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군

 

1. 개요
2. 국가
2.1. 백제
2.2. 신라
2.3. 발해
2.4. 고려
2.5. 조선
2.6. 한나라
2.7. 송나라
3. 매체
4. 같이 보기


1. 개요


禁軍
일반적으로 동양권 국가에서 정부와 왕을 지키는 친위대, 근위대를 일컫는 말. 한국에서는 고려, 조선 때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던 군대를 금군이라 불렀다.

2. 국가



2.1. 백제


백제에서는 직접적으로 금군이라는 호칭은 등장하지 않지만 최고위직인 6좌평 중 국왕의 경호를 맡은 위사좌평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금군에 해당하는 근위대가 존재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사좌평 중 동성왕 대에 오히려 왕을 시해한 백가가 유명하다.

2.2. 신라


신라의 금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874년의 이찬 근종(近宗)의 반역을 토벌하는 기사에서 언급되지만, 다른 기록은 없다. 9서당 등 신라후기 시절, 중앙군을 이루는 근위대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들에 대한 별칭으로 중국식 용어인 금군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3. 발해


발해의 군제는 10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 근위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각 위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위가 그 역할을 맡았는지는 알 수 없다.

2.4. 고려


내군(內軍), 시위군(侍衛軍)이라 불렸다. 고려초기 시절, 궁궐과 도성의 경비, 왕의 경호를 맡았다. 중앙군의 2군 6위와는 다른 부대이다.[1]

2.5. 조선


1392년,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들을 기반으로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를 설치하게 한다. 이후 의흥친군위는 기존 고려의 중앙군이었던 2군 6위와 합쳐져 10위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의흥친군위[2]와 나머지 8위[3]의 지휘체계가 달라 비효율적이란 지적이 나오자, 1394년 정도전의 제청에 따라 10위(十衛)는 10사(十司)[4]로 개편되었다. 의흥친군좌위는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의흥친군우위는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로 개편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8위의 응양위(鷹揚衛)[5] 역시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개편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이후 태종 4년인 1404년, 응양위(鷹揚衛)[6]가 창설되었고 1407년에는 내금위(內禁衛)가, 이어 1409년에는 내시위(內侍衛)[7]와 겸사복(兼司僕)이 연달아 설치되면서 금군의 전력이 증강되었다. 그러나 북방 국경이 여진족의 침입으로 혼란해지자 점차 내금위, 겸사복 병력을 북방으로 파견하는 관행이 생겼고, 이에 따라 궁궐의 경비가 허술해졌다는 지적이 나오자 성종 대인 1492년 우림위(雨林衛)가 새로 만들어져 3위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우림위의 창설에도 금군의 부족은 여전했는데, 이는 세조 이후 대규모 군축이 진행되어 군 규모 자체가 크게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8] 북방군과 남도의 수군을 제외하고는 질 역시 현저히 저하되어 어쩔 수 없이 금군이 계속 국경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금군을 보충하기 위해 정로위(定虜衛)[9], 평로위(平虜衛)[10] 등이 창설되었고 중앙군인 오위 중 정예 병종인 갑사(甲士), 별시위(別侍衛) 등도 역시 궁궐 숙위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갑사와 별시위 역시 북방으로 파견되어 임진왜란 전까지 병력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양란 이후 효종 재위 시 3위를 통합하여 내삼청(內三廳)이란 단일 군영 통제 아래 두었고, 지휘는 좌우별장 두 명이 맡았다. 이후 현종 7년 금군청(禁軍廳)으로 개칭한 후 금군별장[11]금위영 중군(中軍)이 겸하게 함으로써 금군청이 금위영 휘하에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 12년 병조에서 금군별장을 별도로 뽑게 한 뒤 금위영에서 독립하였으며 금군별장 아래 7명의 번장(番將)[12]이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영조 재위 시 명칭이 다시 용호영(龍虎營)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군영의 최고책임자는 금군별장으로 부르게 하였다. 정조 즉위 후 숙위소[13], 장용영이 창설되어 새로 궁궐 숙위 업무와 국왕 경호 업무를 맡자 기존 인원에서 100명 감축된 600여명의 규모를 유지하다가 정조 사후 순조 재위 시 다시 700명으로 증원되었다.[14]
조선에서는 금군을 제외하고도 무예청(武藝廳)[15], 호위청(護衛廳)[16], 선전관청(宣傳官廳)[17], 내시부(內侍府)[18] 등이 왕의 근접 경호와 궁궐의 경비를 맡았다.
이후 1881년 무위영(武衛營)[19]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무위영이 창설된지 6개월도 체 안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해체되었고 친군영(親軍營)으로 재편성되었다.[20] 1894년 친군영이 해체된 이후에는 훈련대시위대가 맡다가 친위대에 해당 업무가 이관되었다. 이후 역사는 대한제국군 항목 참조.

2.6. 한나라


삼국지에서는 금군의 지휘관이 대장군하진이었는데 하진십상시에 의해 사살당한 이후 지휘체계가 붕떠버렸다. 이후 동탁이 입성하자 가후동탁에게 진언하여 동탁의 병력 3,000명을 800명씩 3개조로 나눠 2400명으로 만들어 새벽에 몰래 내보낸 후 나머지 600명만으로 주둔하도록 한 뒤 아침에 1개조, 점심에 1개조, 저녁에 1개조를 각각 북을 울리며 낙양성에 입성하도록 했고 이 3개 조는 또다시 야밤에 몰래 성 밖으로 나간 뒤 다시 입성하는 방식을 몇날 며칠동안 반복한 끝에 하진이 지휘하던 금군들을 동탁에게 항복하게 했다. 금군은 서량에서 동탁을 도와주기 위해서 계속 병력을 보내는 줄 알고 동탁에게 항복했다. 그 금군 장수 중 한명이 조조도 무찌르고 손견도 무찌른 서영이었다.

2.7. 송나라


황제의 전제 정치와 문치주의의 병폐 때문에 강간약지(중앙의 금군을 강화하고 지방군을 약화시킨다.)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 결과 송나라 군대는 개국 이래 멸망할 때까지 연전 연패를 기록하였으며, 후일 북방의 금나라에게 정복당한다. 문(文)의 극단적인 우세와 무(武)의 극단적인 천시가 빚어낸 비극.

3. 매체


사극에서는 국왕 경호, 궁궐 경비 외에도 왕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국산 판타지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에는 왕과 황제를 지키는 전속 경호병이자 황제의 밀명을 받아서 행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류는 유해의 폭포사모 페이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붙여준 갈바마리를 비롯한 22명의 두억시니이며, 금군들에게는 고위 관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도 불문에 부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킹덤(드라마)에서 등장한다.

4. 같이 보기



[1] 금군을 오늘날 청와대 경호실이라 한다면 2군 6위는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수 있다.[2] 의흥친군좌위와 의흥친군우위로 구성[3] 응양위, 금오위,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비순위, 천우위, 감문위[4]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5] 고려 시대 국왕의 호위를 맡았던 2군 중 하나인 응양군(鷹揚軍)이 개편된 부대[6] 상단의 응양위와는 이름만 같은 부대로서 1474년 내금위에 흡수된다.[7] 1424년 내금위에게 흡수된다.[8] 세조 시기 조선의 상비군은 무려 8만명에 달하였으나 이후 성종 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을 보면 중앙군 약 1만, 지방군 약 4만(수군 포함)으로 크게 줄어든다. 설상가상으로 장부 상의 병력 중 상당수는 방군수포 제도를 통해 군포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아 실제로 근무하던 병사 수는 더욱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9] 한량들로 구성된 부대로, 겸사복장의 지휘를 받아 궁궐 숙위 등을 담당했다. 한량들이 금군에 가기 위해서는 정로위 근무 경험이 필수였다. 중종에 설치되어 광해군 대에 폐지된다.[10] 조선 초 하삼도의 한량들로 구성한 부대인 호익위(虎翼衛)가 세조 대에 개편된 부대로 권문세가의 자제들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상당수가 갑사나 별시위(別侍衛)로 전출되었다.[11] 좌우별장을 통합한 관직.[12] 내금위장 3명, 우림위장 2명, 겸사복장 2명[13] 숙위대장은 홍국영이 맡았었다.[14] 2만명에 달하는 장용영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15] 무예청에 소속된 호위무사들을 무예별감, 줄여서 무감이라 불렀었다.[16] 인조반정 당시 동원된 사병(士兵)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부대로, 350명 전원 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정1품의 호위대장이 있었으나 정3품의 호위별장이 사실상 지휘하였다.[17] 왕명 출납과 경호를 맡았던 선전관들이 속해있던 관청. 문반이 홍문관에 들어가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면 무반은 선전관이 되는 것을 명예로 여길 정도로 조선시대 무반들의 로망 중 하나였다.[18] 왕의 근접경호를 도맡던 내시를 시위(侍衛)내시라 한다.[19]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폐합해 만든 군영.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맡았다.[20] 친군장위영(親軍將衛營)이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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