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추정의 원칙
1. 개요
라틴어 '''res ipsa loquitur'''[1] 의 번역어로, '과실추정의 원칙' 내지 '과실추론법칙'으로도 번역된다.
피고의 과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종류의 사고나 재해 등에 적용되는 영미법의 불법행위법(tort law) 분야의 원칙 중 하나이다.
사실추정의 원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법의 과실책임주의[2] 부터 이해해야 한다. 한국 민법을 비롯한 대다수의 근대 민법은 원칙적으로 과실책임주의를 적용하는데, 이는 개인은 자신의 고의나 과실이 개입된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즉 원칙적으로 고의나 과실이 없는 개인은 법적 책임 또한 지지 않는다. 따라서 피고에게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고자 하는 원고는 피고가 적어도 과실에 의해 위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3][4]
그런데 불법행위 사건 중에서 피고의 과실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 예를 들어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도구가 뱃속에 들어있는 채로 봉합을 해버린 사건의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의료진의 과실이 개입되어 있는데, 이런 사건의 경우 원고는 수술을 받았다는 점, 수술도구가 뱃속에 들어있다는 점 등만 증명하면 굳이 의료진의 과실을 직접 증명하지 않아도 의료진의 과실이 추정된다는 것이 바로 '''사실추정의 원칙'''인 것이다. 즉 일종의 증명책임 완화론 내지 증명책임 전환론인 것이다.
한편 사실추정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추정이기 때문에 피고 측에서 이를 뒤집는 것도 가능하다.
영국의 Byrne v Boadle 판결(1863)(참고)에서 처음 개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의 내용은, 원고가 밀가루를 판매하는 상인인 피고의 점포 앞 도로를 지나가다가 창문에서 떨어진 밀가루통에 맞아 다친 것이다. 이 사건에서 폴록(Charles Edward Pollock. 1823-1897) 판사는 다음과 같이 설시하였다.[5]
종래 많은 사고는 그 사고 자체로부터 과실이 추정될 수 없다고 한 것은 정당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사고의 사실로부터 과실의 추정이 생길 수 없다는 원칙을 설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에서 밀가루통이 창고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가정한 경우에 원고는 어떻게 이 사고가 무슨 원인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 밀가루통이 굴러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은 창고에 있는 밀가루통을 지키는 사람의 의무이고 이 사건에서는 과실의 일응의 증명(prima facie evidence)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밀가루통은 어떠한 과실 없이 창고에서 굴러 떨어질 수 없었고 (중략) 손해를 야기한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잘못 놓여져 있다가 손해의 원인이 되면 그 물건을 올바른 위치에 놓을 의무가 있는 자는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함에 일응의 증명이 있다고 생각하며, 과실의 추정을 반증할 사실이 있다면 위 의무 있는 자가 이를 증명하여야만 한다. (후략)
2. 요건
사실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다음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건은 다시 일반원칙으로 돌아가 원고가 피고의 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 다른 누군가의 과실 없이는 일반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종류의 손해
- 전적으로 피고가 관리하는 영역에서 발생한 일로 인한 손해
- 원고가 손해 발생에 기여하지 않았음
3. 주로 적용되는 분야
앞서 말했듯이 민법의 불법행위 분야에서 적용되는 원칙이기 때문에 형법, 행정법, 헌법 등 다른 분야와는 기본적으로 무관하다.
불법행위 중에서도 주로 의료사고에서 사실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 의료사고는 대표적으로 원고가 피고의 과실을 직접 입증하기 어렵고, 전적으로 피고가 관리하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고이기 때문에, 사실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면 원고 입장에서는 의사인 피고에게 불법행위책임을 묻는 것이 훨씬 수월해진다. 다만 이 경우에도 원고는 여전히 그러한 사고가 누군가의 과실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 종류의 사고라는 점을 논증해야 한다. 한국 법학자들 또한 의료사고에서의 원고의 입증책임을 완화하기 위해 사실추정의 원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제조물책임 분야에서 사실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기도 한다. 제조물책임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소비자가 입게 되는 피해에 관한 법분야인데, 원고는 제조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제조업자의 과실이 있었다는 점을 직접 증명하기 어렵고, 전적으로 제조업자가 관리하는 영역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서 사실추정의 원칙이 적용될 만한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
4. 다른 원칙과의 비교
- 일응의 추정: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간접사실만 증명했음에도 요증사실을 추정하는 법원리이다. 한국 법원이 의료소송에서 원고의 입증책임을 완화하기 위해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추정의 원칙과 유사한 대륙법계의 법원리이다.
- 무죄추정의 원칙: 얼핏 비슷해 보이나 정반대의 원칙이다. 사실추정의 원칙이 민사법 분야에서 원고의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원칙이라면, 무죄추정의 원칙은 형사법 분야에서 이를 강화하는 원칙이다.
- 과실책임의 원칙: 앞서 말했듯이 사실추정의 원칙의 전제가 되는 원칙이다. 과실책임주의가 요구되지 않는 분야에서는 애초에 과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실추정의 원칙을 적용할 필요도 없어진다.
- 무과실책임주의: 과실책임주의의 예외로, 피고가 과실이 없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이다. 원고에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일견 사실추정의 원칙과 유사해 보이나, 무과실책임주의가 적용되는 사례에서는 원고가 피고의 과실을 입증할 필요가 아예 없기 때문에 사실추정의 원칙이 적용될 여지 자체가 없어진다. 대표적으로 공작물에 대한 소유자의 2차적인 손해배상책임이 그러하다.
[1] 직역하면 "사실 자체가 말한다."라는 뜻.[2] 자기책임의 원칙이라고도 한다[3] 민법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4] 이와 달리 원고가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피고 측에서 무과실을 입증해야 한다.[5] 오용호, "미국 불법행위법상의 Res Ipsa Loquitur원칙(상)", 법조, 39권 2호(1990. 2.), 62면의 번역을 일부만 고쳐서 전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