는데, 위관이 이 점을 싫어하여 체포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를 준치챈 기성과 공손굉은 모의하여 사마위의 명령을 빙자하여 위관과 사마량을 참소했다. 어차피 가남풍도 애초에 위관과 사마량을 싫어하고 있었으니 잘됐다 하고 받아들인다.
여름 6월, 가남풍은 황제로 하여금 사마위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 내리게 하였다.

太宰太保欲爲伊霍之事(태재태보욕위이곽지사)

태재와 태보는 이윤과 곽광이 했던 일처럼 하려고 하고 있으니[5]

王宜宣詔令淮南長沙(왕의선조영회남장사)

왕은 마땅히 이 조서를 선포하고, 회남왕과 장사왕과

成都王屯諸宮門(성도왕둔제궁문)

성도왕에게 명령하여 여러 궁궐의 문에 주둔하게 하고

免亮及瓘官(면양급위관)

사마량과 위관의 관직을 파면시키도록 하라.

밤중에, 황문을 통해 보따리에 싸인 조서가 사마위에게 전달되자 사마위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마음을 먹는다. 사마위는 자신이 장악한 군사들을 파견해 거침없이 사마량, 위관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 사마위는 실수를 하는데 멋대로 조서를 고친 것이다. 사마위는 36군을 소집하고 자신이 조서를 통해 도독중외제군에 임명되었다고 공표한다. 또 사마량과 위관의 관속들에게 항복만 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말도 하는데, 이 또한 조서에 없는 말을 조서에 있는 척하여 명령한 것이었다. 사마위는 손쉽게 사마량과 세자 사마구를 함께 죽이고 이것은 팔왕의 난 중 첫번째 왕의 죽음이었다. 위관 역시 체포되어 자손 아홉 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후 수하 기성은 한밤중에 사마위에게 가씨 일가인 가밀, 곽창 등을 몰아내고 천하를 안정시키자고 권하지만 사마위는 미적거리며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한편 날이 밝았을 때 가남풍 쪽에서도 태자소부 장화, 동맹 등이 설득을 하고 있었는데 "초왕 사마위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사마량과 위관까지 죽인 이상 초왕 사마위가 천하의 권위를 모두 가졌으니, 이제 가만히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멋대로 사람을 죽인 죄"로 사마위를 주벌할 것을 권했고 가남풍 역시 이것을 이용하여 사마위를 제거하고 싶던 차라 사마위는 곧바로 희생자가 되었다.
장화가 황제에게 아뢰어 전중장군 왕궁을 파견하여 붙잡으니 무리들이 모두 달아나 붙잡히고 말았고 여름 6월 13일, 눈물을 흘리면서 억울하다며 탄식하다 참수되었다.
향년 21세. 한마디로 좋은 애송이였다.

1.3. 기타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에서 플레이 가능 군주로 등장한다. 토탈 워: 삼국/사마위 참고.

2. 서진의 황족 의양왕(義陽王) 위(威)


? ~ 301년 음력 5월.

2.1. 개요


서진의 종친이다. 자는 경요(景曜). 아명은 아피(阿皮). 하간평왕(河間平王) 홍(洪)의 아들. 장무왕(章武王) 혼(混)의 형이다. 친할아버지는 의양성왕 사마망이고 양할아버지는 유(遺)이다.
팔왕의 난에서 벌인 행적을 요약하자면 조왕을 믿고 까불다가 지적장애인에게 역관광을 당했다.

2.2. 일생


276년에 아버지가 훙서하자 습작했다가 277년에 장무왕(章武王)으로 전봉되고 288년에 종형(법적으로는 재종형) 사마기(奇)가 부정축재를 일삼다가 세조 무황제 사마염이 사마기를 삼종정후(三縱亭侯)로 강등하면서 위가 친할아버지를 습작했다.
의양왕 사마위는 성격이 모질면서 개념이 없었고 조왕 사마륜에게 아첨을 잘해 원강(元康) 말년에 임금의 측근인 산기상시가 되었는데, 이 의도는 결국 찬탈을 적극 도우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는 황제옥새와 인수를 빼앗았으며, 사마륜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짓게 하니 드디어 사마륜은 301년 1월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사마륜은 폐위된 사마충을 태상황(太上皇)이라고 명목상으로는 올렸지만 실제로는 금용성에 유폐하고 감시했으며, 사마위는 이 공으로 중서령에 올랐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조왕은 제무민왕 사마경#s-1, 장사려왕 사마예#s-1,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의 연합군에게 쫓겨났고 뒤이어 살해당했다.
사마륜조차 황족에 한때 황제였으니 죽이는데 며칠의 시간이 걸렸던 만큼 그나마 사마위는 위기를 넘기나 했는데, 놀랍게도 백치황제 사마충이 "이 사람이 나에게 퇴위하도록 하고 옥새를 탈취했다."면서 사마위를 주살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사마위는 3개월 만인 음력 5월 주살되었으며, 황제를 얕보고 온갖 몹쓸 짓을 하다가 역관광을 당한 전형적인 악당의 최후였다.
여담으로 사마위는 흔히 혜제의 당숙(즉, 삼촌뻘)이라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사마염 세대이므로 혜제의 삼종형제이다.

3. 서진의 황족 하비왕(下邳王) 위(韡)


? ~ ?
당숙뻘이 될 수 있는 동명이인 "사마위"로는,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의 3남(양자로 들어간 사마망을 제외하면 2남)인 태원선왕(태원왕) 사마보(輔)의 2남이자, 사마부의 5남(4남)인 하비헌왕(하비왕) 사마황(晃)의 셋째 아들로 양자로 들어간 하비왕 사마위(韡)가 있다. 쉬운말로 사마의랑 항렬 같은 사마부의 손자니까 사마염이랑 항렬 같고 사마충에겐 당숙이 된다. 다만 사마위는 아들 사마소(韶, 당연히 진왕 사마소와는 동명이인)에게도 하비왕을 물려주었으므로 위의 사마위일 리는 없다.

[1] 사실 가장 나이 많은 여남왕 사마량이야말로 양준을 쳐낼 이유가 있는데도 그는 특유의 신중한 성격으로 정변을 도모하지 않는다.[2] 황족의 최고 웃어른이자 그의 작은할아버지 뻘이 된다.[3] 사마위가 화를 내니 배해는 그 소식을 듣고 알아서 거절한다.[4] 심지어 위관은 황제 사마충이 태자일 때 폐위하라고 간한 적도 있다.[5] 이윤과 곽광은 황제를 추방한 자들로 이후 왕을 추방하는 이들의 구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