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시대

 


1. 개요
2. 기간
3. 평가
4. 매체


1. 개요


魏晉南北朝時代
220∼589

중국을 통일한 한(漢) 왕조가 멸망하고, 수(隋)가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근 370년 동안 분열과 전란이 이어진 시대. 중간에 사마씨의 진나라(晉)가 잠시 중국을 통일했지만, 고작 30년에 지나지 않았고 그 사이에도 나라 안은 충분히 막장이었다. 왕망 이래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로 인한 윤리의 붕괴와 소빙기 도래에 따른 기후의 악화가 혼란의 원인으로 꼽힌다.
어떻게 보면 후한의 멸망 이후 후한을 멸망시킨 모순과 그 후유증을 370여년 동안 수습하지 못했던 시기가 바로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할 수 있다. 수문제-당태종 시기에야 후유증을 간신히 수습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여 중화제국은 새로운 이념과 체제로 나갈 수 있었고, 위진남북조 이후 중국역사에 등장한 통일 제국인 , 을 계승한 중국의 통일 제국들 사이의 간격에 위진남북조시대와 같은 기나긴 분열기는 다시는 없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 기간


위진남북조시대는 다시 다음과 같이 기간이 나뉜다.
  • 삼국시대(220-280년)
  • 서진시대(265-317년)
  • 동진/오호십육국시대(317-420년)
  • 남북조시대(420-589년)[1][2]
대략적으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연대'''
'''위진남북조'''
'''세부'''
'''육조시대'''
220-265년

삼국

265-280년

280-316년
서진

316-420년
오호십육국
동진
420-479년
남북조
북위


479-502년


502-557년
동위
서위


557-577년
북제
북주


577-581년
북주
581-589년


3. 평가


전근대적 시각에서 위진남북조 시대는 '''"어떻게 하면 망하는가, 통치자는 뭘 해선 안 되는가"''' 하는 반면교사의 향연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육조시대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강남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할 때나 문화사적 시대구분으로 주로 쓰인다. 이 시기에 주로 강남에서 중세적인 귀족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삼국시대로부터 수나라가 통일하기 전까지의 대략 400여 년간으로 여러모로 중국의 흑역사다. 지나치게 잦은 전쟁과 소빙기, 북방 유목 민족의 침략으로 예로부터 중국의 중심이었던 화북은 걸레가 되도록 털려서 인구가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 대신 강남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는 되지만, 중국의 인구는 8세기 초중반이 되어서야(당 현종) 다시 한나라 전성기 때의 숫자인 5000-6000만 명 수준으로 회복된다.
그러나 현대 사학계는 자국, 외국 할 것 없이 이 시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중국인은 예전 제국이 멸망하면 다음 제국이 들어서서 그 자리를 대신함이 자연스럽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역사 인식 경향이 있어 예전에는 이 시대를 일종의 '''흑역사'''로 취급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정통론의 도그마가 무너졌으며, 중국의 역사는 수많은 이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점이다.[3] 여기에 따르면 북중국에 이민족 국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이 시기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서양의 사학자들이 이 시대를 처음으로 주목했다. 로마 제국의 반쪽인 서로마 제국이 쇠락한 끝에 멸망하더니, 유럽이 여러 민족과 국가로 나뉘어서 몇 번의 통합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거대한 전쟁을 수차례 치르면서 오늘날 각각의 민족국가로 분리된 역사적 경험이 있어서였다.
  • 한나라로마 제국은 고대 말기에 탄생하여 '명확하게 기록된' 역사 시대의 초기를 연 제국으로서, 이전까지 단일 문화권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영역을 통합하였으며 '중화 문명권'과 '지중해 문명권'의 기반을 닦았다. 언어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영향력으로 인해, 이후 탄생한 국가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두 제국의 계승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 두 제국 모두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번영하며 사회적, 문화적 기틀을 완비하였으나, 결국 축적되는 내부 모순과 외부(이민족)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였다. 그러나, 이 붕괴는 제국의 완전한 멸망에는 이르지 않았고, 이전 시대의 심장부(수도였던 로마와 낙양/장안, 또는 보다 넓게 보아 이탈리아와 사예 지역(중원))를 상실했음에도 제국의 일부는 살아남아 제국이 이룩한 문화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달했다. 살아남은 제국의 일부는 분열 초기에는 할거 세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제국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종국에는 제국이 상실한 영역에서 성장한 세력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재통합 제국의 탄생에 성공한 중국과 달리 유럽은 결국 분리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유럽의 사학자들은 왜 중국은 이 시대를 거치고도 다시 통일되었는지 관심을 가졌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진시황의 통일 이후로 중국 대륙이 이 시대처럼 수백 년에 걸쳐 분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열기와 다르게, 수백 년간 분열한 경우는 이 위진남북조 시기뿐이었다. 유럽과 달리 중국은 이렇게 장기간 분열해 있었음에도 결국 통일을 이룬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중국의 역사, 중국인들의 국가 관념과 정신사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학자들이 위진남북조 시대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기는 장장 370년이다. 서진이 일시적으로 통일한 시기를 빼더라도 340년이고, 진한 시대의 430년에 거의 필적하며, 시대와 그 이후 들어선 통일왕조의 존속기간보다도 더 길었다. 이는 한나라가 구축한 사회 구조가 완전히 무너지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서로마의 멸망 이후 서유럽이 빠져든 혼란과 분열 상태에 비교할 만하다.
중국 역대 통일 왕조의 전통은 실질적으로 수당 시대를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관점[4]도 있다. 한나라가 중국사와 중국 통일 왕조의 전통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런 관점은 분명 극단적이지만 살펴볼 가치는 있다. 한나라의 붕괴 이후 수당의 재통일 왕조가 나타나기까지 400년에 가까운 기간은 한나라가 확립한 통일 제국의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기에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수당 왕조가 한의 유산을 일종의 청사진으로 삼았지만 그 체제 자체를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수당 이후의 통일 왕조들이[5] 전 왕조의 체제를 계승하여 정착한 것과는 분명 다른 점이다[6]
당의 멸망 이후 오대십국시대의 경우 지방 세력이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중심부에서도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처럼 혼란이 장기간 고착화되지는 않았고, 송이 통일 제국의 위치를 계승하였다. 원을 몰아내고 탄생한 명의 경우 군벌들의 난립에도 불구하고 분열기를 거치지 않고 통일 제국으로 성립하였으며, 이는 이후 만주족의 정복 이후 청으로 이어졌다. 통일 제국의 멸망 이후 장기간의 분열을 거쳐 재통합을 이룬 후 장기적인 통일 제국의 형태를 완성했던 것이다.[7]
한편 중국 사학계 역시 이 시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현대에 중국 내 소수 민족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변방사나 이민족 유입의 역사 등에 관심이 높아졌고, 그 첫 단추가 오호십육국시대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공산주의의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해 스스로를 중국 땅에 사는 여러 민족의 다민족 국가라고 공표한다. 따라서 중국사는 한족 외의 민족들의 역사도 포함되는 것이다.[8] 중국사의 이민족 왕조들은 대개 '정복 왕조'로 취급받지만 이 시대의 이민족 왕조들은 '''침투 왕조'''[9]라고 부른다. 이들의 씨족 중심적이고 분권적인 전통이 한족 왕조의 중앙 집권 제도와 융화되지 못하다가 아예 한화(漢化)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이나 중국 가릴 것 없이 이 시대에 관심이 높아졌고 연구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데다가 이 시대는 워낙 자료가 적어 어려움이 많다.

4. 매체


대체역사물에서는 종종 중국을 약하게 설정할 때, 위진남북조 시대에 다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이 지속되었다고 취급하는 일이 많다. 일례로 겁스 무한세계에서 고대 로마의 맥이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로마-1>평행계에서, 중국은 그저 세리카라 불리는 지역으로 그 안에 여러 흩어진 나라들의 집합 정도로만 나온다.
[1] 동진의 멸망은 420년. 오호십육국 시대는 북량이 439년 북위에게 멸망하면서 종결되었다.[2] 북조는 북위가 534년 서위와 동위로 분열한 뒤 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킬 때까지 40여 년간 분열을 겪었다.[3] 현대 이전 중화사상에 기반한 중국사의 정통론은 간단히 말해 <한족이 중국사의 정통>이고 <중국의 역사는 정통성을 가진 통일제국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성립된 이민족 왕조, 대표적으로 오호십육국 시대의 <침투왕조>들은 "한화되어 그 정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중국사에 흡수되었다"는 것이 중국사적 정통론의 관점이다. 반면 <호한체제>와 같은 새로운 관점은 중국의 역사와 그 정체성 자체가 수많은 이민족들과의 '''융합''' 을 통해 탄생한 것이지 어느 한쪽이 정통이라 나머지를 흡수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통일왕조가 무너지면 그 정통성을 이어받은 새로운 통일왕조가 뒤를 잇는다'는 유교적 정통론은 당대인들의 관념일 뿐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부합하는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관점이다.[4] 주로 고대 로마와의 연계에 치중하는 서구의 관점[5] 역대 중국 통일 왕조 중에서 정부 조직의 완성도가 가장 낮았다고 평가 받는 원나라를 제외하면[6] 한나라 시대의 문화적 전통이 이후의 통일 왕조들에 끼친 '''영향력'''은 분명 존재하지만, 정치사의 관점에서 권력 기구와 제도의 계승은 당나라 이후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7] 만주족청나라이이제이를 상당히 잘 활용했다.[8] 동북공정 역시 이 논리대로라면 중국 내 조선족들의 역사도 중국사이므로, 현재 중국 땅에 있었던 고구려, 발해 역시 중국 조선족의 역사로서 중국사에 들어간단 주장이다. 하지만 조선족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조선족의 기원 자체가 구한말,일제강점기 즉 근대에 만주로 강제 이동한 조선인이기 때문에 고대한국인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9] 학계에서는 한족을 지배하면서 이민족의 독자성을 유지한 , , 등의 왕조를 정복 왕조라고 부르며, 오호십육국과 북위처럼 한족을 지배하면서 독자성을 잃고 한족에 흡수된 왕조를 침투 왕조라 부른다. 그러나 침투 왕조 이론은 호한체제라는 개념에 도전을 받고 해체 국면에 들어갔다. 한국 사학계가 주장한 이론 중에 드물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이 바로 호한체제(胡漢體制, Sino-Barbarian Synthesis)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인 박한제 교수가 1988년 발간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는 중국 중세사의 바이블로 취급된다. 호한체제에 관해서도 국내에 10여 명의 박사-교수급 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다만 이 학설이 주도설의 위치는 점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