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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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司馬乂
277년 ~ 304년
서진의 황족. 무제 사마염의 16남. 자는 사도(士度). 미인 심씨의 아들로, 사마위의 동복아우이다.
2. 생애
289년 12살의 나이로 형주의 장사왕에 봉해진 사마예는 291년 동복형인 초은왕 사마위가 가남풍의 모략에 휘말려 사마량, 위관 척살에 이용당한 뒤 처형되었을 때 다른 왕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의 죽음을 홀로 애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후 사마위와 같은 어머니를 두었다는 이유로 상산왕으로 격하된 사마예는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며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는 신장이 7척 5촌이었고 명량하면서도 결단력이 뛰어났으며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추면서도 매사에 겸허한 자세로 임했고 명예를 중시했다. 301년에 제왕 사마경,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과 손을 잡고 황제를 참칭한 조왕 사마륜을 주살했다. 그 후 표기장군에 임명되었고 본래의 봉국이었던 장사왕에 복직할 수 있었다.초왕이 조서를 받았으니 어찌 그 잘못을 알았겠는가!
신야왕 사마흠은 조왕 사마륜이 토벌된 뒤 자신의 진수 지역인 형주로 돌아가려고 제왕 사마경과 함께 수레를 타고 진무제의 능묘에 배알하러 갔다. 이 때 그는 사마경에게 권했다.
이때 장사왕 사마예 역시 사마영과 함께 능묘를 배알했는데, 그는 사마영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성도왕(사마영)은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함께 큰 공훈을 세웠으니 지금은 의당 그를 머물게 하여 함께 정치를 보필하게 해야 하고,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다면 마땅히 그의 병권을 빼앗아야 합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예의 말을 들은 사람은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마영은 "사마경에게 권력을 양보하고 번국으로 돌아가서 사해의 인심을 거둬들이라."는 노지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조정에서 물러났다.천하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만드신 대업이니 대왕께서 오직 이를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제왕 사마경이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면서 실권을 잡은 후, 측근들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독점하고 공사 간의 집들을 수백 채나 헐어버리며 왕부를 크게 지어 서궁과 같은 규모로 만드는 등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이때 하간왕 사마옹의 장사 이함은 양주 자사 황보상과 불편한 관계였는데, 황보상이 제왕 사마경의 참군사에 발탁되자 불안감을 느꼈다. 게다가 사마경의 우사마인 조양과도 틈이 생기자 이러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해 말 한 필을 타고 사마옹에게 달아나서 사마경을 토벌할 것을 권유했다. 이때 그는 사마옹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사마옹은 그 말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이함을 도독으로 삼고 장방 등을 거느린채 낙양으로 진군했다. 여기에 사마영에게도 가담할 것을 권했고, 사마영 역시 이에 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장 낙양으로 진군하지 않고 사마예에게 격문을 보내 사마경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세력이 약한 사마예가 사마경을 당해내지 못하고 주살당할 게 뻔하다고 여기고 사마예가 사망하는 즉시 그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아 사마경을 토벌할 작정이었다.성도왕은 지친이며 커다란 공로를 세웠는데도 미루고 양보하며 번국으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제왕은 지친을 뛰어넘어서 정사를 전횡하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곁눈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사왕에게 격문을 보내어 제를 토벌하도록 하면 제왕은 반드시 장사왕을 주살할 것이고,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왕의 죄를 드러내어 그를 토벌한다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제왕을 내쫓고 성도왕을 세우며 다그치는 무리를 제거하고 지친을 세워서 사직을 안정시키면 큰 공훈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예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제왕 사마경이 동애를 파견해 자신을 습격하게 하자, 그는 좌우에 있는 100여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서 여러 문을 닫고 혜제를 받들어 대사마부를 공격했다. 이에 동애는 궁궐의 서쪽에 군사를 늘어놓은 후 불을 질러 천추신무문을 태웠다. 사마경이 사람을 시켜 추우번을 가지고 가서 "장사왕이 조서를 고쳤다."고 외치게 하자, 사마예는 "대사마가 모반했다."고 맞받아치게 했다. 이후 사마예는 사흘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사마경의 무리를 격파했고, 사마경은 부하 조연에게 배신당해 전각 앞으로 끌려갔다. 혜제가 사마경을 측은히 여겨 살려주려 했지만, 사마예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나무라며 사마경을 끌고 나가게 한 뒤 창개문 밖에서 목을 베고 그의 수급을 6군에 돌리며 그를 따르는 무리의 삼족을 멸하니 죽은 사람이 2,000여 명이었다. 또한 사마경의 아들 사마초, 사마빙, 사마영을 금용성에 가두고 사마경의 동생인 북해왕 사마식을 폐위시켰으며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영녕에서 태안으로 고쳤다.
사마예는 조정을 장악한 뒤 일이 크고 작고 간에 모두 업에 가서 성도왕 사마영에게 자문을 받았으며 다른 왕들과도 널리 의논해 협치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또한 파촉에서 조정에 반기를 든 이류를 토벌하고자 시중 유침을 파견해 나상, 허웅 등의 군사를 통제하게 했는데, 도중에 하간왕 사마옹이 유침을 장안에 머물게 하여 자신의 군사로 삼고, 석원이 그를 대신해 파촉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형주에서 장창이 반란을 일으켜 만족들을 선동해 세력을 키워가자, 사마예는 둔기 교위 유교를 예주자사로 삼고, 영삭 장군 유홍을 형주 자사로 삼아 장창을 토벌하게 했다.
유교는 여남에 주둔한 뒤 예주를 향하던 장창의 부하 황림의 20,000명을 격파했다. 얼마 후 사마흠이 섣불리 번성에 이른 장창과 싸웠다가 전사하자, 사마예는 유홍을 진남장군 겸 도독형주제군사로 삼아 사마흠을 대신하게 했다. 유홍은 남만 장사 도간을 대도호로 삼고 참군 괴긍을 의군독호로 삼았으며, 아문장 피초를 도전수로 삼아 진군해 양양을 점거했다. 그러나 장창이 완을 포위하고 조양의 군사를 격파하고 양이를 살해하자, 유홍은 물러나 양양에 주둔했고 장창이 양양을 공격하자 격파했다. 이후 유홍은 도간, 피초와 함께 장창을 잇달아 격파해 끝내 격멸했다.
이무렵 황보상이 다시 사마예의 참군이 되고 황보상의 형 황보중이 진주자사로 임명되자, 이함은 위기감을 느끼고 사마옹에게 유세했다.
황보중은 이를 알고 노격을 상서성에 올리고 농상의 군사를 발동해 이함을 토벌하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사마예는 병사들이 지쳐 있다는 이유로 사자를 파견해 황보중에게 군사 행동을 중단하게 하고 이함을 징소하여 하남윤으로 삼았다. 이함은 징소에 응했지만 황보중이 명령에 따르지 않자, 사마옹은 금성 태수 유해, 농서 태수 한치 등을 파견해 네 군의 군사를 합하여 그를 공격하게 했다. 또한 사마옹은 비밀리에 이함과 시중 풍손, 중서령 변수로 하여금 사마예를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황보상에게 적발되었고, 사마예는 이함, 풍손, 변수를 잡아 죽였다. 하간왕 사마옹은 이함 등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어진 대신을 죽인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즉시 군대를 일으켰다.황보상은 사마예가 일을 맡겼지만 황보중은 끝내 다른 사람이 채용할 수 없을 것이니 의당 일찍이 제거해야 합니다. 표문을 올려서 황보중을 내직으로 옮기게 하고 그가 장안을 지나는 것을 이용하여 붙잡으십시오.
한편, 성도왕 사마영은 사마예가 비록 자신을 존중해주고 매사에 자문을 구하긴 하지만 황태제가 되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어서 내심 사마예를 꺼려했다. 그러다가 하간왕 사마옹으로부터 함께 힘을 합쳐 사마예를 토벌하자는 건의를 받자, 그는 이에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이에 노지가 말렸다.
참군 소속도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공께서는 전에 큰 공로를 세우셨지만 권력을 버리시고 총애 받는 자리도 사양하셨기에 당시의 명망이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만약에 관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문관의 복장을 입고 조정에 들어간다면, 이는 패권의 주인이 할 일입니다.
그러나 사마영은 끝내 그 말을 듣지 않고 303년 8월 사마옹과 함께 표문을 올렸다.사람에게 형제가 있는 것은 마치 좌우의 손과 같습니다. 명공께서 천하의 적이 되는 사람을 감당하려고 하시면서 먼저 한 손을 끊는 게 옳겠습니까?
이에 조정은 사마예를 태위, 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아 이들을 방어하게 했다. 사마옹은 장방을 도독으로 삼고 정예군 70,000명을 이끌고 함곡관 동쪽에서 낙양으로 달려가게 했다. 또한 사마영은 군사를 이끌고 조가에 주둔해 평원 내사 육기를 전장군 겸 전봉 도독으로 삼고 군사 20만을 거느려 낙양을 향하게 했다.사마예는 공로를 처리하는 일이 불공평하였으며, 우복야 양현지, 좌장군 황보상과 더불어 조정의 정치를 오로지 농단하면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니 청컨대 양현지, 황보상의 목을 베시고 사마예를 보내어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303년 8월 24일, 사마예는 황보상에게 10,000여 명을 거느리고 장방을 의양에서 막게 했다. 이후 사마예는 9월 7일에 사마영의 부하 견수를 낙양성 동문 밖에서 패퇴시켰고, 8일엔 황제를 받들고 건춘문에서 육기와 맞붙었다. 사마예의 사마인 왕호가 수천 기병에게 창을 말에다 묶고서 마함의 진지로 돌격하게 하니, 마함의 군사들이 혼란스러워졌고, 마함은 도중에 잡혀 참수되었다. 육기의 군대는 대패해 칠리간[1] 으로 도주했고, 칠리간은 쌓인 시체로 인해 흐르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전투에서 대장 가숭 등 16명의 목을 베었다. 이후 육기는 사마영을 배반하려 한다는 모함에 시달린 끝에 참수되었고 그의 삼족이 주살되었다.
사마예는 여세를 몰아 장방을 공격했다. 이때 장방의 병사들은 멀리서 황제가 탄 승여가 사마예의 군대와 함께하고 있는 걸 보고는 사기를 잃고 달아났다. 결국 장방은 5,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했다. 하지만 장방은 도망치려는 병사들에게 "승리와 패배는 군사 작전에서 항상 있는 일이고 군사를 잘 운용하는 사람은 실패한 것을 이용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다독인 뒤 밤에 몰래 낙양성에서 7리 떨어진 곳에 보루를 여러 겹으로 구축하고 밖에서 창고의 곡식을 끌어다가 군사들에게 먹였다. 사마예는 장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가볍게 여겼다가 장방이 보루를 완성했다는 보고를 받자 11월에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조정은 사마예, 사마영이 형제 사이이므로 말로 하여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중서령 왕연 등에게 사마영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고 사마예와 섬(陝)을 기준으로 나눠 가지라고 했지만 사마영은 듣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기회를 이용해 사마영에게 편지를 보내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진술하고 그와 더불어 화해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영이 "황보상 등의 목을 벤다면 군사를 이끌고 업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하자 차마 그럴 수 없었던 사마예는 화해를 포기했다. 이후 사마영은 군대를 진격시켜 경사를 압박했고, 장방이 낙양성 동쪽에 있는 제방인 천금알을 파괴하니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이 모두 말라버렸다. 이에 사마예는 왕공 집안의 노비들을 징발하여 손으로 방아를 찧어서 병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게 했는데, 1품 이하의 관리로 징집되지 않은 자로 13세 남성 이상은 모두 이 노역에 종사하게 했고 노복을 징발해 군사들을 돕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공사 간에 모두가 궁핍해졌고 쌀 값은 1석에 1만 전으로 치솟았다. 이에 조적이 사마예에게 건의했다.
사마예는 이에 따라 유침에게 구원을 청하니, 유침이 7개 군의 무리를 합해 10,000명을 모아 장안으로 진격했다. 또한 사마예는 황보상에게 몰래 샛길로 가서 황제가 손수 쓴 조서를 품고 가서 유해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 행동을 중지하게 하고, 황보중에게는 칙령을 내려 사마옹을 토벌하게 했다. 황보상이 샛길로 가서 신평에 이르러 그의 5촌 생질을 만났다. 그러나 생질은 평소 황보상을 증오해서 사마옹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결국 황보상은 사마옹에게 잡혀 죽었다. 이후 사마예는 1년 가까이 사마영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 번번이 격파해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은 이가 6~7만 명에 달했다. 당시 성안의 양식은 날로 궁핍해졌지만, 사마예가 황제를 진심으로 받들며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군심을 잘 다독였기에 사졸들은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장방은 사마예의 기개가 굳건한 것을 보고 낙양을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장안으로 돌아가려 했다.유침은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과단성이 있고 강합니다. 옹주에 있는 병력으로 하간왕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니, 의당 황상에게 계문을 드려서 조서를 유침에게 내려 군사를 일으켜 사마옹을 습격하게 하십시오. 사마옹이 궁색하고 급하게 되면 반드시 장방을 부르는 자구책을 쓸 것입니다.
그러나 '''낙양에 있던 동해왕 사마월이 계해일에 전중에 있는 제장들과 더불어 밤중에 사마예를 체포해 다른 관청으로 보내버렸다.''' 이후 사마월은 황제에게 게문을 올려 사마예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금용성에 가두게 했다. 전중에 있던 장사들은 뒤늦게 외부에 있던 적이 많지 않음을 보고 사마예를 배신한 걸 후회해 다시금 사마예를 빼내 사마영과 대항하려 했다. 이에 사마월은 두려워해 사마예를 죽이려 했지만, 황문시랑 반도의 만류를 받아들여 장방에게 낙양으로 들어와서 사마예를 처리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방은 낙양으로 들어와 약탈을 심하게 벌이는 동시에 사마예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사마예는 죽기 전 혜제에게 표를 올렸다.
304년 정월 25일, 사마예는 사마옹의 부장인 진무장군 장방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27세. 장방이 적대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이 워낙 잔인해서 그의 부하들도 치를 떨고 눈물을 흘린 정도였다고 한다. 사마예는 팔왕의 난에서 권력을 잡았던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혜제를 존중하고 다른 왕들[2] 과 협치를 하려고 무척 노력하였기에, 결과적으로 하간왕 사마옹의 농간에 놀아난 사마영의 폭주로 비극을 맞게 되었지만 혜제는 기본적으로 사마예를 충신으로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장방의 부하들까지도 눈물을 흘린 데는 이 사람의 죽음이 잔인했던 것 뿐 아니라 나름 덕망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팔왕의 난의 비극성을 더해주는 인물.폐하께서는 독실하시고 온화하시어 신하들에게 조정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신은 충효를 조심하고 천신과 지신을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여러 왕들이 잘못을 되풀이하고 여러 사람의 견책을 받들었으며, 조정의 신하들이 정처없이 각자의 곤란함을 근심하고 반역자를 따로 섬겼습니다. 신은 몸을 아끼지 않았으나 대진은 쇠미해지고 있으며 도당이 극에 달하니, 폐하께선 외롭고 위태로우십니다. 신하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죽는다면 이는 집안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흉인을 가까이 두지 마십시오. 그들은 폐하께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후일 그의 죽음을 명분삼아 사마월과 사마치가 사마영과 사마옹의 사형을 합리화했다.
3. 여담
이름인 애(乂)를 '벨 예'가 아닌 '징계할 애'로 읽어 사마애라고도 한다.
그렇게 되면 동진의 시조 사마예와 햇갈리게 되지만 일단은 많이 쓰는 표기를 따른다. 동진의 시조 사마예는 진원제 문서 참조.
후삼국지에서는 사마예가 죽을 때 진정으로 황제를 위했던 유일한 황족의 죽음이라고 나온다.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에서 플레이 가능 군주로 등장한다. 타입은 용장. 트레일러에서 사마옹과 싸우는 장면과 함께 나온 군주들 중 유일하게 백성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팔왕의 난의 유비 포지션일듯 하다. 팔왕의 난에서 유일하게 충신다웠던 점을 반영한 건지 팔왕 dlc 시기에 CA에서 가장 밀어주는 캐릭터였으며 트위터 로고도 사마예의 사진으로 하고 특성에서도 사마월과 함께 유이하게 연구속도를 올려주는 자원을 가지고 시작하게 해주는 등 많이 챙겨줬었다. 팔왕을 하는 사람들도 최후의 개념인이란 점 때문이었는지 주로 사마예를 많이 플레이 했던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