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표

 


'''원두표'''
元斗杓

'''본관'''
원주 원씨 시중공파
'''출생'''
1593년
'''사망'''
1664년 (향년 71세)
'''자'''
자건(子建)
'''호'''
탄수(灘叟), 탄옹(灘翁)
'''시호'''
충익(忠翼)
'''봉작'''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가족관계'''
아버지 원유남, 부인 삭녕 최씨, 7남 1녀(아들 원만석, 원만리, 원만춘 등, 딸)
'''붕당'''
서인, 원당
'''최종 관직'''
좌의정
1. 개요
2. 생애
2.1. 효종과 원두표
3. 가계

[clearfix]

1. 개요


조선의 무신이자, 인조조낙당, 한당, 산당과 함께 서인 4당의 한 축을 담당했던 원당의 영수였다.

2. 생애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 출생으로, 대대로 무인 가문이였다. 인조반정에 참여했고, 공을 인정 받아 정사공신 2등에 책록과 동시에 원평부원군에도 책봉되었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전주부윤이 된 뒤, 나주목사와 전라도 관찰사로 계속해서 승진했다. 병자호란 때는 어영부사로써 남한산성 방어의 담당자이기도 했다. 6년 뒤엔 형조판서로 승진한 뒤 강화부유수와 경상도 관찰사로 어째서인지 약간 판서보다 약간 급이 낮은 관직들은 역임했다.
공신인 만큼 공서이 일원으로써 김상헌-김장생청서와 다투다 김자점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 분당해서 각각 김자점은 낙당의 원수, 원두표는 원당의 원수가 되었다.[1] 이 시기에 임경업의 국문을 주창하기도 했다.
1649년엔 호조판서로 있다 파직당한 뒤, 2년 뒤에 좌참찬좌찬성으로 다시 복귀하고, 3년 뒤엔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떄 김육대동법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김육이 역시나 밀었던 화폐(특히 동전) 사용에는 적극 찬성했다. 김자점이 죽고, 훨씬 그전에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낙향을 택해서 이시백과 함께 구신으로써 요직을 맡았다. 우의정좌의정에도 올랐다. 한편, 현종의 즉위년에 터진 1차 예송논쟁 때 판중추부사로써 대신 중 한 명의 자격으로 허목의 입장을 지지했다.

2.1. 효종과 원두표


병조판서 재임 때부터 이완, 유혁연과 함께 효종의 국방력 강화 정책에 크게 힘쓴 인물 중 한 명이다. 1654년 그의 건의 덕에 영장(營將) 제도가 부활되었는데, 각 도에 위치한 지방군대 담당인 진영(鎭營)의 장을 영장 또는 진장(鎭將)이라고 한다. 정3품 당상관으로써 전국 8도에 46인+강화도에 5인, 합쳐서 총 51명이었으며 지방의 군비 확장 사업을 담당했다. 효종이 능 참배와 함께 열무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상께서 모든 유생들이 항상 답답하여 정사를 논할 사람이 없어 하시더니 여러 대신들을 살피던 중 오직 공만이 큰일을 책임질 만하다 하시고 마침내 군사의 일을 공에게 맡기고 도성의 보루마저 겸하여 관장토록 하시고는 때때로 혼자서 밀실에 불러 들여서 더러는 술을 권하시며 후원에서 조용히 일을 의논하시며 사관에게 명하사 이를 기록하지 말도록 하셨으며 표범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패도를 하사하시니…”

원두표의 신도비문


3. 가계


  • 5대조 원중륙(元仲稑)
    • 고조부 원팽조(元彭祖), (1473년~1542년)[2]
      • 증조부 원송수(元松壽)
        • 조부 원호(元豪)
          • 부 원유남(元裕男)
            • 부인 삭녕 최씨
              • 장남 원만석(元萬石)
                • 손자 원몽은(元夢殷)[양자]
              • 차남 원만리(元萬里)
                • 손자 원몽린(元夢麟)
                • 손자 원몽익(元夢翼)
              • 삼남 원만춘(元萬春)
                • 손자 원몽헌(元夢軒)
                • 손자 원몽은
              • 장녀
              • 사위 이민서(李敏敍)
                • 외손자 이관명(李觀命)
                • 외손자 이건명(李健命)
              • 원만동(元萬東)
              • 원만웅(元萬雄)
              • 원만령(元萬齡)
              • 원만적(元萬敵)

[1] 이로 인해서 김자점이 아들인 김정, 김식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할 때 '''원두표'''와 산당을 죽이려 했다고 실토했다.[양자] 생부는 원만춘[2] 충청도 병마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