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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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が(さき('''
나가사키시 / Nagasaki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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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市旗)'''
'''문장(紋章)'''

'''기본 정보'''
'''국가'''
일본
'''지방'''
큐슈
'''도도부현'''
나가사키현
'''면적'''
405.86km²
'''인구'''
406,685명[1]
'''시장(市長)'''
타우에 토미히사(田上富久)
'''시의회
(40석)'''

18석

6석

6석

3석

2석

1석

4석
'''상징'''
'''시화'''
수국(アジサイ)
'''시목'''
오구나무(ナンキンハゼ)
'''시조'''
비둘기 (ハト)

1. 개요
2. 인구 추이
3. 관광
4. 교통
4.1. 도로 교통
4.2. 철도 교통
5. 문화
6. 지리
7. 원자폭탄 피폭
8. 시장 총격 사건
9. 자매결연도시
10. 매체에서의 등장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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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사키현의 현청소재지. 입지조건 덕에 예부터 항만도시로 먹고 살아온 곳으로 보통 후쿠오카시의 보조항적인 성격이 강했다. 유서깊은 무역항이다보니 항만의 발달과 더불어 미쓰비시 중공업을 위시한 조선업, 방위산업 등이 발달하여 근현대에 이르렀는데 그 탓에 후술되는 미국의 핵공격을 부르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저 미쓰비시조선소는 2020년 5월 기준으로도 멀쩡히 운영 중이다.
'''남녀 성비가 85.1이다.''' 이는 여자 100명에 남자가 85명의 비율이라는 소리로, 일본 전국 현청소재지 중에서 가장 여초지역이라는 통계가 있다.
또한 부산의 과거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지형과 도시 모양을 갖고 있어 부산사람이라면 특히 친숙한 지역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산광역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이전에는 부산-나가사키간 항로도 있었지만 지금은 끊긴 상태이다. 특히 주거 지역들을 보면 재개발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부산 달동네들과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일본에서 서양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으로, KOEI의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 일본 지역에서 단골로 나오는 항구이다. 대항해시대 2 때는 한문만 보고 "장기항"이라고 부른 유저가 많았다. 한글판에서는 '나카사키항'이라고 제대로 나오긴 한다. 태합입지전 5에서는 히라도 마을에 대항해시대 4 캐릭터인 릴 알고트가 등장하기도.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서양과의 교류가 잦아 근세포르투갈, 스페인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활동하였고, 덕분에 주로 탄압의 대상이였던 일본 가톨릭의 성지가 되었다. 큐슈의 경우 다이묘들도 가톨릭 신자였을 정도. 나가사키는 일본에 3곳 있는 대교구 중 1곳으로[2] 평균 가톨릭 신자 비율이 1%가 안되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 비율이 무려 '''4.5%'''로 가장 높은 곳이다. 신교인 개신교도의 비율은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3] 물론 일본에서는 신도가 아니면 기독교의 종파를 딱히 구분해서 보지는 않는다. 부속 도서 지역의 경우도 예외. 나가사키 본토나 본토에 거의 붙어 있는 섬 일부가 아니면 역시 다른 지역과 큰 차이가 없다.
가톨릭 성지도 많아 나가사키역 근처 니시자카 언덕에 있는 일본 26위 성인 순교성지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초 탄압 때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총 26명이 순교한 곳. 당사자들은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곳에서 죽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쿠레키리시탄이 드러난 계기가 된 오우라 천주당, 메이지 유신 후 지어졌지만 원자폭탄 투하로 피해를 입었던 우라카미 대성당 등이 있다. 이곳들은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가사키 현 동쪽에 위치한 운젠 시내 소재의 '운젠 지옥[4]'이라고 불리는 유황온천 지대에서도 신자들에 대한 고문과 처형[5]이 이루어져,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을 기리는 운젠 지옥 순교지 기념비가 있다.
해당 지역의 풍습에 대한 것이 실제 나가사키시 고토지마를 배경으로 하는 바라카몬에서 자세히 나오는데, 성묘를 하는 시점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던가, 묘의 글씨 색깔이 노란색이라는 것 등은 해당 지역의 특징이라고 한다.

2. 인구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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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시 인구추이'''
[1995-2020年]
[ 펼치기 · 접기 ]
1995년
487,088명
1997년 4월 1일, 중핵시로 이행
2000년
470,000명
2005년 1월 4일, 주변 6개 편입[16]
2005년
455,024명
2006년 1월 4일, 긴카이정 편입
2010년
443,689명
2015년
429,636명
2020년
406,685명

  • 편입으로 인한 인구 증가를 반영한 통계이다.[6]
  • 1995년~2015년 인구는 12월 31일 기준이다.
  • 2020년 인구는 9월 1일 기준이다.

3. 관광


나가사키의 자랑거리는 뭐니뭐니해도 먹을거리다. 쿠로시오 해류가 들어오는 길목이다보니 해산물의 질이 상당히 좋으며, 예로부터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있던 곳이라 하얀 국물로 유명한 나가사키 짬뽕이랑 번안된 중국식 요리인 싯포쿠 요리가 유명하다. 여기로 여행을 온다면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식사뿐만 아니라 디저트로도 매우 유명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들고온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빵을 현지화(서양에는 없는 물엿이 비결이라고)한 카스테라의 산지로도 유명. 나가사키 카스테라는 현지에서는 2천 엔을 넘기도 하는 가격을 자랑하는데 오리지널 카스테라는 대체로 1천 엔대이고, 작은 것은 400엔대에 살 수 있다. 국내 제과점의 기본 카스테라가 1천~2천 원이니 가격차가 크기는 하다만 맛을보면 그 값을 한다. 나가사키 카스테라빵 바닥에 자라메(ざらめ)라는 굵기가 별사탕만 한 각진 설탕을 깔아 굽는데, 카스테라와 같이 먹으면 그것이 씹혀 매우 맛있다. 오리지날 나가사키 카스테라의 특징으로 손꼽히는 중요요소. 단 모든 나가사키 카스테라가 자라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후쿠사야, 분메이도의 카스테라만이 자라메를 사용한다. 이 자라메를 따로 팔기도 하니 자라메만 사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일본에서 카스테라를 사서 한국에 가져올 경우 여름철엔 자라메가 녹을 수도 있다.[7] 식감이 떨어지는것도 문제지만 부패의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으니 빨리 먹도록 하자. 나가사키 카스테라 브랜드 중 유명한 곳은 분메이도(文明堂), 쇼오켄(松翁軒), 후쿠사야(福砂屋)(박쥐 모양 마크를 사용)가 있다. 이 세 곳은 전국 레벨로 유명한 곳이며, 나가사키 현지만 보면 그 외에도 10여군데 넘는 전문 브랜드들이 있다.
일본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에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교역상인들이 머무르면서 일본인들과 교역하는 지역이었던 데지마(出島)가 역사유적지로서 유명하다. 원래는 바다를 메워서 만든 인공섬이었는데, 현대에는 시가지를 확장하면서 육지에 편입되어 인공섬의 모습은 사라졌다. 또한 그 근처에는 외국인들이 모여 살던 주택가 언덕인 오란다자카(オランダ坂;직역하면 네덜란드 언덕)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현 북서쪽 외곽에는 네덜란드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인 하우스 텐 보스가 있다. 이곳의 치즈 박물관과 테디베어 박물관은 꽤 재미있다. 정작 나가사키에서 가기에는 나가사키 본선 + 사세보선의 안습한 철도환경 탓에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으니 직통 특급열차인 하우스텐보스를 꽂아주는 후쿠오카에서 출발하는 것을 권장한다.
이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가사키는 네덜란드인이 도쿄 및 수도권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기도 하다. 나가사키 관광 중 서양인을 마주쳤다면 높은 확률로 네덜란드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외에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중공업화에 기여한 토마스 앨버트 글로버 등의 외국인 기술고문들의 공관들을 공원화한 구라바엔(글로버 가든;Glover Garden)이 볼만하다. 문제는 일본의 공업화, 제국주의화에 대한 것과 군함도에 대한 내용들이 공관 곳곳에 쓰여 있어 전시물들을 잘 읽어보면 기분이 나빠진다.
비교할 만한 도시로는 반대쪽 홋카이도하코다테시가 있다. 둘 다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은 항구도시의 위치에 있다보니 서양식의 건물과 교회 등의 종교 시설이 많이 발견된다는 공통점이 있고, 공교롭게도 두 도시 다 야경으로 유명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서 야경을 감상하는 코스가 있다. 실제로 나가사키 여행 중 오란다자카를 걷는데, "지금 내가 하코다테에 와 있는건가" 하고 착각하거나 하코다테에 가서 "여기 나가사키 아닌가"할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했다는 감상도 있다. 이나사야마(稲佐山)의 전망대[8]가 세계 3대 야경이라고 자랑하고는 있지만, 비록 아름다움이란 것이 주관적이라곤 해도, 세계는커녕 일본에서도 3대라고 불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은은한 느낌으로 야경 역시 위에 언급된 부산과 비슷하다.
원폭 피폭지역인 마츠야마마치역을 중심으로 한 나가사키 원폭추모공원(평화 공원)과 박물관도 한번 가 볼 만하다. 평화공원에서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보면 우라카미 천주당이 있다. 구라바엔 아래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보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롯한 조형미가 훨씬 좋고 입장료가 무료이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나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명소이지만 이곳에서 볼 것은 그런 게 아니라, 원폭을 맞고 망가진 성모상과 기타 성상들이다. 한편 천주당 입구쪽 2층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데, 매번 다른 성가를 사제들이 직접 연주한다. 성가의 중후한 분위기를 느껴보도록 하자. 단, 한여름에도 냉방기구는 틀어주지 않으니 주의할 것.
만약 펭귄을 좋아한다면 나가사키 펭귄 수족관을 들르는 것도 좋다. 다만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나가사키역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이렇게 도쿄나 오사카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유명한 관광지다 보니 외국인들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인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는 지리상으로 부산광역시와 가깝기 때문에 선박을 이용해서 가는 경우도 있고 비행기로 1시간 20분만 이동해도 도착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인 입장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관광지로 큐슈 쪽 자유여행을 간다하면 대개 여기를 가는 경우가 많다.
산지가 많은 나가사키시의 특성상 비탈길이 많은데, 이를 위해 나가사키시 사면이송시스템이 3곳 개통되어 있다. 2010년대 들어 국내에도 이런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영주동 오름길 모노레일이 있다.

4. 교통



4.1. 도로 교통


고속도로로 나가사키자동차도가 지나며, 34번, 202번 국도, 206번 국도, 251번 국도, 324번 국도, 499번 국도이 지난다.
고속도로 나들목으로는 나가사키타라미IC, 나가사키스스키즈카IC, 나가사키IC가 있으며, 나가사키 바이패스와 나가사키 데지마도로 등의 고속화도로도 있다.
나가사키시에 본사를 둔 버스 회사로는 나가사키현 교통국나가사키 자동차(통칭 나가사키 버스)가 있다.

4.2. 철도 교통


일단 광역교통은 나가사키 본선 외에는 정말 안습한 편이다. 그나마 나가사키 - 후쿠오카간 특급열차 카모메의 다이어 개량으로 1시간 50분 ~ 2시간 선으로 후쿠오카까지 갈 수 있게 된건 다행. 후쿠오카 - 나가사키 왕복만 할거라면 철도를 이용해도 무방하지만, 하우스텐보스, 운젠 등 현내 주요 관광지의 철도 접근성이 큐슈 내에서도 영 좋지 않은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라, SUNQ 패스와 렌터카에 탈탈 털리고 있다.
시내 교통수단으로는 노면전차(나가사키 전기궤도)가 대표적인데, 일본에서 제일 요금이 싸다. 1984년부터 거리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100엔을 받았으나, 2009년 120엔으로, 2019년 4월 1일부터 어른 130엔, 아동 70엔으로 인상되었다. 1호선과 5호선간의 환승 시에는, 신치중화가(신치추카가이, 新地中華街)에서 전차 운전기사에게 말하면 무료환승권을 준다. 1일권도 있으니 전차를 여러 번 탈 때는 이용하자.
나가사키 전차는 차량이 다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인근 후쿠오카는 물론, 도쿄, 센다이 등 일본의 주요 대도시에서 노면전차를 폐선시킬 때 오갈데가 없어진 차량을 죄다 긁어모았기 때문. 심지어는 '''1911년(메이지 44년)산 전차''' (160형 전차)도 현역으로 차적에 등록되어 있다. 이렇게 낡은 차량은 통상적인 영업운전을 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날에만 이벤트로 영업운전에 투입된다고 한다. 곧 노면전차의 날인 6월 10일(6을 '로', 10을 영어로 '텐'으로 읽어 로텐=노면전차에서 '노'와 '전'만 음독해서 로텐), 철도의 날(1872년 신바시-요코하마간 일본 최초 철도 개통을 기념)인 10월 14일, 나가사키 노면전차 개업기념일(1915년 개업)인 11월 16일이다. 그리고 낡은 차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냉난방 시설 등 개조가 잘 되어 있어서 이용하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9] 신형으로는 2003년에 제작,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1편성씩 도입된 3000형과 2011, 2012년에 1편성씩 도입된 5000형 전차가 있으며 3000형과 5000형은 모두 저상전차이다.
철도로는 나가사키 본선이 지나며, 나가사키 신칸센이 건설중이다. 나가사키현의 답없는 광역교통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나 싶었는데 신칸센 개통으로 인한 빨대 효과를 우려한 사가현의 반대여론이 극심해 건설이 지지부진하다.

5. 문화


2016 리우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출신의 최규백이 소속된 J리그V-바렌 나가사키가 이 지역 연고 프로구단이다. 2019시즌에는 2014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종호와 U-23의 대표 이상민(1998)이 임대를 와있다. 1985년에 큐슈 지역리그 팀 아리아케 SC에서 출발하여 2005년 쿠니미 팀과 통합하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10]
2012년 시즌에 JFL에서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J리그(2부리그인 J2리그)에 진입하였으며, 이후 6위(2013)-14위(2014)-6위(2015)-14위(2016)로 순위를 오르내린 끝에 2017년 시즌에 J2리그 2위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1부리그를 밟게 되었다.[11]
2017년에는 대형 인터넷 쇼핑몰 기업인 자파넷이 주주로 들어와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2023년을 목표로 축구전용구장까지 신축하게 되었으니 나가사키 축구팬들에게는 잊지못할 한 해가 되었을 듯.
위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 순간 새로이 클럽 역사를 써나가는 젊은 팀이며, 경기장 신축 진행과 평균 관중이 두배로 펄쩍 뛴 2018년 시즌에 J1리그를 잔류하느냐 여부가 팀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할 것이다.

6. 지리


나가사키 반도와 니시소노기 군 반도를 시역으로 한다. 이사하야시, 사이카이시, 토기츠초, 나가요초 와 인접해있다.

7. 원자폭탄 피폭


나가사키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도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피폭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흘 전 '''히로시마시에 투하된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폭탄이 떨어졌다.''' 자세한 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참조. 하지만 묘하게 히로시마시에 비해 이쪽으로는 이미지가 좀 약하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편. 피해 인구가 하술하듯 히로시마의 절반이었고 원폭에 맞은 사람 중 생존자가 하나도 없어서 (즉, 피폭 생존자 수가 적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 히로시마시의 15Kt급 리틀 보이보다 더 강력한 22Kt급 팻 맨이 투하되었는데도, 히로시마의 사망자 추산 14만 명의 절반인 7만 정도가 사망했다. 그 이유는 나가사키 자체가 히로시마에 비해 산지가 많은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천후에 의한 시계 악화로 인해 사수가 시가지가 보이는 즉시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게 우연히도 거의 분지에 가까운 산에 둘러싸인 곳에 떨어져, 폭발 후 열선과 후폭풍이 산을 넘지 않아 폭심지 근처로 피해가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과 달리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역내 인구는 히로시마가 34만명, 나가사키가 25만명 남짓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1순위 후보였던 코쿠라(시계 악화로 핵투발에 실패)가 17만인데다가 반경 10km 내에 모지(14만 명), 야하타(26만 명), 토바타와 와카마츠(각 8만 명), 시모노세키(20만 명) 등 대도시가 몰려 있어 수십만의 희생이 예정되었다가 모면한 셈이다.
  • 원래 나가사키는 폭탄 투하 후보 중 3순위였다. 그리고 나가사키 폭탄투하 당일, 팻맨을 실은 폭격기가 원래 목표로 한 곳은 발전소 등이 있는 후쿠오카현 코쿠라시(현재의 키타큐슈시 코쿠라키타구, 코쿠라미나미구). 그러나 작전 당일 큐슈 전체가 날씨가 좋지 않아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초계기와 정보수집기의 삽질로 투하 지점, 그러니까 코쿠라시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하면서 폭격기는 어쩔 수 없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투하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보고 작전 시간에 맞추어 코쿠라시 상공으로 진입했다. 문제는 아무리 일본군이 개막장 바보집단이라도, 이미 원폭을 한 차례 맞은 상황이라 대공 방어에 필사적이었던 것. 물론 일본군의 구식 전투기나 고사포 등으로 미군 폭격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해가 없이도 육안이라 힘든 판에, 야하타 제철소[12]에서 핵 폭격의 조짐을 눈치채고 고로의 연소를 불완전연소로 바꾸어서 시야 확보가 더 힘들어졌다. 어쨌든 폭격기는 계속해서 일본군이 추격해오는 통에 투하 위치를 잡지 못하고 추격 회피 비행만을 1시간여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1시간여 경과. 결국 미군 측은 폭격기의 연료가 다 떨어져간다는 보고를 받고, 어쩔 수 없이 귀환하는 길목에 있던 제3후보지였던 나가사키에 그냥 떨구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몇초간 하늘이 개이자 연료 부족으로 똥줄태우던 폭격기는 옳다꾸나 하고 핵폭탄을 거기다 떨구고 갔다. 이게 불과 투하 1시간 전의 이야기니, 즉 이 1시간 사이에 나가사키와 코쿠라의 운명이 바뀌어 버린 셈이다. 사실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하러 가던 조종사들은 천주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기지에 있던 군종신부 조지 자벨카의 축복을 받고 출격했다.[13]
  • 나가사키 폭격에 대해 미국일본극우는 의외로 같은 소리를 한다. 당시 원래 폭격 목표였던 코쿠라 시의 경우 히로시마와 동일한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예정대로 코쿠라 시가 피폭당했을 경우 피해가 1차 피폭지였던 히로시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 피폭 당일은 당시 가톨릭 전례력으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리는 성모승천대축일[14]이었고, 일본 가톨릭 교회에는 이 날에 판공성사를 보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라운드 제로(원폭 투하지점)에서 어과 7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라카미 대성당[15]에서 미사&판공성사를 준비하던 2명의 사제와 24명의 신자가 즉사했고, 8천 명의 신자들도 이후 피폭에 따라 전원 사망하였다. 성당은 당연히 전소되었고 그 열화 속에서 성모상이 다른 부분은 타서 없어지고 머리 부분만 발견되었는데, 후에 재건된 성당에서 이 두상을 "원폭의 성모님"으로 모시어 전쟁의 아픔을 상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가사키에서 원폭은 '천벌', 원폭 희생자는 '속죄양'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히로시마와 다른 점이다. 나가사키 의대 교수였던 나가이 다카시의 책과 그의 자택인 뇨코지(여기당)의 기념관에 잘 나타나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오우라 성당은 국보가 되고 세계유산이 되었는데, 우라카미 성당(재건 후는 더 이상 대성당의 규모가 아니다)에서 내세울 건 위의 성상들 뿐이다.
  • 연합군 포로들 중 일부가 이 때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 울버린에서 연합군 포로로 잡힌 울버린이 피폭되는 장면은 이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것.
  •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세워서 원폭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있다.
  • 참고로 송해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면서 이곳에서 온 일본인에게 "아, 그 핵 떨어진 곳?" 란 돌직구를 날려서 사람들에게 충공깽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사실, 송해는 이 사건이 터질 당시 18세였다. 하지만 실제 저 발언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8. 시장 총격 사건


히로시마도 그렇지만, 전쟁의 끔찍함을 겪은 도시다보니 전반적으로 (우리의 반전주의 인식과는 좀 다를수 있지만) 반전주의 성향이 강하다. 나가사키에서는 반전주의 성향의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기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시장 총격 사건이 두 건이나 발생하기도 했다. 재밌는게 둘 다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보수 성향의 인물들이란 거다..
1988년 12월 7일, 공산당 소속 시의원이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시장에게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상식적으로 답변하였다. 문제는 당시는 쇼와 덴노가 오늘내일 하면서 사경을 헤매이고 있었던 터라, 일본은 소위 "자숙" 모드였다. 이 일로 모토시마 시장은 극우들의 공적이 되어, 소속 자민당에서 제명되고, 극우 단체 차량 80여대가 몰려들어 그를 저주했다. 그러던 중 1990년 1월 18일 극우 단체 행동대원이 그를 저격하고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다. 그는 자신을 저격한 자를 용서한다고 말했으며, 그 다음 해의 선거에서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음 선거인 1995년 선거에서 모토시마 시장은 낙선하고 이후 은퇴하고 지내다가 2014년 10월 31일 92세에 별세했다.
특이한 점은 1995년에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무소속 이토 잇초(伊藤一長) 후보가 당선되었단 거다. 잇초는 출마 전에는 '방위·외교는 국가의 관할 문제'라며 평화 문제는 언급을 자제했다. 그러나 시장에 당선되면서 핵무기 철폐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평화헌법 개정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미국의 핵정책과 북한의 핵실험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07년 4월 17일, 4선에 도전하여 선거운동을 하다가 나가사키 역 부근에서 야쿠자 조직원에게 히토시 시장처럼 총격을 받았고, 다음날 과다 출혈로 숨졌다.
엄밀히 해두자면 두 사건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범행 동기도 1990년 사건이 극우의 정치적 테러였다면, 2007년 사건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차량 파손 보상 및 관급공사 개입 문제에 따른 원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범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여하간 2대에 걸쳐서 현직 시장이 연달아 총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담으로 2007년 총격 사건 당시 총격으로 이토 시장이 사망한 직후 유족들과 후원회가 투표일이 3일 이상 남았을 때에는 추가 후보 등록이 가능한 규정을 이용해 이토 시장의 사위를 후보로 내세워 추가 입후보 시켰다. 이를 두고 나가사키시 시청에서 근무하던 타우에 토미히사라는 한 직원이 가족 세습이라고 비판하며 마찬가지로 시장 선거에 추가 입후보 했는데, 선거 결과 그 직원이 이토 시장의 사위를 0.5%p 차이로 꺾고 당선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타우에 시장은 이후에도 계속 당선되어 현재 4선을 기록했다.

9. 자매결연도시


  • 네덜란드 - 미덜부르흐
  • 네덜란드 - 레이던

10. 매체에서의 등장



11. 둘러보기





[1] 추계인구 2020년 9월 1일 기준[2] 나머지는 도쿄, 오사카.[3] 애초에 일본 본토에서는 어딜 가나 개신교가 환영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썩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개신교 다수 지역인 오키나와는 다들 알다시피 일본과는 전혀 다른 문화권이라서 예외라 볼 수 없다.[4]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이라고 한다.[5] KBS 역사스페셜 2012년 3월 8일에 방송된 '임란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당했나' 편에서 운젠 지옥에서 행해진 가톨릭 신자 대상의 고문과 처형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온다. 일본에 남아있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산입(山入)'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산입이란 뜨거운 열탕이 솟는 운젠 지옥으로 신자들을 끌고 가 100도가 넘는 온천의 물로 고문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고문은 수 일에 걸쳐 자행되었는데, 3일을 버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고 한다.[6] 예를 들어, 2000년 인구는 "통합 안 된 나가사키시(423,143명)" + "주변7개정(46,857명)"으로 계산해 470,000명이다.[7] 카스테라의 특성상 냉장보관을 하면 딱딱해지기 때문에 실온보관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7월 초 기준으로 그늘진곳에 실내 보관시 4일까진 자라메가 남아있다. 다만 유통기한을 넘겨도 썩진 않는다.[8] [image][9] 관광 성수기에 나가사키역 정거장에서는 사람이 많아 타지 못하는 일이 손쉽게 벌어진다. 물론 교토 버스의 가축수송보단 사정이 훨씬 낫다.[10] 전형적인 J리그 식의 외국어 단어 짬뽕조합 네이밍인데, 데지마로 연을 맺은 두 나라의 언어 중 포르투갈어의 승리, 네덜란드어의 평화, 항해하다 라는 V로 시작하는 세 단어를 조합한 이름이라고 한다.[11] 그러나 2018시즌 한시즌만 뛰고 곧바로 강등되고만다.[12] 신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로 현재도 절찬리에 가동중에 있으며, 일부 부지는 스페이스월드라는 테마파크로 변했으나 최근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13] 조지 자벨카는 히로시마 원폭 때도 조종사들을 축복했는데, 자기가 축복한 병사들이 부순 게 대성당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 방문했지만 히로시마는 갔어도 나가사키는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안 갔다고 한다. 갔다면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14] 1950년 8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성모몽소승천 교리를 교황 무류권으로 선포하면서 전례력이 8월 15일로 달라졌다. [15] 당시 동양 최대의 성당이자 나가사키 대교구 주교좌 성당이기도 하였다. 위에도 설명했지만 나가사키는 가톨릭 신자 비율이 일본 최다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