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프랑수아 엘라자르
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장성. 보귀에 후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엘라자르는 1713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729년 1월 7일 16세의 나이로 왕실 근위 기병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1730년 11월 17일 대위로 진급하는 동시에 다르메농빌 드래곤 연대 소속 부대 지휘권을 획득했다. 이후 1732년부터 1735년까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휘하 부대를 이끌었고, 모젤에 주둔하면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736년 3월 11일, 엘라자르는 앙주 기병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42년, 엘라자르는 플랑다르 국경 일대에서 앙주 기병 연대를 지휘했고 1743년 5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라인강 전역에서 활동했다. 그 후 바이에른으로 진군했다가 7월에 군대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다. 엘라자르는 이어 쿠아뉘 원수의 지휘를 받으며 오트-알자스에서 작전을 수행해 오스트리아군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1744년 엘라자르는 쿠아뉘 원수의 지휘하에 라인강 전역에 한 번 더 복무했고, 베셈부르크 공략전, 오우게닌 전투, 프라이부르크 공략전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마일부아 백작 이브 마리 데마레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라인강 하류 방면 군대에서 겨울을 보냈다.
1745년 3월, 엘라자르는 크로넴부르크에 주둔한 군대와 함께 했고 4월 1일 마일부아 백작과 함께 이탈리아 육군 기병대를 지휘했으며, 피에몬테와 몽페라 공략전에 참가했으며, 토르토네, 발랑스 포위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9월 27일 바씨그나노 전투에 참여해 두각을 드러냈고, 이 공적으로 11월에 기병대 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엘랑자르는 1745년과 1746년 겨울을 이탈리아에서 보냈고, 6월 15일 피아첸차 전투에 참여했으며, 7월 20일 도팽 기병대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8월 10일, 엘라자르는 티돈 전투에 참여해 아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국왕 루이 15세에게 승리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747년, 엘라자르는 프로방스에서 봉무했고 2월에 그림 벨 아일 공작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가 이끄는 군단의 선봉에서 행군하여 바르를 포위한 적군을 몰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7월에 알자스로 이동해 10월까지 근무했고, 그 다음에는 프로방스의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1748년 1월, 엘라자르는 피메몽테 국경 지대에서 복무해 전쟁 끝까지 이 임무를 맡았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시기인 1756년 8월 1일, 엘라자르는 독일로 진군한 프랑스군 최고 참모로 근무했다. 1757년 5월 1일, 엘라자르는 하노버를 침공한 프랑스군의 선봉대를 이끌었고 7월 24일 10개의 척탄병 부대를 이끌고 영국-하노버-헤센 연합군의 위치를 정찰하고 그들의 위치를 확인한 뒤 적의 진영을 포격해 적이 밤중에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7월 25일, 엘라자르는 나바르 여단을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킨 뒤 하스텐벡 평야에 자리잡은 프랑수아 드 샤베르와 접점을 이루었다. 7월 26일, 엘라자르는 하스텐벡 전투에 참가해 프랑스군의 승리에 일조했고, 이후엔 뤼네부르크 영지까지 진군한 분견대를 지휘해 적을 추격했으나 곧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이 체결되어 연합군이 해산되고 하노버가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합의하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그는 연합군이 진영을 철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1757년 11월 5일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이 이끄는 프랑스 본대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에게 로스바흐 전투에서 완패한 뒤 연합군이 재결성되면서 상황이 꼬였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연합군은 하노버에서 약탈을 벌이느라 기강이 해이해진 프랑스군을 겨울에 공격해 삽시간에 하노버 전역에서 몰아냈다. 이에 엘라자르는 잔당 부대를 수습하여 닌부르크로 집결시킨 후 그곳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지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4개 대대를 파견해 그를 섬멸하려 하자 네우스타트까지 후퇴했다. 이후 엘라자르는 하노버에서 베젤로 후퇴하는 프랑스 본군의 후위대를 지휘했고 2월 15일 기병대와 드래곤 총감독관으로 승진했고,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프랑스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1757년 12월 28일 중장으로 승진한 엘라자르는 1759년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스므의 지휘를 받으며 독일 서부 방면 프랑스군에 복무했다. 그해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 우익 기병대를 지휘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했고 그의 두 아들이 중상을 입었고 한 명은 포로로 잡혔다. 1760년 1월 4일, 엘라자르는 헤르보른 마을을 점거하고 150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군 좌익 부대를 지휘했고, 라사스 백작 휘하의 군단에 배속되어 여러 독립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연합군이 버리고 간 카셀의 여러 진지를 공략했다.
1761년 4월 라인강 하류 일대의 프랑스군에 배속된 그는 7월 16일 리우드와 스히드리겐 마을을 습격했고 육군 3개 자유 여단의 지휘를 맡아 8월 19일 램즈 위쪽으로 진군하여 연합군 3천명을 격파하고 50명의 병사와 30여 대의 보급 마차들을 생포했다. 이후 9월 3일 연합군이 최근 점령한 도르슈타인을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한 그는 그해 겨울 베르흐에서 숙영하다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연합군에게 급습당했으나 격퇴했다. 이후 1762년 6월 24일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아군의 성공적인 후퇴를 이끌었고 8월 30일 나우하임 전투, 9월 21일 아뫼네부르크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휴전 협약이 성립되자 모든 프랑스군이 독일 서부에서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프랑스군의 총지휘를 맡았다.
2.4. 이후의 경력
1763년, 엘라자르는 몽메디 시의 주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1764년 1월에 콩타드 후작이 부재하는 동안 알자스 주의 지휘권을 대신 맡았고, 1777년 11월 2일 프로방스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5년간 직임을 역임하다가 1782년에 사망했다. 향년 6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