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전(일본)

 

名人戦 / The Meijin Title Match

1. 개요
1.1. (구)명인전
1.2. (신)명인전
2. 역대 명인전 우승자
2.1. (구)명인전
2.2. (신)명인전


1. 개요


일본기원에서 시행하는 바둑 기전이다.
첫 대회인 1962년부터 1975년 까지는 요미우리 신문에서 주최를 하였으나, 1976년 대회부터는 아사히 신문에서 주최를 하기 시작하였다.[1]

1.1. (구)명인전


1961년부터 요미우리 신문의 주최로 열린 일본의 프로바둑기전. 본래 명인은 일본의 바둑 최고수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가 현대적 프로기전의 명칭이 된 것. 기성전 출범 이전에는 혼인보와 함께 일본의 양대 기전이었다.
1기 구 명인전은 13명의 기사가 풀리그로 경기를 치렀는데, 제한시간은 각자 10시간 이틀 대국으로 덤은 5집이었고, 빅이면 백의 승리로 간주했다. 사실상 덤 5집 반이지만 덤 5집 반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후술한다.
어쨌든 1기 명인전은 최종적으로 우칭위안, 후지사와 히데유키, 사카타 에이오 세 기사의 경합이 되었다. 최종전을 치르기 전 1경기씩 남기고 있었을 당시 후지사와가 9승 2패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우칭위안과 사카타가 각각 8승 3패였다.
최종전에서 우칭위안과 사카타가 서로 대국을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최종전에서 후지사와가 이기면 그대로 우승, 지면 우칭위안과 사카타와의 대국에서 승자와 재대국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후지사와가 6승 5패로 이미 우승이 좌절된 하시모토 쇼지에게 유리한 바둑을 역전패했고 이에 충격을 먹은 후지사와는 홧김에 술을 마시러 나가버렸다.
이후 우칭위안과 사카타의 대국이 흑이 반면 5집을 남기면서 끝났다. 즉 '빅'이 되었는데 78번의 대국들 중 유일한 빅이었다. 당시 우칭위안이 백이었으니 우칭위안의 빅승이었고, 우칭위안과 후지사와가 9승 3패로 동률이 되었다.
그런데 '빅으로 인한 승리는 일반적인 승리에 밀린다.'라는 특수규정이 있었고, 후지사와는 이 특수규정에 의해 정말 극적으로 재대국 없이 그대로 초대 명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편 후지사와는 우승한 지도 모르고 술에 취해 있었고 요미우리 신문사는 후지사와를 찾아다녔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해프닝이 있었다.
2기부터는 전 대회 리그 상위 6명 + 예선을 통과한 3명간의 풀리그를 진행한 뒤 리그 우승자가 타이틀 보유자와 7번기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 방식은 현재까지 유지된다.
1975년 14기 대회가 끝난 이후 아사히 신문이 대회 주최권을 사들이고 1기부터 다시 대회를 시작하여 이전의 명인전을 '구(旧) 명인전' 으로, 이후의 명인전을 '신(新) 명인전'으로 부르게 되었다.

1.2. (신)명인전


1975년 쇼기 명인전을 주최하던 아사히 신문요미우리 신문으로부터 명인전 주최권을 사들여, 1976년 1기부터 대회를 다시 시작했다. 따라서 이전과 이후 대회의 역사는 분리되게 되었고, 필요할 경우 이전 명인전은 '구' 이후 명인전은 '신'을 붙여 구분짓고 있다. 아사히 신문에 대회 주최권을 넘긴 요미우리 신문은 새로운 프로기전인 '기성전'을 창설하여 1977년부터 현재까지 주최하고 있다.
혼인보, 기성전과 명인전을 동시 우승하는 것을 '대삼관'이라고 부른다. 현재까지 대삼관은 조치훈 九단이 '''세 차례''' 달성한 것이 유일하였으나 2013년 이야마 유타 九단이 명인전을 우승하며 두 번째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 명인은 이야마 유타 九단.

2. 역대 명인전 우승자



2.1. (구)명인전


회차
연도
우승
전적
준우승
비고
1회
1962년
후지사와 히데유키 八단
9승 3패
13인 리그 체제
2회
1963년
사카타 에이오 九단
4:3
후지사와 히데유키 九단

3회
1964년
사카타 에이오 九단
4:1
후지사와 히데유키 九단

4회
1965년
린하이펑 八단
4:2
사카다 에이오 九단

5회
1966년
린하이펑 八단
4:1
사카다 에이오 九단

6회
1967년
린하이펑 九단
4:1
사카다 에이오 九단

7회
1968년
다카가와 가쿠 九단
4:1
린하이펑 九단

8회
1969년
린하이펑 九단
4:2
다카가와 가쿠 九단

9회
1970년
후지사와 히데유키 九단
4:2
린하이펑 九단

10회
1971년
린하이펑 九단
4:2
후지사와 히데유키 九단

11회
1972년
린하이펑 九단
4:2
후지사와 히데유키 九단

12회
1973년
린하이펑 九단
4:3
이시다 요시오 九단
린하이펑 리버스 스윕
13회
1974년
이시다 요시오 九단
4:3
린하이펑 九단

14회
1975년
오타케 히데오 九단
4:3
이시다 요시오 九단


2.2. (신)명인전


회차
연도
우승
전적
준우승
비고
1회
1976년
오타케 히데오 九단
4:1
이시다 요시오 九단

2회
1977년
린하이펑 九단
4:0
오타케 히데오 九단

3회
1978년
오타케 히데오 九단
4:2
린하이펑 九단

4회
1979년
오타케 히데오 九단
4:1
사카타 에이오 九단

5회
1980년
조치훈 八단
4:1 '''1무'''[3]
오타케 히데오 九단

6회
1981년
조치훈 九단
4:0
가토 마사오 九단

7회
1982년
조치훈 九단
4:1
오타케 히데오 九단

8회
1983년
조치훈 九단
4:1
오타케 히데오 九단

9회
1984년
조치훈 九단
4:3
오타케 히데오 九단
조치훈 리버스 스윕, 최초 명예 명인
10회
1985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3
조치훈 九단

11회
1986년
가토 마사오 九단
4:0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12회
1987년
가토 마사오 九단
4:0
린하이펑 九단

13회
1988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1
가토 마사오 九단

14회
1989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1
아와지 슈조 九단

15회
1990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2
오타케 히데오 九단

16회
1991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1
린하이펑 九단

17회
1992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3
오타케 히데오 九단
2번째 명예 명인
18회
1993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1
오타케 히데오 九단

19회
1994년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4:0
린하이펑 九단

20회
1995년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4:1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21회
1996년
조치훈 九단
4:2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22회
1997년
조치훈 九단
4:2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23회
1998년
조치훈 九단
4:2 '''1무'''[4]
왕리청 九단

24회
1999년
조치훈 九단
4:1
요다 노리모토 九단

25회
2000년
요다 노리모토 九단
4:0
조치훈 九단

26회
2001년
요다 노리모토 九단
4:2
린하이펑 九단

27회
2002년
요다 노리모토 九단
4:1
조치훈 九단

28회
2003년
요다 노리모토 九단
4:1
야마시타 게이고 九단

29회
2004년
장쉬 九단
4:2
요다 노리모토 九단

30회
2005년
장쉬 九단
4:3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

31회
2006년
다카오 신지 九단
4:2
장쉬 九단

32회
2007년
장쉬 九단
4:3
다카오 신지 九단

33회
2008년
장쉬 九단
4:3
이야마 유타 八단

34회
2009년
이야마 유타 八단
4:1
장쉬 九단

35회
2010년
이야마 유타 九단
4:0
다카오 신지 九단

36회
2011년
야마시타 게이고 九단
4:2
이야마 유타 九단

37회
2012년
야마시타 게이고 九단
4:3
하네 나오키 九단

38회
2013년
이야마 유타 九단
4:1
야마시타 게이고 九단

39회
2014년
이야마 유타 九단
4:2
고노 린 九단

40회
2015년
이야마 유타 九단
4:0
다카오 신지 九단

41회
2016년
다카오 신지 九단
4:3
이야마 유타 九단

42회
2017년
이야마 유타 九단
4:1
다카오 신지 九단

43회
2018년
장쉬 九단
4:3
이야마 유타 九단

44회
2019년
시바노 도라마루 八단
4:1
장쉬 九단

45회
2020년
이야마 유타 九단
4:1
시바노 도라마루 九단

46회
2021년

0:0



[1] 정확하게 구분을 하기 위해 1975년 까지는 (구)명인전, 1976년 부터는 (신)명인전 이라고 표기를 한다.[2] 당시는 이를 제재하는 규정도 없었을 뿐더러 기록자도 어느 정도 용인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해당 사건이 터진 이후 착수와 관련된 질문은 금지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3] 원래 규정대로라면 2대1로 앞선 4국에서 흑을 잡은 조치훈의 반칙패가 돼야 하는 게 맞지만, 무난하게 두던 와중 갑자기 팻감을 써야 할 차례라는 걸 잊어버려 기록자에게 지금 패를 두어도 되냐고 질문해버린다. 그런데 이걸 또 기록자였던 히코사카 나오토 (당시)四단 두어도 된다고 답하는 바람에 조치훈이 정말로 팻감을 안 쓰고 패를 되따내 버렸다. 원래대로면 조치훈에게 반칙패가 선언되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사태를 만들어낸 심판에게도 책임이 컸기 때문에 갑론을박 끝에 대국은 무승부로 결론지어진다.[2][4] 3패빅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