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타 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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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田栄男 1920.02.15~2010.10.22
1. 개요
2. 상세


1. 개요


일본프로 바둑 기사. 예리하고 깊으면서도 정확한 수읽기로 상대의 빈틈을 찌르고 타개하는 솜씨가 일품이라 '''면도날 사카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상세


다카가와 가쿠 이후 1961~1967년 혼인보전 7연패를 달성하였고,[4] 1963년에는 명인 타이틀을 획득해, 선수권제 최초의 '''명인 혼인보'''가 되었다.[5] 그 밖에도 각종 타이틀을 휩쓸며 린하이펑이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에서 명실상부한 압도적인 1인자로 군림했다.[7][8]
실전에서 특유의 수읽기를 발휘해 묘수를 많이 둔 것으로 유명하며, 1960년 후지사와 히데유키와의 최고위전 제1국에서 둔 배붙임의 묘수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한때 1급[9]이 되려면 꼭 보아야 한다는 평을 들었던 '''묘 시리즈'''를 집필하였고, 그의 사활집인 '''주옥힐기'''는 귀수마수나 천룡도처럼 억지스럽지 않은 실전에서 나올 법한 형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바둑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양서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바둑 기사로서 맹렬한 행보 뿐만 아니라. 일본 바둑을 실질적으로 완성시킨 사람으로도 평가받는다. 일본기원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정부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어 일본기원 회관을 완공하고 스폰서를 유치하고 재정적 바탕을 만드는 등 공헌했고, 중일 바둑 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 정치적 해법을 모색해 중일 간 바둑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또 '예'와 '도'로서 일본 바둑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일본의 문화계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대표 휘호가 '璨璨'(옥빛 찬)이었는데, 이는 일본어로 읽으면 '산산'으로, 33 침입의 명수였던 사카타 에이오를 잘 상징하는 휘호라 하겠다.
만화 히카루의 바둑에 등장하는 혼인보 타이틀 홀더 쿠와바라 혼인보는 사카타 에이오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1]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기사는 혼인보 가문을 계승하는 취지에서 이름에 '秀' 자나 '丈'자, '元'자나 '昭', '寿' 자등의 글자를 넣은 호(号)를 쓸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다만 조치훈은 그냥 본인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건 조치훈 본인이 자신의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2] 혼인보전 5연패 이상 혹은 통산 10회 이상 획득한 기사는 은퇴 후 또는 60세 이상부터 "○○세 혼인보"를 자칭할 수 있으며, 9연패를 달성한 기사는 곧바로 "○○세 혼인보"를 자칭할 수 있다.[3] 1998년에 혼인보전 10연패에 성공한 조치훈이, 그 공적을 인정받아 곧바로 '''25세 혼인보'''를 자칭할 수 있게 되면서, 혼인보전의 명예칭호가 현재의 방식[2]으로 바뀌게 되었다.[4] 혼인보전 7연패의 업적을 인정받아 은퇴 후 혹은 60세 이상부터 '''명예 혼인보'''라고 자칭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는데, 해당 칭호가 1998년에 21세(世) 혼인보 슈사이 이후의 대를 잇는 "○○세 혼인보 칭호"로 변경되면서 "23세 혼인보 에이쥬(本因坊栄寿)"[1]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되었다.[3][5] 그 이전에 명인 자리에 올랐었던 역대 혼인보들도 혼인보이자 명인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혼인보 가문의 당주이자 당대 1인자였기 때문이다. 타이틀이 신문 기전화되기 전의 일이었고, 혼인보와 명인 타이틀이 모두 신문 기전화된 이후 혼인보와 명인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한 사람은 사카타 에이오가 최초였다.[6] 연간 최고 승률 부문 역대 1위.[7] 사카타 에이오의 전성기 시절은 일본 최고=세계 최고였던 시절이었다. 그런 일본에서 각종 타이틀을 휩쓸고 1964년에는 연간 30승 2패[6]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8] 다만, 이후의 실적과는 달리 프로 입단은 굉장히 어렵게 했었는데, 어렸을 때 병약했던 사카타가 입단 시험을 치를 때 상대방들이 체력전으로 밀어붙였기 때문.[9] 기원 1급. 타이젬 강8단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