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사변
1. 개요
1927년 5월부터 6월, 우한 국민정부에 소속된 우익 장교들이 공산당이 주도하는 폭동과 과격한 혁명활동에 불만을 품고 1차 국공합작의 중단과 공산당 숙청을 요구하면서 일으킨 일련의 군사 반란과 백색테러. 국공결렬의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간체자로는 马日事变으로 표기한다.
2. 배경
2.1. 영한결렬
1924년 국공합작 이래로 국민당 내부에는 국공합작을 옹호하는 좌파와 국공합작이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여 국민당을 내부로부터 잠식하려는 술책으로 판단한 우파의 갈등이 이어져왔다. 1925년 쑨원 사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우파들이 대거 숙청되거나 서산회의파로 분할되면서 국민당 광저우 중앙은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주도했지만 1926년 북벌 시행의 문제를 두고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빚어지던 중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의 입지는 약화되고 국민당의 지도권은 장제스가 통솔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여 북벌에 나섰고 1927년 4월에 이르러서는 우페이푸, 쑨촨팡, 장쭝창 등의 군벌들을 격퇴하고 하남, 산동까지 국민정부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전열을 정비한 공산당은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여 장제스를 군사 독재자, 기회주의적인 군인으로 비난하며 장제스의 권력 약화를 시도했고 1927년 국민정부의 수도가 우한으로 이전한 이후 갈등이 격화되었다. 우한에서 수립된 국민당 좌파의 연석회의는 장제스의 일부 직책을 폐지, 권력을 회수하였고 난징사건 이후 장제스가 열강과 협상하면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고 상하이의 규찰대를 무장해제하려 하자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을 박탈, 장제스에게 상하이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자적인 청당에 들어갔고 국민정부는 기존의 우한 국민정부와 4월 18일 난징에 수립된 난징 국민정부로 분리되었다.
2.2. 우한 국민정부 내부의 혼란
우한 국민정부는 4월 19일 독자적인 북벌을 재개, 펑위샹과 연대하여 하남성을 점령하였으나 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했다. 광동, 복건, 절강, 강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이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했기 때문에 우한 국민정부는 호북, 호남 양호 지역에서만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양호 지역은 우페이푸의 학정으로 남발된 지폐와 세금 징수 때문에 경제가 파탄이 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한 정부는 통치에 필요한 최소 자금의 10%만을 겨우 충당할 수 있었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의 90%도 공채 판매와 자본가, 지주들을 공격해 그들의 재산을 압수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공산당의 선동으로 흥분한 노동자와 농민, 점원들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경제를 마비시켰는데 중국 공산당조차도 당시의 요구가 '좀 무리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한의 혁명광기가 지나치게 심해지면서 공산당마저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고 쌀의 유통이 중단되고 파업이 이어졌다. 류사오치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경제적 손실을 이기지 못하고 폐점하거나 철수하는 상점과 기업이 늘어났고 우한 정부는 현금집중조례를 발표해 은화를 확보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민중운동을 억제함으로 혼란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금집중조례와 화폐 남발로 오히려 화폐의 가치가 폭락해 인플레이션이 덮쳤고 실업자의 수가 1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물가가 안정된 난징 정부와 비교되었다. 우한의 민심이 악화되면서 우한은 내부로부터의 소요에 직면했다. 거듭된 혼란 때문에 우한은 물론, 공산당 내부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일부는 코민테른의 1926년 결의에 따라 우한 정부가 '비자본주의' 발전을 하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부는 국민당에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 요원들도 의견 합의를 보지 못했다. 마헨드라나트 로이는 국민당을 압박하여 급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하일 보로딘은 그러한 행위가 우한 소속 장령들이 반공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 것이라고 반대했다."(노동자는) 기업을 도산시키자는 구호를 내걸고 임금을 놀랄 만한 수준으로 인상시키고, 노동시간을 일방적으로 하루 4시간 이하로 단축시켰다. 제멋대로 사람을 체포하고 법정과 감옥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기선과 기차를 검문하여 교통을 마비시키고 공장과 점포를 몰수하고 분배했다. 이런 현상은 그 무렵 지극히 흔해 빠진 일이었다. 노동조합은 최고의 정부였고 가장 큰 권력을 보유했으며, 그 힘이 때로는 정식 정부를 능가했다."
3. 전개
3.1. 장령들의 준동
혼란이 가중되자 우한 정부 휘하의 장령들이 정부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군인 가족들이 농민협회의 공격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2군, 6군, 8군, 35군, 36군의 호남 출신 군장들이 가족들의 특별 보호를 요구하며 항의하였고 호남성 집행위원회도 군심을 안정하기 위해 각급 당부 및 민중단체에 혁명군관의 장교와 병사들을 보호할 것을 지시했다.
1927년 4월 23일의 중국 국민당 토지위원회 심사위원회 회의에서 35군 군장 허젠이 토지 몰수와 광적인 노농운동에 대한 장령들의 위기의식에 관해 발언했다.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을 동요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의 명분이 대다수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혁명군인 토지 보장안건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우한 국민정부는 농민협회가 군인의 가족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군인 재산 및 토지를 박탈하는 일에 대해 용납하지 않고 이미 몰수된 토지는 보상할 것이라는 통령을 발표했다."현재 토지 몰수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안되지만, 분배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 토지 몰수 후 정부 혹은 당부에 귀속시키는 것은 반드시 분규를 야기할 것이고, 만약 농민협회에 귀속시키면 분규는 더 커진다. 병사들에 관한한 (...) 만약 병사의 토지를 모루하면 병사들이 작전을 수행할 정신을 동요시킬 수 있다. 본군의 병사 및 관장의 대부분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므로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마땅히 주의해야 한다."
3.2. 양썬과 하두인의 반란
한편 4.12 상하이 쿠데타로 절강, 강서, 강소, 복건, 광동 등 부유한 남방과 동방 지역을 모두 잃은 우한 국민정부의 경제 위기는 더욱 극심해졌다. 신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탕성즈와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일부 공산당원들은 난징 국민정부를 먼저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총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정치부장 덩옌다, 8군 정치부 주임 팽택상 등이 북벌을 주장하여 우한군은 하남성을 향한 북벌에 나섰다. 이를 위해 탕성즈 산하의 35군과 36군이 북상하고 이품선이 우한 위수사령관에 임명되어 8군을 거느려 호북에 주둔했다.
그러던 중 5월 9일, 사천성 동부에 주둔한 20군 군장 겸 사천-호북 변방사령 양썬(楊森 양썬)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우한 국민정부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다. 양썬은 의창을 점령하고 총공회와 농민협회를 해산한 다음에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 살해했다. 그리고 우한 정부를 토벌하자는 통전을 보내 자신에게 동조할 것을 촉구했다.
5월 12일[1] , 의창에 주둔하던 국민혁명군 14독립사단장 하두인(夏斗寅 샤둬인)이 양썬에게 동조하여 반공통전을 보내 반란을 일으키고 5월 17일 우한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간 공산당의 폭동에 시달리던 지주와 우익 인사들이 이들에게 적극 협력하여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한 공산당원과 농민, 노동자들을 상대로 잔혹한 백색테러를 감행하여 보복하였다. 하두인은 5월 18일 우한 인근 지방(紙坊 저팡) 지역까지 진출하여 우한을 위협했고 겁에 질린 정부 인사들이 피난을 준비했으나 중앙농민강습소 학생과 우한 군사정치학교 생도, 무장공인규찰대 및 우창 경비사령 겸 제4군 독립사단장 예팅을 파견하여 하두인의 공격을 분쇄했다.[2]
5월 25일, 우한 국민정부는 서정군을 조직하여 양썬 부대를 완전히 토벌했고 여세를 몰아 6월 24일 의창을 탈환했다. 양썬은 수로와 육로를 통해 파동 (巴東 바둥)으로 패주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더 이상 하두인의 부대를 추격하지 못하게 하면서 하두인은 호북성 동남쪽 일대에 주둔하며 공산당 숙청을 계속하였다.
3.3. 35군의 반란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5월 21일 밤, 장사에 주둔한 허젠의 막료 여상삼(余湘三)의 지휘 아래에 36군 독립 33단장 허극상(許克祥 쉬커샹), 35군 교도단 왕동원(王東原), 유수처 주임 도유(陶柳) 등이 군대를 이끌고 성공총회, 성농민협회, 국민당 장사 시당부, 호남성 당부를 급습하여 공산당원을 상대로 한 폭동과 학살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일사변이다. 허극상은 공산당원 100여명을 체포하여 총살하고 국민당 호남성당부, 성총공회, 성농민회를 장악한 다음 규찰대의 무기를 몰수하였다. 허극상, 왕동원 등은 와해된 국민당 호남성당부를 재조직하여 각계연석회의를 열고 중국 국민당 호남구당위원회를 조직하여 탕성즈, 장익붕, 허극상, 왕동원 등을 위원으로 추대하여 호남성의 당정대권을 장악했다.
이는 탕성즈의 명령을 받고 하남에서 작전 중이던 허젠이 5월 15일 호남성 연석회의에서 대지주 토지몰수 결의안이 발표되고 자신의 부모까지 농민협회에게 조리돌림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심복 여상삼에게 지시하여 호남에 잔류한 부대를 인솔하여 봉기할 것을 지시한 것이 원인이었다. 한편 허젠은 탕성즈의 호응 여부를 알 수 없으며 이 변란이 장제스의 사주를 받았거나 또는 청첸이나 탄옌카이와 결탁하여 탕성즈에 대항하는 봉기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은 5월 13일 하남성으로 북상하여 마일사변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는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마일사변은 허젠의 지시로 일어났음에도 그 주력이 원래 장사 위수부대였던 36군의 허극상의 부대였다.
5월 23일, 마일사변의 주모자들은 성정부 명의로 10개 항목의 포고를 발표하여 농민운동을 탄압하며 장제스에게 향후 행동에 관한 지시를 내려달라며 장제스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호남성주석 대리 겸 호남성 방위군의 지휘자인 장익붕(張翼鵬)을 통해 탕성즈와 국민당 중앙당부, 우한 국민정부에게도 마일사변의 불가피함에 대해 보고했다. 이에 장익붕은 국민당 중앙에 마일사변은 농공규찰대가 35군 타도를 내걸고 35군을 공격한 것에 대해 35군이 부득이하게 자위행동을 취한 것으로 보고했다. 또한 6월 20일 우한의 중앙정치위원회에 좀더 구체적으로 농민운동으로 인한 전방의 군미와 후방의 식량 수급의 대혼란, 사립은행, 합작사 등의 늑영(勒捐), 토지몰수의 무원칙성, 토호열신 타도운동의 상궤 이탈, 징세기관 및 각현 관리의 작의적 착취와 구타, 체포, 군인 가옥의 몰수와 가족에 대한 박해, 농군 조직과 주둔부대와의 상호 알력, 중앙정치부 학생대에 대한 무기 몰수와 총지휘부의 군미 구매에 대한 거부, 그에 대한 병사들의 공포가 사건의 원인이라 보고했다.
3.4. 우한 정부의 대응
부하들의 반란에 탕성즈는 허극상의 당기, 군기 문란을 격렬히 비난하고 장사 전체 군인들로 하여금 우한정부 옹호, 3대 정책 옹호, 장제스 타도를 천명하게 하면서 자신과 허극상의 반란이 무관한 것임을 강조하며 동정군을 조직하여 장제스를 토벌해야 이런 일이 없어질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의 배후인 허젠은 이를 병사들의 자위 행동으로 옹호했고 이품선을 비롯하여 사건과 무관한 장령들도 중앙이 중심을 잡고 사건을 조속히 해결해야한다고 촉구하면서도 이번 사태가 호남공농운동의 '유치병'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다만 허극상에 대해서는 "만약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엄중히 조사하여 처벌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허극상의 반란에 당황한 왕징웨이는 5월 25일 특별위원으로 담평산, 천궁보, 팽택상 등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했지만 조사단은 악주에 이르러 허극상 부대에게 쫓겨났다. 이에 왕징웨이가 주최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군대와 농민협회 양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농민협회만을 제지하면 군대가 말썽을 피울 것이니 군대와 농민협회를 모두 징계하여 '군대와 노동자의 충돌'을 '조정'할 것을 밝히고 주장하며 허극상에 대해서는 조사 후 엄격히 처벌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과격한 노농운동 역시 조사,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천두슈는 허극상을 하두인처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왕징웨이의 입장 표명에 무력토벌이 타당하지 않다고 입장을 선회하며 "모든 일은 우한 정부의 결정에 따라야 하며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 호남 농민운동의 과격한 행동과 관련이 없지 않다."라며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 과격한 노농운동에 대한 비판입장을 발표하고 담평산을 호남에 파견하여 호남의 과격한 노농운동을 제어하라고 지시했다.
호남성 임시 성위원회는 장사 부근 10여개 현에서 1만명의 농민을 무장시켜 장사를 탈환하려 했지만 중공 중앙의 평화적 해결방침이 하달되자 제대로 된 지휘를 받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허극상에게 각개격파당하고 몰살당하고 말았다. 적색테러에 피해를 입고 분노한 국민당 장교들과 부농들은 총공회와 빈민들을 상대로 가혹한 백색테러를 감행함으로 보복하였고 호남 지역에서만 1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불과 20여일 동안 공산당의 주장으로 1만명에 달하는 공산당원과 농민협회원이 살해당했고 호남의 당조직은 와해 당하기에 이르렀다.
최종적으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탕성즈의 제안을 받아들여 호남성정부의 잠정 현상태 유지, 호남성 당부 및 농민협회, 성공회의 개조, 장사, 악주 간 부대의 원대 복귀 및 36군 부군장 주란(周斕)을 호남으로 보내 모든 부대를 지휘하게 하고 봉기를 일으킨 군에 대한 조사, 군대 및 공농 무장단체의 군사행동 및 보복 금지를 최종결론으로 하였다.
하지만 호남구당위원회는 국민당 중앙의 결정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오히려 호남의 여러 중하급 군관들이 마일사변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허젠이 신임 호남성 정부주석에 추대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설상가상으로 반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제5방면군 총사령관이자 강서성 정부주석 주페이더도 반공에 동참,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들을 강서성에서 추방하고 난창에서 계엄령을 선포, 노농운동을 금지했다.
3.5. 탕성즈의 반공 조치
이 와중에도 공산당은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민테른의 5월 지시가 내려오면서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5월 지시는 코민테른 제8차 집행위원회 결의에 따른 스탈린의 지시로, 공산당이 국민당을 장악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키라는 내용 등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징웨이마저 분공을 고려하게 되었고 탕성즈 휘하의 허젠을 보내 호남성의 노농운동을 제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5월 지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국공결렬의 해당 단락 참조.
6월 13일, 정저우 점령으로 하남성 정벌을 마무리한 탕성즈가 우한에 돌아오자 국민당 중앙은 탕성즈에게 마일사변 해결의 전권을 부여했다. 이에 우한으로 피신한 호남성청원단은 탕성즈에게 허극상 토벌, 호남성당부의 원상회복, 구당위원회 해산을 요구했고 탕성즈는 이에 공감을 표시했다.
공산당은 독자적인 무장봉기를 논하기도 했으나 천두슈, 미하일 보로딘, 팽술지의 반대로 기각되었다. 6월 15일 천두슈는 코민테른에 보내는 서한을 통해 "국민당과 국민혁명군 고급 장교들과 우호관계을 유지해야 한다. (...) 만약 우리가 그들과 결별하면 우리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게 될 터이며 심지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 우리의 시급한 임무는 우선 과격한 행위를 제지하고 그 다음에 토지를 몰수하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장타이레이 등은 반발하며 무장봉기를 촉구했고 마헨드라나트 로이는 천두슈가 국민당 대리인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26일 장사에 도착한 탕성즈는 우한 중앙에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마일사변은 공농운동 지도자가 방향성을 잃어 공포상황을 노정하였고 군인들이 사태의 악화를 목도하고 신변의 압박을 받는 과정에서 행한 자결, 자위의 행위였다."고 보고하여 마일사변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호남성 구당위원회를 해산하고 그에 참여한 인사들 중 2명의 당적 및 군적 박탈과 허극상에 대한 가벼운 경고를 조치하고 36군 부군장 겸 군사청장 주란의 지휘 아래에 공산당의 회복을 주장하는 학생, 노동자를 체포하고 그 주동자들을 처형하여 완연히 반공 입장으로 돌아섰다. 또한 호남성당부 개조위원회를 구성하고 성정부위원을 조직하였다.
이후 우한으로 돌아간 탕성즈는 팽택상 등에게 장사의 상황이 예상과 달리 심각하여 많은 군관과 군관들의 가족들이 몰려와 고통을 호소하고 중공에 대한 큰 악감을 표출하여 군심의 단결을 위해서 잠시 반공 조치가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사실 탕성즈는 이렇게 반공 조치를 취하기 전부터 우한에서 혁명을 위해서 농민이 군대에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농민과 병사의 상호 이해를 강조하는 척 마일사변과 같은 상황에서 군대를 과도하게 견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탕성즈는 6월 20일 장제스 타도를 외치며 장파쿠이의 4군과 주페이더의 3군, 차이팅카이의 11군을 강서로 이동시켜 난징 공격을 준비했다.
3.6. 허젠의 정변
그러던 중 마일사변과 무관하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던 허젠이 정변을 일으켜 우한 정부에 반기를 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상술하였듯이 국민혁명군 35군 군장 허젠은 자신의 부모가 공산당의 폭동에 휘말려 조리돌림을 당했기 때문에 공산당에 큰 분노를 품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7월 3일, 허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규찰대를 무장해제하고 국민당에 양보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런비스가 반발하여 5월 지시를 공표할 것을 요구했지만 천두슈는 그 자리에서 런비스의 건의서를 찢어버렸다. 하지만 천두슈의 양보정책에도 불구하고 허젠은 6월 28일[3] 반공선언을 발표하고 왕징웨이, 탕성즈 모두에게 공산당과의 결별을 요구하며 공산당원 숙청에 나섰다. 총공회 공격을 중단하라는 왕징웨이의 지시에 허젠은 "중앙에는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키게 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가?"라며 항의했다. 허젠은 마오쩌둥에게 보복하기 위해 마오쩌둥의 부친의 묘소를 파헤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4] 류사오치, 리리싼 등 공산당원들은 공산당원들은 왕징웨이에게 총공회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미 반공 폭동에 나선 장교들은 통제불능이었다.
거듭된 우한 정부 소속 장령들의 봉기에 대해서 중국 공산당은 이를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반동 군관들의 잔혹하고 비열한 반란행위 정도로 폄하하고 있지만 마오쩌둥 평전의 저자 알렉산드르 판초프는 다음과 같이 냉정히 분석, 평가하고 있다.
4. 결과
반공 장령들의 봉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왕징웨이가 믿었던 펑위샹이 분공을 촉구하고 7월 12일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교체되어 천두슈가 실각한 후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국민정부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7월 15일 왕징웨이도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나게 되었고 우한과 난징으로 갈라진 국민정부도 합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영한합작에 불만이 많던 탕성즈는 왕징웨이, 천궁보 등 개조파와 합작하여 우한 정치분회를 조직하여 난징에 맞서며 안하무인으로 세력확장을 꾀하다가 10월에 토벌령이 선포, 리쭝런, 바이충시, 주페이더, 펑위샹, 리지선의 협공으로 복날 개맞듯 두들겨맞고 몰락하여 한때 양호와 안휘에서 장제스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떨치던 상계군벌은 몰락하여 장제스와 계계군벌의 장기말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湖南 軍閥政權의 再編 : 北伐時期(1926-27) 唐生智 政權의 정치적 성격, 김세호, 동양사학연구 86권 86호, 동양사학회.
- 南京國民政府時期 國民黨 地方黨部의 組織과 活動 : 湖南省 地方黨部의 실태 분석(1927-1937)을 중심으로, 김세호, 중국근현대사연구 31권 31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湖南에서의 國民革命과 國共分裂, 나현수,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6. 관련문서
6.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