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결렬
1. 개요
1924년 성립되었던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의 1차 국공합작이 중단되고 양당이 전쟁 상태로 돌입한 사건을 의미한다. 양당의 전쟁은 1936년 서안 사건을 통해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나서야 끝나게 된다.
2. 배경
2.1. 1924~1926
1924년 쑨원은 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의 당원들은 중국 국민당에 개인 자격으로 가입할 자격이 주어졌고 국민당은 소련과 합작하여 국민혁명을 준비했다. 하지만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민당원들은 불안해했고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고 있다[1] , 공산당이 국민당을 적화하기 위해 잠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과 불만이 제기되었다. 쑨원이 살아 있을 떄는 쑨원이 자신의 카리스마로 이를 제어하였지만 1925년 3월 쑨원이 북방으로 떠났다가 간암으로 사망하자 국민당 내부에는 이런 불만을 중재할만한 구심점이 사라지게 되었다.
1925년 8월 20일, 국공합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국민당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특별위원회를 구성, 이 사건이 후이성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의 행위로 결론짓고 외교부장 후한민을 소련으로 강제 외유를 보냈으며 군정부장 쉬충즈를 숙청하여 상하이로 보냈다. 그리고 린썬, 청년부장 겸 중산대학 총장 쩌우루를 비롯한 원로들도 국민혁명을 전파하라는 이유로 차례로 화북으로 추방하고 요직에 공산당과 좌파들을 앉혔다. 국민당 우파와 혁명원로들은 이에 반발하여 1925년 서산회의를 개최함으로 국공합작 중단을 요구했으나 광저우 중앙은 이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제명 처분을 내렸으며 국민당은 기존의 광저우 중앙과 우파들이 영도하는 상하이 중앙으로 분열되었다.
2.2. 국민당의 1차 북벌과 4.12 상하이 쿠데타
한편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와 국민당의 군사실력자로써 사실상 2인자의 자리를 누리고 있던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산당과 새로운 소련 고문 키산카는 장제스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며 도장, 반장 분위기를 조성했다.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했고 장제스는 다수의 공산당원들을 체포, 자신과 적대적인 고문인 키산카를 추방하였다.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 외유를 떠났고 장제스는 국민당의 영도자가 되어 북벌을 거행하게 되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었고 국민당은 파죽지세로 북양군벌을 물리치고 호남, 호북, 복건, 절강, 강소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자리를 노리는 탕성즈의 야망, 호락호락하지 않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한 영왕운동, 천도논쟁, 반장선전이 이어지면서 장제스와 공산당 및 국민당 좌파와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공산당은 장제스가 기회주의적 군인, 신흥 군벌, 군사 독재자라고 비판하면서 장제스를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27년 우한 국민정부가 설립되자 사법부장 쉬첸을 의장으로 하는 연석회의는 장제스의 상무위원회 주석직을 폐지하고 장제스의 여러 권한을 회수했다.
거기에 우한 정부가 지방에서 과격한 혁명을 전개하고 조계지를 무력으로 회수하며 열강과 충돌을 빚자 중산층, 향신 출신 당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노골적인 우파 배척에 우징헝을 비롯하여 우한에 잔류한 우파들도 공산당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7년 3월 난징이 함락된 후 발생한 난징사건은 국민당과 열강이 무력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고 4월에 발생한 난창 폭동은 우파의 입장에서 공산당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결국 장제스는 광서파와 힘을 합쳐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를 발동함으로 청당을 실시하였고 4월 15일 광동파가 합세하여 4.15 광저우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우한 정부는 4월 17일 장제스를 제명하고 체포령을 내렸으나 장제스는 난징에서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우한과 대립했다. 하지만 양 정부 모두 서로와 바로 내전을 시작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장제스는 우한과 바로 싸우지 않고 북양군벌을 토벌하는 데에 집중하면서 북벌에 매진했다.
2.3. 펑위샹의 등장
이 즈음에 나타난 변수가 서북군벌 펑위샹이었다. 펑위샹은 1924년부터 쑨원에 대한 지지를 천명한 상태였고 소련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며 소련의 지원을 요청했다. 소련은 1925년 4월 36명의 정치 및 군사 고문을 펑위샹 군대에 파견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었을 때 펑위샹은 소련으로 외유를 떠나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으며 수개월 전에 있었던 직봉풍전쟁에서 패해 국민당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모스크바에 있던 펑위샹은 스탈린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하며 소련을 위해 일본군을 동북 3성에서 몰아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스탈린은 대포 200문, 기관총 2천정, 소총 20만정, 탄약 2억발, 전차, 장갑차 등의 장비를 펑위샹에게 제공했다. 1926년 8월 15일 모스크바를 떠나 9월 8일 중국에 귀국한[2] 펑위샹은 9월 17일 우위안 선언을 통해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선언했고 자신의 부대를 국민군을 지칭하며 전군을 국민당에 가입시키고 1927년 5월 1일 서안에서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카이펑으로 진군했다.
코민테른에서는 펑위샹을 믿을 만한 우군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조너선 펜비는 펑위샹이 인민주의 경향은 있을지언정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은 전혀 없었고 그가 소련에 접촉한 것은 그저 소련으로부터 보급품과 금전을 받길 원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펑위샹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던 보로딘은 북방으로 병력을 진군시켜 하남성에서 펑위샹과 합류, 소련과의 연락로를 확보한 다음에 장쭝창을 회유하여 난징을 포위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천두슈 등이 동조했다. 하지만 4월에 중국에 도착한 마헨드라나트 로이는 군을 남하시켜 광동을 점령하고 호북과 호남에서 농민혁명을 추진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담평산, 장궈타오가 로이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보로딘의 북진안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우한 국민정부는 난징과의 싸움 대신에 북벌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4월 말 탕성즈가 하남으로 진격했고 6월 1일 정저우에서 탕성즈 군대와 펑위샹 군대가 조우했다.
3. 전개
3.1. 중국 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
1927년 4월 27일[3] ,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우한에서 중국 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왕징웨이, 탄옌카이, 쑨커, 쉬첸 등 국민당 인사들이 공산당원들을 환영했고 지금까지 개최된 대표대회 중 가장 성대한 대회가 열렸다. 5만 7967명의 공산당원을 대표하여 80명의 대표자와 코민테른 대표단, 국제노동자 대표단, 왕징웨이를 비롯한 우한 국민정부의 20명의 외빈이 참석했다. 하지만 광저우와 상하이의 당부가 궤멸당한 상태라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강경한 토지혁명을 주장했고 취추바이는 <중국 혁명의 논쟁거리>라는 소책자를 배포하며 천두슈의 측근인 선전부장 팽술지(펑수즈)를 공격하며 천두슈를 우경 기회주의자라고 돌려서 비판했다. 차이허썬 역시 마오쩌둥의 입장을 옹호했다.
중앙국은 마오쩌둥을 기존의 농민운동위원회에서 옮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하여 당조직 서열 32위에 오르게 했으며 향후 국민혁명이 토지혁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농민정강>을 결의했지만 본질적으로 강경론을 배척하고 코민테른 제7차 확대회의의 <중국문제결의안>에 따라 '중국혁명의 특성은 소자본계급이 반드시 무산계급과 함께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민당과의 합작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확인하고 소련과 연합하여 국민당 좌파의 용공인사들을 포섭하는데 주력했다. 대회 결과에 불만을 품은 마오쩌둥은 대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파의 공격이 거세지는 와중에서도 유화정책을 주장하는 천두슈의 당내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있었다."우한에서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당은 아직 천두슈의 지배 아래에 있었지요. 장제스가 이미 반혁명을 이끌면서 상하이와 난징에서 공산당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천두슈는 여전히 우한 국민정부에 대해 계속 자제하고 양보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 나는 당의 정책에 너무 실망했어요. 특히 농민 운동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했지요. (...) 하지만 천두슈는 격렬하게 반대했어요. (...) 결과적으로 제5차 전국대표대회는 대혁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열렸는데, 적절한 토지 개혁안을 통과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토지 투쟁을 신속하게 강화시키자는 나의 의견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어요. 천두슈가 장악하고 있던 중앙위원회가 내 의견에 대한 심의를 거부했기 때문이지요. 당 대회는 지주를 "500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이들로" 규정함으로써 토지 문제를 묵살한 꼴이 되고 말았지요. 이는 계급 투쟁을 전개해 나갈 토대로서 전혀 부적절하고 비현실적이었으며, 중국 농촌 경제의 특수한 성격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이었어요."
3.2. 마일사변과 우한의 분열
한편 우한의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농촌과 도시를 휩쓰는 과격 혁명 때문에 우한 정권의 지주, 중산층 출신 장령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었고 이들은 오히려 장제스의 4.12 쿠데타에 호응하고 있었다. 우한 정부의 장교들의 가족들까지도 반동으로 몰아 조리돌리고 약탈, 살해하는 공산당의 행위에 격노한 우파 장교들은 공산당 숙청을 요구했고 양썬, 허젠, 하두인, 허극상 등이 급기야 군사반란과 백색테러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를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우한 정부 내부는 분열을 거듭했다.
우한 국민정부의 혼란상과 우익 장교들의 봉기에 대해서는 마일사변 문서 참조.
3.3. 코민테른의 새로운 지령
4.12 쿠데타의 와중에 학살된 공산주의자들의 소식은 스탈린을 궁지로 몰아 넣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통합 반대파는 이 사건을 빌미로 스탈린의 중국공산당에의 지도력이 한계에 봉착했으며, 레닌의 원칙마저 위반한 댓가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 동안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연합을 주장해온 스탈린으로써는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가시적인 성과가 시급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코민테른과 크렘린의 새로운 노선이 중국 공산당에 통보되었다. 1927년 5월 18일부터 5월 30일까지 개최된 코민테른 제8차 집행위원회 전체회의의 <중국문제결의안>을 요약한 6월 1일자의 스탈린 지시 전보, 이른바 '5월 지시'였다. 5월 지시의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이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좌파와 협력하여 2만 명의 공산당원과 5만명의 노동자, 농민을 무장시켜 8~10개 사단으로 조직해 국민혁명군에 가입시키고 우한 정부와 국민당을 재개조하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공산당이 장악하고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이 '흔들리고 타협하는' 원로들을 대체하고 혁명법정을 세워 '장제스 지지자'로 간주된 우한의 반동적인 군간부들을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지시를 낭독한 후 로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공산당원들은 이 조치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미하일 보로딘조차도 어리석은 지시라고 평가했다. 장궈타오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 스탈린의 서신이 낭독된 직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만일 국민당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민당을 맹우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천두슈는 좌절감에 고개를 젓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모든 이가 그야말로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 이 상황에서 어떻게 믿지 못할 장군들을 제거한단 말인가?"
보로딘은 이러한 전문 내용을 왕징웨이에게 알려선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로이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6월 5일 로이는 왕징웨이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보로딘이 크렘린의 긴급 전문을 보여주었는지 물었다. 왕징웨이가 그런 전문을 보지 못했다고 하자 로이는 "보로딘은 이 전보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이 이 전보의 내용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당신이 반드시 찬성할 것으로 믿는다."라며 전보의 원문과 중국어 번역본을 왕징웨이에게 건넸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이 사건을 '뜻밖의 일'이며 '이상한 일'로 평가한다. 로이가 왕징웨이에게 전문을 보여준 것은 1927년 3월, 왕징웨이가 모스크바에 방문했을 때 소련 지도부로부터 소련이 국민당에 충분한 원조를 해줄 것이며 대신에 국민당은 소련과 코민테른에 긴밀히 제휴하겠다고 약속한 것 때문에 로이가 왕징웨이를 국민당 내부의 유일한 좌파로 여겨 공산당의 국민당 장악을 도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6]"이전에 지노비예프는 부르주아지와 협조해야 한다고 말하더니 지금 스탈린은 당장 24시간 이내에 농민 혁명을 전개하라고 말하고 있다. (...) 마치 '''똥통에서 씻어 낸 것 같다.'''"
그러나 전문을 읽어본 왕징웨이는 스탈린의 속셈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독립군대를 조직하여 꼭두각시인 자신를 내세워 우한을 공산주의 정권으로 변화시키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국민당 좌파일뿐 중국공산당원으로써의 정체성까지 갖고 있진 않았던 왕징웨이는 스탈린의 지시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실행하는 순간 국민당은 끝난다고 반발했고 6월 6일 스탈린의 5월 지시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쑨원과 소련 사이의 협의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로이는 전문은 최후통첩이라고 못박았다. 결국 6월 23일, 왕징웨이는 로이의 요구에 맞서 국민혁명의 지도권은 국민당에 있다고 선포했다.
3.4. 공산당의 국민정부 탈퇴와 우한의 분공
일단 왕징웨이는 곧바로 분공을 결정하지는 않고 소련의 반응을 살폈다. 1927년 6월 중순, 왕징웨이는 소련에 1500만 루블의 차관을 요구했지만 오직 200만 루블만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소련에서 왕징웨이를 회유하기 위한 당근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왕징웨이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한 국민정부를 지원하는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만약 왕징웨이가 조건부로 5월 지시에 찬성했다는 로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련의 미적지근한 지원은 왕징웨이로 하여금 분공을 결정하게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펑위샹-왕징웨이 회담이 열려 우한 국민정부는 하남을 펑위샹에게 넘겨주고 펑위샹에게 북부의 방위를 맡긴 후 탕성즈 부대를 우한으로 철수시켰다. 장제스는 우한 정부가 양호 지방의 방비를 굳힌 다음에 광둥이나 난징을 공격할 것이라 확신하여 펑위샹과의 제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6월 12일 왕징웨이와 만나 우한과의 제휴를 약속했던 펑위샹은 6월 20일, 쉬저우에서 장제스를 만나 협력을 약속했다. 6월 21일 펑위샹은 장제스와의 합작을 선포하며 난징-우한 간의 전쟁을 반대하며 공산당과 보로딘을 비난하고 나섰고 결국 쉬저우 회담에서 장제스와 만나 우한이 아니라 난징과 손잡고 난징의 경제적 지원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펑위샹-장제스는 연명 북벌통전을 보내 영한 통일을 호소하였고 펑위샹은 우한의 북벌 협조, 공산당원 축출 등을 요구하며 반공으로 완전히 전향했다. 우한은 믿었던 펑위샹으로부터 배신당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장풍합작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의 해당 단락 참조.
그러던 중 6월 27일 탕성즈는 장제스가 산동으로 진출한 틈을 타서 난징 공격을 결정했다. 우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쑨촨팡, 장쭝창 등이 난징을 향해 남하했고 장제스는 봉천과의 휴전을 모색하는 한편, 7월 3일 왕정팅을 뤄양으로 보내 펑위샹에게 우한 정부가 난징 정부와 일치된 행동을 취하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펑위샹은 이를 수락하여 수차례 전문을 보내 다음 사항을 요구했다.
- 첫째, 보로딘은 전문을 받은 후 5일 이내에 우한을 떠나 귀국해야 하며, 기한을 넘겨 떠나지 않을 시는 구금될 것이다.
- 둘째, 공산당을 반대하는 청당운동을 즉시 선포해야 한다.
- 셋째, 정부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축출해야 한다.
- 넷째, 공산당이 조종하는 대중단체를 모두 폐쇄하도록 한다.
- 다섯째, 천두슈와 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여 억류해야 한다.
- 여섯째, 덩옌다를 해외로 보내 그의 모든 직책을 박탈해야 한다.
이러한 지령에 따라 7월 13일, 농정부장 담평산 등 중국 공산당은 우한 국민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며 우한 국민정부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했다. 이틀 후인 7월 15일, 왕징웨이는 중앙상무위원회 확대회의 석상에서 코민테른의 5월 지시를 폭로하며 분공을 정식으로 제의했고 결국 중앙상무위원회는 분공을 결정했다. 7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도 공산주의자들을 요직에서 축출하자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공산당과의 합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진 않았기 때문에 '본당의 주의와 정책에 위반한 일체의 언론, 행동을 제재한다'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으며 '제국주의자를 기쁘게 하고 정치위원회가 악명을 뒤집어 쓴다'는 이유로 분공 결의를 공개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7.15 반혁명 정변이라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국민정부에서 탈퇴하는 데 그치고 국민당에서는 탈퇴하지 말 것. 국민당의 지휘기관이 다수의 공산당원을 배제해도 내부에 머물러 있으면서 국민당의 하층 대중과 긴밀히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중앙에 단호하게 반항하는 결의안을 제출케 하며 현 국민당 지도기관의 교체를 요구할 것.
7월 23일, 새로운 코민테른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와 하인츠 노이만이 중국에 도착했다. 로미나제는 중국 공산당이 우경 기회주의적인 중대한 착오를 저질렀다고 맹비난하며 임시 당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8.7 긴급회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공산당이 왕징웨이와 우한 측에 대해 '반혁명을 원조한다'라고 비난하자 7월 26일 왕징웨이는 정책통일결의안을 채택하여 전 기관에서 공산당원을 배제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7월 27일 미하일 보로딘이 6명의 소련인과 함께 한커우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7월 28일 장제스는 보로딘이 추방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이후 우한 국민정부는 8월 5일 공산당의 단속을, 8월 8일 공산당 간부 체포령을 하달했다. 8월 13일 장제스가 하야를 선언하면서 우한과 난징은 영한합작의 단계에 돌입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와 원조를 받아 반격을 위한 폭동과 봉기에 돌입했다.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이 일어났으며 9월 9일에는 추수폭동이 일어났다. 마오쩌둥 등 강경파는 민주적 혁명정부를 설립하고 더욱 급진적인 사회정책을 전개하며 국민당의 기치를 버릴 것을 요구했지만 로미나제는 이를 군사 모험주의로 지칭하며 반대했다.
한동안 우한과 난징의 통합이 국민당 내부의 분열로 인해 공산당은 우한 국민당 당부의 명의를 사용하였지만 통합의 걸림돌이었던 장제스가 하야하고 9월 15일 국민정부가 난징에서 완전히 통합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국민당의 이름에 기대를 걸 것이 없어졌다. 1927년 9월 19일, 스탈린으로부터 국민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라는 지령이 내려졌고 9월 20일, 한커우의 소련 영사관을 통해 취추바이에게 스탈린의 지령이 전달되었다.
1927년 11월 7일부터 11월 14일까지 상하이에서 개최된 임시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취추바이는 8.7 긴급회의에서 결정된 토지혁명과 유격전 무장투쟁,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기본노선을 재확인하고 국민당 혁명위원회라는 껍데기를 탈피하여 소비에트 건설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 11월 확대회의는 좌경맹동주의가 강화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당 정체성 확립과 노동대중과의 일체성 확립이 요구되었다. "당조직의 볼셰비키화 및 무산계급과 농민군중 조직의 혁명화"가 당면과제로 인식됨에 따라 각급 당 지도기관의 철저한 개조를 임무로 설정했다. 이로써 공산당은 국민당에서 완전히 나오게 되었다.
4.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중국 인민해방군사, 국방부 전략연구소.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코민테른과 립삼체제의 형성 및 좌절, 김원규, 역사와 세계 27.
5. 관련문서
5.1. 인물
5.1.1. 국민당
5.1.2. 공산당
5.2. 사건
5.2.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5.2.2. 1차 국공내전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8.7 긴급회의(1927.8.7)
- 추수폭동(1927.9.9~1927.9.15)
- 정강산 투쟁(1927.9~1929.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