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27호'''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서울 三陽洞 金銅觀音菩薩立像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보살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68년 12월 19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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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4. 국보 제127호


1. 개요


서울 三陽洞 金銅觀音菩薩立像.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구리로 주조하여 으로 도금한 금속제 관음보살상이다.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67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양동에 위치한 절터에서 발견되었다.[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자리는 북한산 동남쪽 해발 약 200m 높이의 산기슭으로, 여기에서 본 보살상과 함께 약간의 기와도 출토 되었다고 하는데 이 절터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서 지금은 절의 본래 이름조차 알 수 없다.[2]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정보나 남아 있는 명문이 전혀 없어서 명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불상의 양식으로 미루어보아 7세기 초중엽 경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한다. 제작 시기뿐만 아니라 본 불상의 제작 국가도 또한 불명확하다. 6세기 중반기까지만 해도 서울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서로 뺏고 뺏기는 한반도 중부 지방의 중심지이자 요충지였기 때문에 주인이 계속 바뀌었고, 결국 신라의 영토로 확정났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영향력이 직간접적으로 미치던 곳인지라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제작 국가를 확정짓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로 인해 6세기 중엽인 신라 진흥왕 15년(554)에 서울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확정됐다는 점을 토대로 본 불상을 신라의 불상으로 보거나,[3] 불상 제작 양식을 통해서 백제의 것으로 보는 등[4] 참고 문헌마다 제작 국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5] 하지만 본 불상은 7세기 초중엽 경의 아주 오래된 금속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도금이 일부 벗겨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형태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보존 상태는 대단히 양호하다.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68년에 국보 제127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높이 약 20cm의 금동불상으로, 연꽃형 대좌 위에 올라선 보살이 배를 앞으로 내밀며 상체를 뒤로 젖히고는 오른손에는 법구 중 하나인 정병을 들고 있고 왼손은 V자 형으로 펴고 있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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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불상이 보살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보살인지는 불상의 몇 가지 특징적인 표현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 우선 불상의 오른손에 정병이 들려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관세음보살의 표현 특징이다. 그리고 불상의 머리에 씌여 있는 보관(寶冠)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데, 보관의 정면에는 아미타불의 화불(化佛)로 추정되는 작은 부처가 장식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 불상이 보살상이며 보살 가운데서도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6]
본 관음보살의 얼굴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살이 올라 통통해서 턱선이 없어져 있지만 이목구비는 비교적 뚜렷하며 콧날이 유달리 날카로울 정도로 높게 서 있다. 표정은 눈을 지그시 감고 옅은 미소를 띄고 있다. 귀는 아주 길게 늘어져서 턱 부근까지 내려와 있다. 관음보살의 머리카락은 뒷통수에 양갈래로 달려서 양어깨 아래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 부분은 도금이 다소 벗겨져 있다. 또한 뒷머리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본래 머리 부분에 광배가 달려 있었고 이 구멍에 광배를 끼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7]
관음보살이 입고 있는 옷 위의 여러 부분에 천이 드리워져 있는데, 크게 눈에 띄는 것으로는 배꼽 부근을 지나는 것과 무릎 위에 늘어져 있는 것이 있으며 무릎 부근에 있는 것은 깊게 U자형을 보이면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또한 배꼽 부근을 지나는 천은 끝자락이 왼팔에 걸쳐 있으며 무릎 부근의 것은 오른팔에 걸쳐 있다. 윗가슴 부근의 옷에서는 딱히 주름이 표현되어 있진 않아 매끈하지만 아래로 내려 올수록 옷에 잡힌 주름이 드러난다. 하지만 옷의 주름은 전반적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단순화된 경향의 불상 의복 표현 방식은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북제에서 수나라초에 걸쳐서 유행한 조각 양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8]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관음보살은 오른손으로 정병을 잡고 있지만 왼손은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대신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펴서 V자형의 독특한 수인을 만들고 있는데, 이 수인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혹은 원래는 이와 같이 수인을 취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왼손에 본래는 무언가를 쥐어 들고 있었지만 사라져 없어진 것일 수도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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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의 뒷편은 상당히 단순하다. 상체의 등에 걸쳐진 U자형으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제외하면, 앞면의 장식에서 이어져서 묘사된 것들 뿐이며 하체는 형체만 간략하게 만들어놓고 아예 별다른 조형을 해놓지 않았다.
관음보살이 서 있는 둥근 연꽃 대좌는 1단으로 되어 있고 대좌 위의 작은 판 위에 관음보살이 올라가 있다. 대좌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약 10개 정도의 연꽃잎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연꽃잎의 끝은 다소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보살상의 부드러운 모습과 대조되는 예리함이 드러난다고 평가된다.[10]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제작 연대나 제작 국가는 불명확하지만 불상의 도상 양식을 토대로 짐작해보면, 얼굴에 살이 올라 있고 옷은 이중의 U자형으로 늘어져 있다는 점 등으로 본 관음보살의 제작 시기를 7세기 초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11] 다만 제작 국가는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정확히 어디에서 만들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7세기 초의 서울 지역에는 이미 관음보살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출토지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고, 표현 기법 등으로 제작 시기를 삼국시대 말인 7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는 불상이라는 점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9일에 국보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4. 국보 제127호


1967년 서울시 도봉구 삼양동에서 발견된 높이 20.7㎝의 보살상으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왼쪽 옷자락이 약간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머리에는 삼각형의 관(冠)을 쓰고 있고, 양감 있는 얼굴은 원만해 보이며,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상체는 어깨가 좁아 위축된 모양이며, 배를 앞으로 내밀고 있어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 배와 무릎 근처에 이중으로 걸쳐져 있는 두꺼운 옷은 U자형으로 늘어져 있다. 치마는 두껍게 입어서 다리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며, 옷주름은 몇 가닥의 선으로 단순화시켰다. 오른손은 허리 근처에서 정병(淨甁)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V자형으로 곧게 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으며, 꽃잎은 그 끝이 뾰족하여 보살상의 부드러움과 대비된다.

이 보살상은 삼각형 모양의 관에 작은 부처 하나를 새기고 있는 점과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관음보살이 분명하며, 살찐 얼굴과 신체, U자형으로 늘어진 옷 등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관음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