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시 시계탑
札幌市時計台 (さっぽろしとけいだい)
삿포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시계탑은 삿포로 TV 탑과 더불어 삿포로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돈을 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안에는 삿포로의 역사와 시계의 구조,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의 동상 등이 있다.
삿포로 농학교(現 홋카이도대학)의 2대 교두[2] 였던 윌리엄 휠러(1851-1932)가 처음 계획을 세웠고 1878년에 건축되었다.
건축 당시 1층은 연구실, 강의실, 동식물과 광물 박물관 표본실로 사용되었고, 2층은 연무장으로 건설되어 무예연습장 겸 실내체육관, 입학식, 졸업식 때 사용하던 중앙강당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위치는 현재보다 북동쪽으로 약 150m 떨어져 있었으며[3] , 그 일대가 삿포로 농학교 부지였던 만큼 현재보다는 주변 모습이 많이 달랐다.[4] 개관 당시에는 종루에 정말로 종이 달려 있었으나, 시보가 정확하지 않은데다가 진동이 실험에 영향을 줄 것이 예상되어 1881년에 하워드 사에서 만든 시계를 설치했다.
1903년에 삿포로 농학교가 지금의 홋카이도대학 자리로 이전하며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고, 1906년에 삿포로구(札幌区)[5] 에서 매입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후 1911년부터 1966년까지는 도서관으로 사용되었으며, 1943~1945년에는 일본군 육군에 의해 통신대 및 인사부(人事部)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패전 이후에는 시 교육회와 각종 단체가 입주하기도 했다.
1967년에 도서관이 이전하여 복원공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듬해에 2층에 역사전시실을 개관했다. 1970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8년에는 시설 전체를 '삿포로 역사관'으로 개장한다. 1995년에는 다시 대규모 복원공사가 이루어졌으며, 1998년에 1층 자료전시실, 2층 홀을 갖춘 현재 모습의 '삿포로시 시계탑'으로 개관했다.
JR 삿포로역에서 도보 10분, 지하철 오도리역에서 도보 3분 걸린다.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와 오도리공원, 삿포로 TV 탑이 매우 가까이 있기 때문에 관광코스를 짤 때 연계하면 좋다.
1. 개요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에 위치한 건축물로,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정식 명칭은 '''구 삿포로농학교 연무장(旧札幌農学校演武場)'''이며, 현재는 '''삿포로시 시계탑'''(札幌市時計台, さっぽろしとけいだい), 혹은 줄여서 시계탑(時計台)[1] 이라고 불린다.'''우리는 시계탑 종소리가 울리는 삿포로의 시민입니다.'''
わたしたちは、時計台の鐘がなる札幌の市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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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시민 헌장 中
삿포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시계탑은 삿포로 TV 탑과 더불어 삿포로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돈을 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안에는 삿포로의 역사와 시계의 구조,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의 동상 등이 있다.
2. 역사
삿포로 농학교(現 홋카이도대학)의 2대 교두[2] 였던 윌리엄 휠러(1851-1932)가 처음 계획을 세웠고 1878년에 건축되었다.
건축 당시 1층은 연구실, 강의실, 동식물과 광물 박물관 표본실로 사용되었고, 2층은 연무장으로 건설되어 무예연습장 겸 실내체육관, 입학식, 졸업식 때 사용하던 중앙강당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위치는 현재보다 북동쪽으로 약 150m 떨어져 있었으며[3] , 그 일대가 삿포로 농학교 부지였던 만큼 현재보다는 주변 모습이 많이 달랐다.[4] 개관 당시에는 종루에 정말로 종이 달려 있었으나, 시보가 정확하지 않은데다가 진동이 실험에 영향을 줄 것이 예상되어 1881년에 하워드 사에서 만든 시계를 설치했다.
1903년에 삿포로 농학교가 지금의 홋카이도대학 자리로 이전하며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고, 1906년에 삿포로구(札幌区)[5] 에서 매입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후 1911년부터 1966년까지는 도서관으로 사용되었으며, 1943~1945년에는 일본군 육군에 의해 통신대 및 인사부(人事部)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패전 이후에는 시 교육회와 각종 단체가 입주하기도 했다.
1967년에 도서관이 이전하여 복원공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듬해에 2층에 역사전시실을 개관했다. 1970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8년에는 시설 전체를 '삿포로 역사관'으로 개장한다. 1995년에는 다시 대규모 복원공사가 이루어졌으며, 1998년에 1층 자료전시실, 2층 홀을 갖춘 현재 모습의 '삿포로시 시계탑'으로 개관했다.
3. 여담
- 사실 막상 들어가봐도 별 거 없어서 명성에 비해 막상 가면 실망을 한다는 '실망이 큰 일본 3대 명소'라는 별명이 있다.[6] 일례로, 삿포로가 배경인 기어와라! 냐루코양에서는 은하 3대 실망 명소라고까지 말하기도... 그리고 삿포로라는 계획도시가 생긴 당시에 비해 요즘엔 높은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으므로, 현재에는 주위가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실제로 보면 작다는 느낌도 들기 때문. 다만, 그런 모습을 보고 삿포로 시가지의 변천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좋다는 사람도 있다. 삿포로역에서 걸어서 10분 이내에 있는 곳이라서, 실망을 하더라도 시간 낭비는 되지 않을 듯.
- 건축 초기에는 지금처럼 큰 시계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종루에 종(鐘)이 매달려 있어, 이를 밧줄로 당겨 종을 울리는 구조였다. 당연히 시계의 정확성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당시 개척사(開拓使) 장관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가 1881년 6월에 탑부분을 신축하고 미국에서 가져온 시계를 설치했지만, 전기식이 아니라서 일주일에 두번 추를 감아 당겨야 했다. 추의 무게가 각각 50kg과 150kg이나 되는 데다 기계에 부담이 가해지지 않도록 2시간 정도 걸어 천천히 감아야 해서 상당한 관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 사실 중요문화재로 등록된 정식 명칭은 구 삿포로농학교 연무장(旧札幌農学校演武場)이다. 즉, 옛 학생들의 연무나 입학식, 졸업식 등 때 사용하던 중앙강당 역할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젠 홋카이도대학 재학생이라도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다.(...)
- 골든 카무이에서도 등장한다. 골든 카무이/무대탐방 참조.
4. 외관
5. 시설 안내
- 1층에는 매표소, 매점, 시계 및 농학교 관련 전시실 등이 있다. 화장실은 건물 밖에 위치한다.
- 2층은 분위기가 마치 교회같지만 1880년대 당시의 강당을 재현한 것이다.
- 시계는 전기동력이 아닌 추의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 일주일에 2번씩 추를 사람의 힘으로 감아올리고 있다.
- 또한 시계는 와이어, 로프, 나사 등의 소모품 교환을 제외하면 1881년 당시의 것 그대로이다. 다만 현재 2층에 전시되어 있는 시계장치는 하워드 사에서 192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계탑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 현재도 종소리는 매시간 정각에 울리고 있으나 주변이 고층 빌딩으로 되어 있는 업무지구이기 때문에 멀리서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밤에도 종소리를 울릴 수 있다고 한다.
- 현재 건물 외벽은 흰색, 지붕은 붉은색이나, 건설 당시에는 벽이 회색이었으며 연두색 혹은 초록색인 적도 있었다. 지붕 색상은 불명.
- 폐관 이후 21시까지는 2층 홀을 빌려서 음악회나 결혼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신청자는 삿포로 혹은 근교에 사는 사람만 가능.
5.1. 시간과 요금
- 개관 시간: 08:45~17:10 (마지막 입장 17:00) ; 1/1~1/3은 휴관한다.
- 입장료: 성인 200엔, 그 이하는 무료이다. 20인 이상 단체는 180엔.
6. 찾아가는 길
JR 삿포로역에서 도보 10분, 지하철 오도리역에서 도보 3분 걸린다.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와 오도리공원, 삿포로 TV 탑이 매우 가까이 있기 때문에 관광코스를 짤 때 연계하면 좋다.
[1]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시계대(台)이겠지만 한국어에 없는 단어이므로 본문은 시계탑(塔)으로 작성되었다.[2] 참고로 1대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정작 설계한건 윌리엄 휠러인데 삿포로 시계탑 내부에는 클라크 동상밖에 없다(...)[3] 현재 위치도 당시 농학교 부지 남서쪽 끄트머리에 해당한다.[4] 지금은 키타1죠 니시2초메(北1条西2丁目)의 1/4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예전에는 홋카이도 구도청과 맞먹는 4블록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1891년 삿포로 지도(일본어 위키백과)에서 北1条西1丁目 + 北1条西2丁目 + 北2条西1丁目 + 北2条西2丁目를 합친 면적.[5] 1899년부터 홋카이도는 구제(区制)와 1・2급정촌제(一・二級町村制)가 시행되어 일본 본토와는 상이한 행정구역 체계를 갖게 되었다. 인구가 많은 특별행정구역인 구(区)는 삿포로, 하코다테, 오타루, 아사히카와, 무로란, 쿠시로 등 6개가 있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정과 촌으로 구분되었다. 구제(区制)는 1922년에 실질적으로 폐지되어 전부 시(市)로 바뀌었다.[6] 나머지는 고치시의 하리마야바시(播磨屋橋)와 나가사키시의 오란다자카(オランダ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