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시기'''
551년 3월 혹은 9월 ~ 553년 7월
'''장소'''
한반도 중부
'''원인'''
고구려의 남진 정책
'''교전국'''
백제·신라·가야
고구려
'''지휘관'''
백제군
<^|6>양원왕(陽原王)
그 외 미상
성왕(聖王)
그 외 미상
신라군
진흥왕(眞興王)
거칠부(居柒夫)
구진(仇珍)
비태(比台)
탐지(耽知)
비서(非西)
서력부(西力夫)
비차부(比次夫)
미진부(未珍夫)
노리부(弩里夫)
이사부[1]
야이차(也尔次)†
가야군
지휘관 미상[2]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한강 유역 16개 군 상실
'''결과'''
고구려, 남진정책 좌절. 관산성 전투 발발
'''영향'''
신라의 굴기(倔起).
1. 개요
2. 배경
3. 551년 나제동맹의 북진 - 한강 유역 탈환
4.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유
5. 백제와 신라의 격돌, 관산성 전투
6. 결과

[clearfix]

1. 개요


6세기 중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한강 유역을 최종적으로 신라가 장악하게 되는 과정'''. 짧게는 551년 ~ 553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직후에 일어난 554년의 관산성 전투는 이 판도가 확정되는 사건이다.
교과 과정에서는 이때부터 5세기 광개토대왕, 장수왕 대에 형성된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나고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2. 배경


고구려광개토대왕을 거쳐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시작했다. 여기에 큰 위협을 느낀 남쪽의 백제신라나제동맹을 결성,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공동 대응해서 강대국 고구려를 근근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475년 9월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하고 백제의 수도권이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함으로서 비로소 삼국 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백제는 크게 약화되었고 대가야에게 호남 동부를 빼앗기기까지 하는 등 내외부로 혼란기를 거쳤지만 동성왕무령왕대를 거치며 자리를 잡았고,[3] 성왕 대에는 슬슬 고구려에 반격이 가능한 국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문자명왕 말기로 계속된 나제 동맹의 압박으로 인해 점점 수세로 몰리고 있었다. 그러다 안장왕 즉위 이후 양면 외교 정책과 북위의 용성을 공격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이후 본격적으로 백제와의 전선에 집중해 다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 일시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즈음 백제는 전투를 위해 파병된 군대가 안장왕이 친정한 고구려군에 연달아 패배하고 큰 피해를 입는 등 꽤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안장왕의 승하 이후 545년 중부인의 추군파와 소부인의 세군파로 나뉘어 각각 자신 계파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려고 고구려에서 큰 내전이 일어나 또다시 국력에 타격을 입었다. 북진 직전에 일어난 548년의 독성산성 전투 때는 가야의 사주로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에 쳐들어갔지만 신라군이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고구려군은 대패를 당하는 등 나제 동맹은 굳건했다.

3. 551년 나제동맹의 북진 - 한강 유역 탈환


[image]
백제의 6군과 신라의 10군 추정 위치

28년(서기 550)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 성왕'''

백제 성왕은 550년 1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도살성(충북 제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두 달 후인 3월 고구려는 반격을 개시하여 백제의 도살성과 인근의 금현성을 침공해왔다. 고구려는 금현성을 함락했고, 이어 도살성도 함략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의 원군이 왔고 신라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군은 퇴패하여 물러났다. 고구려군 퇴각 후 신라군은 고구려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독살성과 금현성에 방어병력 1천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을 증축했다. 자연스레 이 두 성은 신라 영토에 귀속되었다. 백제 성왕은 이 두 성이 신라 영토가 된 것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서기 551년, 임금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봄 3월,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두 나라는 신라‧임라를 말한다.】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4]

(현 남양주)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 12년 백제의 성명왕이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차지하고 평양을 침'''


12년(서기 551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거칠부 열전'''

얼마 후 고구려군이 다시 금현성을 공격해왔다.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은 금현성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쫓아가 고구려 본토로 쳐들어갔다. 이에 발맞추어 백제도 현 경기도 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551년은 마침 고구려는 북방에서 유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치던 돌궐의 공격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본격적인 북진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둘로 나뉘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일본서기에서는 551년 3월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551년 9월로 나온다.
이 공격으로 백제는 한성과 남평양(현재의 남양주하남시) 일대를 점령했다. 이 전투에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가야의 병력도 참전했다고 한다.[5] 신라는 한강 상류의 충청, 강원 지역을 공격했다.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돌궐의 침공으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남쪽에서 이루어진 신라와 백제의 협공에 잇따라 패주하며 강원도 북부와 경기도 지역을 신라와 백제에 내주고 말았다. 551년 나제동맹의 북진의 결과 신라는 고구려 남동부의 10군, 백제는 6군을 획득했다. 특히 백제로서는 76년 만에 옛 도읍과 고토를 수복한 것으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러나...

4.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유


13년(서기 552년) 백제한성과 남평양(현 남양주)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新羅)의 우두방(牛頭方)·니미방(尼彌方)[6]

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


31년(서기 553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백제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삼국사기성왕 조'''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신라 진흥왕)이 백제왕(성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 조'''

551년 나제동맹의 북진의 결과 백제는 위례성을 비롯한 고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2년 후인 553년 신라의 진흥왕이 당초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그동안 진흥왕이 무력으로 한강 하류를 차지했다는 추측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일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히려 '''당시 문헌들은 백제가 스스로 한강 하류를 포기했고, 신라가 그 영토를 차지하게 된 정황을 지지'''하고 있다.
때문에 최근에는 한강 유역의 방어에 한계를 느낀 백제가 스스로 한강 하류에서 철군했고,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진흥왕의 신라군이 내려와 차지했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성왕 항목 참조)
요약하자면 신라가 멀쩡히 백제군이 주둔한 땅을 빼앗은 게 아니고 백제가 관리 능력의 부족을 느껴 스스로 포기한 것을 신라가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는 우선 문헌 상으로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먼저 버린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553년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만약 신라가 동맹을 깨고 무력으로 한강 하류를 점령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백제와 신라 간에 대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했어야 한다. 만약 실제로 전투가 발생했다면 이는 후속전이라 할 수 있는 관산성 전투보다 훨씬 중요하고 파급력이 큰 대사건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국내외 어떤한 사서에도 그 '''기록이 전무'''하다.
또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이후 백제 성왕이 어떠한 항의나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 얼마 후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 보내면서까지 신라와의 나제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던 점, 또 554년 관산성 전투 출병 당시 백제 귀족층이 출병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점 등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당시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백제는 왕실과 지방 세력 간의 심각한 대립 양상을 띄고 있는 상황이었다. 551년 나제동맹의 북진으로 백제가 일단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으나,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점령 지역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켜야 했다. 그런데 당시 백제군은 지방 귀족들에게 파견을 받아 구성되어 있었다.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개발하는 것은 왕권을 강화해 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은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고 전쟁이 끝났으니 파견해준 군대를 다시 돌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의 양측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외적으로 성왕이 철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7]
그러나 성왕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다시 굳건히 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 기록은 이후의 흐름을 봤을 때 성왕이 신라를 크게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딸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는 당시 급변하고 있던 신라 왕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염탐의 성격을 띄었을 수도 있다. 같은 시기 일본서기에서도 정월에 백제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하고 일본은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고 554년 초에도 일본이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문물을 일본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준비를 계속 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에 원군 요청하고 일본이 원군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어있지만, 백제 내부에서도 이 시기 전쟁준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백제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근구수왕, 동성왕, 무령왕 시절에도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거나 한강 유역을 수복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이후 별다른 전쟁 기록도 없이 곧 이를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군사적 진로를 개척한 후 이를 영역화하지 못하고 다시 상실하는 현상은 근초고왕대를 제외하면 의자왕 때까지 백제 시대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지방 세력들로부터 파견받아 구성되는 백제군의 편제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475년 고구려의 침공을 받았을 때 백제 귀족지원군이 신라 지원군보다 늦게 출동해 수도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왕족들이 참수당하는 비극을 겪은 사실은 바로 백제군과 신라군 편제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라 볼 수 있다.
한편 백제의 한강 유역 진출을 둘러싸고 백제 귀족층의 분열과 의견대립도 있었다. 한성 백제 시절에는 왕족인 부여씨와 왕비족인 해씨, 진씨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사택씨, 연씨, 목씨 등 충청도 토착 세력들이 지배층에 편입되어 이른바 대성팔족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백제 왕들이나 한성 기반의 해씨, 진씨 등은 북진을 해서 한성을 되찾자고 주장했지만 충청도계 귀족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번번이 북진을 반대한다. 북진을 하여 한성을 되찾으면 다시 한성으로 천도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한성 출신 귀족들의 권세가 커지고 충청도계 귀족 세력은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 수복을 둘러싼 지배층의 분열은 나중에 관산성 전투를 앞두고 다시 한번 재현된다.
이와 함께, 당시 수세에 몰린 고구려가 나제동맹의 추가적인 북진을 막기 위해 나제동맹의 한 축인 신라에게 이쪽으로 오지 말고 저 백제 쪽을 대신 노려서 더 많은 땅을 얻으라는 제안을 했고 신라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설이 있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에서 돌궐의 급습으로 신성이 포위되었고 수도 평양성이 위협받는 등 남방 전선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우선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14년조에서 백제가 목리금돈(木刕今敦)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백제와 임나(가야)를 멸하려고 한다'고 한반도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 직후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통과해 백제를 공격하기까지 하는데, 이것 또한 신라가 고구려군이 진격할 수 있도록 임시로 길을 내 주었다는 것이다. 또 황초령 순수비에 인근 국가가 사절을 보내 강역 확정을 축하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를 고구려의 사절로 본다는 것. 또한 이후 백제와 신라가 대대적으로 맞붙을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방어해야 할 군대까지 김무력이 데리고 내려가는데, 이러면 필히 원 주인이었던 고구려의 빈집털이 공격을 받을 우려가 큰데, 미리 고구려와 밀약을 맺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5. 백제와 신라의 격돌, 관산성 전투


그간 신라가 한강 하류를 무력으로 차지했다는 주 근거는 관산성 전투였다. 즉 신라가 한강 하류를 무력으로 차지한 것에 대한 백제의 보복전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관산성 전투가 일어나기까지의 정황을 보면 관산성 전투가 딱히 보복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관산성 전투는 당시 신라 조정의 급격한 정권 교체로 인한 권력 공백을 틈탄 공격'''이라 볼 수 있다.
신라는 법흥왕 사후 그의 아들인 진흥왕이 보위에 올랐지만 진흥왕은 나이가 매우 어려 지소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현명한 지소태후는 진흥왕 즉위 후 대규모 사면을 통해 민심을 얻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했는데, 특히 법흥왕대에 공석이었던 병부령(국방장관)에 명장 이사부를 임명하여 군권을 안정시켰다. 법흥왕 후기에 병부령이 공석이었던 이유는 법흥왕 본인이 후기에 왕권을 크게 강화하면서 군권을 직접 관장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 사후 어린 진흥왕이 섭정을 받는 상황에서 병부령이 된 이사부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지소태후는 이사부를 신임하면서도 이사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554년 병부령을 2명으로 늘려 이사부를 견제하기도 했다. 이미 우산국금관가야를 정벌하는 등 큰 무공을 세운 바 있었던 명장 이사부는 병부령에 임명된 후 548년 독산성 전투와 550년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 잇달아 고구려군을 격퇴하면서 그 명성을 떨쳤다. 그러던 차에 551년 성년이 된 진흥왕이 드디어 친정을 행사하게 된다. 18세의 젊은 군주 진흥왕은 아버지뻘 이상되는 노장 이사부를 이선으로 퇴진시키고 김무력 등의 젊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다.
신라 조정의 급격한 세대 교체는 백제에게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불패의 노장 이사부가 권력을 잃었고 그를 대신하여 청년 진흥왕이 밀어주고 있었던 김무력 등은 아직 젊고 관등도 아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강 유역 전역을 최종적으로 신라가 접수하면서 백제는 오랜만에 회복한 한강 유역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긴 게 억울하지도 않은지 성왕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8] 오히려 나제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이 기록은 곧 일어날 흐름을 봤을 때 성왕이 신라를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결혼 동맹 1년 후인 554년, 성왕은 갑작스럽게 일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보복군에는 대가야일본의 원군까지 합세하였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고.

6. 결과


신라는 이후에도 옛 옥저 땅이었던 함경남도 지역까지 진출하며, 백제의 견제가 약해진 틈을 타 이사부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가야를 정벌해 영남 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등 꾸준히 영역을 넓혀가며 삼국통일 이전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1] 단양 신라 적성비에 의하면 중부지방 공략 초반에만 참전이 확인된다.[2] 가야군의 한성 공격 참전은 백제 측 기록을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만 확인된다.[3] 이 즈음에 한강을 넘어 그 이북지역까지 지배했다는 뉘앙스의 기록들이 꽤 있다. 아마 체제를 재정비한 동성왕 때부터 반격을 가해 한강 유역을 회복한 듯하다.[4] 현재의 평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 일대를 일컫는 말인 남평양을 의미한다. 아차산에서 발굴된 고구려 보루들이 이 남평양을 방어하던 시설로 보는 시각도 있다.[5] 일본서기 원문에는 임나로 나오는데, 임나는 가야의 다른 이름 중 하나다. 551년 당시 가야는 이미 백제와 신라 사이에 치여서 독자성을 잃고, 백제군이 가야 땅에 주둔하면서 가야 땅을 지켜주고 대신 간섭하는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였으므로, 가야와 별로 관련없는 동네 전쟁이지만 억지로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이후 백제가 관산성 전투로 약화되면서 가야를 지켜줄 세력이 하나도 없게 되자 그로부터 10년도 안 돼 562년까지 신라에게 전부 항복하고 멸망한다.[6] 우두방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수 없으며 니미방은 현재의 동두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7] 해당 주장은 상기한 신라의 한강 하류 탈취 설의 근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내부의 분열로 인해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한강 하류의 점령과 방어를 공고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가 이 지역을 털어가는걸 눈 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8] 성왕과 진흥왕은 40살 이상의 나이차가 난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이 진흥왕보다 10살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