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징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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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체: 蕭勁光(소경광)
- 간체: 萧劲光
1. 개요
중국의 제독
2. 생애
1903년 1월 4일 호남성 장사에서 태어났다. 장사 장군중학을 1918년에 졸업했고 1920년에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21년에는 류사오치 등과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갔다. 1922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4년의 1차 국공합작으로 1925년에는 국민혁명군 제2군 6사단의 정치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때 계급이 이미 국민혁명군 중장이었다. 국부군 계급으로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가했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마일사변으로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국민정부를 이탈, 공산당으로 돌아와 1927년에는 소련으로 가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강서 소비에트 시절 제5차 초공작전에서 국민혁명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이후 대장정에 참여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홍군 29군 군장(군사령관)으로 참전했다. 국공내전에서는 12병단사령관 겸 정치위원, 제4야전군사령관 등을 지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창군에 참여했다. 1950년에 장아이핑에 이어서 2대 해군사령원에 올랐고 1980년까지 30년 동안이나 해군사령원으로 복무했다. 1955년에 해군 대장 계급을 받았는데 1960년대에는 계급이 폐지되고 1988년에 계급 복원이 이뤄졌을 때 최고계급을 상장으로 설정한 탓에 그는 해군사령원 가운데 유일한 해군 대장 계급자이다. 1967년 홍위병들에게 납치되어 톈진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전군문혁소조장 쉬샹첸이 격노하여 해군문혁소조에게 즉각 샤오징광을 풀어주라고 엄명한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예젠잉과 의논하여 4인방 체포를 결단하여 이를 화궈펑에게 건의하였고 마오쩌둥 사후 한달만에 4인방 세력을 신속하게 숙청할 수 있었다. 해군사령원을 예페이에게 이임한 후 1982년까지 국방부 부부장을 지냈고 79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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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 저우언라이가 칭따오기지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 칭따오는 중국 북해함대의 기항이다.
1989년 3월 29일에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샤오보잉(萧伯膺, 소백응)도 해방군 중장, 다른 아들인 샤오신화(萧新华, 소신화)도 소장까지 지냈다.
3. 매체에서
호이4에서 어이된 일인지 중화민국의 해군 참모총장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