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
1. 개요
인조반정 후 형성된 비공신 중심 강경파 청서와 지방의 처사, 유생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2. 상세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인조조 말년 서인은 낙당(原黨)·원당·산당·한당(漢黨) 등으로 분화되었다. 형성된 이유는 소현세자 사망 뒤 동생인 봉림대군[1] 이 세자가 되고,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이 역모에 연계되고 사사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산당은 강빈의 사면을 주장했으며 반청파였다.
산당의 유래는 호서의 회덕 등 지방의 처사, 유림와 유생 중심 정치세력을 말한다. 그러나 출신지, 거주지에 따라 정치 성향이 갈린 건 아니었다.
산당은 낙당과 원당의 주도권 강화를 위한 명분을 위해 산당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산당은 정국의 일신을 위해 원당의 퇴출을 추진했다. 일례로 효종이 즉위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6월 22일, 송준길은 삼사 관원들을 동원해 김자점과 원두표 등의 정사공신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였다. 결국 효종조 초에 김자점과 원두표와 그들의 세력들은 파직당하거나 전향했다.
산림의 등장은 실무 그룹이자 기득권인 한당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청서의 중심이자 척화파였던 청음 김상헌을 잇는 명분론의 거두로 등장한 우암 송시열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증가할수록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한당뿐 아니라 산당은 임금인 효종과도 자주 대립했는데 효종이 북벌을 주장하면서 대립 관계에서 협력/연합 관계로 뒤바뀌었다. 사실 둘의 생각은 달랐는데, 효종은 북벌등 무력 통치 행위를 통한 통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은 임금도 유학자라며 유교적 이상을 조선에 실현하려 했다. 신권 강화를 원하는 송시열과 왕권 강화를 원하는 효종은 배청/반청 등 겹치는 한 주장에 의해서 연합했지만 끝까지 대립했다.
산당은 효종과 현종조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현종조 말기에 돼서야 산당과 타 서인 붕당, 남인의 균형을 맞추었으나 숙종때 잦은 환국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고 송시열이 사사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에 너무 많이 퍼져 있었기에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고 한당과 노론으로 발전했다.
현재의 폴리페서(Polifessor)라고 불릴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