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항
[clearfix]
1. 개요
효종 때와 조선 때 송시열의 산당의 뒷받침이었으며 조정 내 노론을 이끌다가, 1차 환국 때 사사된다.
2. 생애
인조조 7년인 1629년 8월 1일 한성부에서 7형제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한성이지만, 현재 포천시 영평면으로 이주헤서 생활했다.
5살 때 어머니인 연안 김씨를 여의고 어려서, 원주에서 1년간 있다 청음 김상헌이 있는 풍산으로 내려가 배웠다. 또한, 송시열의 문하생이 되었다. 서인의 학통으로 통하는 김상헌-김장생-김집의 학문과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까지 받아들였다. 김상헌과 송시열의 계통을 받든 뒤엔 조정 노론의 수장이 되었다.
1646년 18살 때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어 진사시에서도 장원급제를 한 뒤, 1651년 알성문과에 응시를 하였다. 7명 중, 장원은 그였고 그로 인해 어촉(御燭)을 하사(下賜)받았다. 또한 정시까지 합격하여 효종으로부터 말을 하사품으로 받았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시강원 사서(司書),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사헌부지평(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이조정랑(吏曹正郞), 중학교수(兼 中學敎授)와 한학교수(漢學敎授)등을 역임했다. 그 뒤 수찬, 홍문관응교(應敎), 사간원 사간, 시강원 보덕까지 지냈다.
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1] 을과로 급제하였고, 당연하게도 의정부사인(舍人)을 거쳐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대사간, 형조참의, 승지(承旨), 부제학도 지냈다. 승정원의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간을 다시 거치다 같은 해 12월 승지직을 다시 역임했다.
2.1. 예송논쟁
1차 예송논쟁 때 영의정인 형 김수흥이 송시열을 비호한 죄로 남인 허적에게 밀려났으나, 같은 생각을 가졌던 그는 현종의 붕당 균형 맞추기 전략으로 정승직에 제수된다.
현종이 승하한 뒤 그 아들인 숙종이 즉위한 후, 남인의 송시열에 대한 공세는 강해지며 송시열은 유배당했다. 김수항은 조정 내 서인의 수장으로싸 복창군 형제의 석방 명령이 떨어지자 논리적이면서도 초강경인 상소를 올려 정면승부를 걸었다.[2] 하지만, 소년군주 숙종은 빠르고 흥분한 상태의 말에 논리까지 넣으며 서인은 더욱 배제되었고, 그 역시 유배되었다.
그러나, 김만기의 제안 하에 김석주가 주도히여 이뤄진 경신환국에서 남인이 다시 축출되면서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은 조정으로 복귀했고, 그 역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6년간 청남과 탁남의 협정으로 이뤄진 범 남인 정권과 비슷하게 9년간 노론과 소론이 나뉠 기미가 보였고, 이런 상황에서 숙종이 희빈 장씨를 지원하기 위해 남인을 대거 불러들이며 경신환국과 비슷하게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김수항은 서인 내 최고의 가문인 청음 김상헌의 가문과, 이어지는 김장생-김집의 학통+송시열의 제자라는 점까지 합쳐져 재집권한 남인의 첫번째 제거 대상이 되었고, 결국 사사되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