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갑문
1. 북한의 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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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니 황해남도 은율군 이도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갑문 중심부 뒤에 피도와 옥도가 보인다.
西海閘門 / Yellow Sea Water Barrage
1.1. 개요
북한 남포특별시 내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 황해남도와 남포특별시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1] 도로는 물론 서해갑문선철도가 부설되어있다.
갑문 내에는 3곳의 갑실이 설치되어 있으며, 각각 5천톤, 2만톤, 5만톤급의 선박이 통과 가능하다. 이 갑실은 정해진 시간에 회전교가 회전하면서 선박 통과와 차량/열차 통과를 통제한다.
건설 당시에는 남포갑문이라고 불렀으나 1986년 완공 직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정령으로 '서해갑문'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서해갑문의 부설 이후 갑문 남단의 송관리를 남포시에 편입시켰다.
원래 북한은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남포시 동전리 지역에 갑문을 건설하려 했는데, 이러면 갑문의 길이는 짧아지지만 갑문 내부에 쌓일 흙의 양을 계산해보니 도저히 감당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때려친 경험이 있었다. 현 서해갑문은 김일성이 직접 건설위치를 결정한 것이다.[2]
1.2. 역할
서해갑문의 기본 건설목적은 수자원의 확보였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서해안 지역에서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왔지만 간척지 내에 공급할 수자원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동강-청천강 사이 100km에 이르는 구간에 폭 20m가 넘는 하천이 전무했기 때문이다.[3][4] 서해갑문 건설을 통해 대동강의 담수자원을 늘려 온천, 증산, 은률, 은천 등서해안 농업지대에 공급하게 되었으며, 기존에 평양 사동지구까지 미치던 조수의 영향으로부터 강서, 강남, 천리마 등지의 농경지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늘어난 수량을 활용해 전력생산에 이바지했다.
남포항 및 대동강의 통항능력 확대도 갑문 건설로 인한 큰 성과 중 하나다. 대동강은 중상류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때문에 지속적으로 준설을 해주지 않으면 강서군 보산리 이북으로는 1천톤급 이상의 선박이 통항하기 힘들었는데, 서해갑문을 통해 전체 수량이 늘어나고 평양 미림갑문, 평남 성천갑문과 순천갑문 등과 연계하여 순천까지 1천톤급 선박이 통항할 수 있게 되었다. 육상교통이 전체적으로 부실한 북한에서 이는 상당히 의미있는 기능이다. 이와 함께 남포와 황해남도지역이 도로와 철도를 통해 연결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대동강 위에서 이 갑문과 가장 가까운 다리인 평양 충성의 다리는 무려 62km나 떨어져 있다.[5]
그리고 어찌보면 평양외곽순환선(?)이라 볼수있는 단선철도 서해갑문선이 이 갑문을 통해 대동강 이남서 이북으로 통행하고 있으므로 철교의 역할도 있다.
1.3. 문제점
더욱 자세한 건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 참조.
처음 김일성은 이 갑문을 3년여의 기간 내에 완공시키자고 했지만 1981년 착공한 갑문은 처음 계획을 3년이나 넘긴 1986년에서야 완공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북한의 심각한 재정난과 자재난이 공사기간을 엿가락처럼 늘려버린것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는 그나마도 엄청난 부실공사로 나타나 1개 건설사단이 보수를 위해 상시 대기중이라는 말도 나온다.[6]
이래저래 효과는 있었지만 갑문 일대는 그 대가로 상당한 기후 변화를 겪었다. 수자원 확보에 비하면 안개가 늘어난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쳐도, 문제는 남포항의 기능 확대와 함께 찾아온 기능 악화다. 남포앞바다는 겨울에 유빙이 떠다니는 정도였을 뿐 바다가 완전히 얼지는 않았는데, 서해갑문 건설 이후 남포항은 물 흐름의 정체로 인해 매년 80일 가량의 결빙을 겪어야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쇄빙선이 필요해졌다.
남포항이 일반항구에서 갑문항이 되면서 생긴 제약도 작지 않은 편이다. 갑문항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통과능력에 제약이 생기는데, 여기에 갑문에 육상교통로 기능이 덧붙여지면서 선박의 통과 가능 시간까지 반으로 뚝 떨어져버렸기 때문.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별도의 교량을 복층으로 건설하든가 해야겠지만 지금 북한의 능력으로는 그저 언감생심이다(...)
결국 통일이 된다면 서해갑문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면서 해체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항구 건설과 운영유지에 도가 튼 한국의 입장에서 이 항구의 기능을 강화하려고 볼 때, 제한이 큰 갑문으로 하구항의 기능을 억지로 강화시키기보다는 해안가에 거대한 외항을 건설하고 해저를 준설해 해결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7] 남포와 황해도 북부 사이의 교통은 차라리 교량으로 해결하는 것이 몇배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8]
2. 대한민국의 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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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 아라뱃길의 끝에 있는 갑문
아라서해갑문이라고도 한다. 경인 아라뱃길의 서쪽 끝에 있으며 운하를 건너는 도로기능은 없다. 한강, 남한강, 새재자전거길(사실은 이화령을 지남), 낙동강 자전거길과 이어지는 국토 종주 자전거길의 기점으로 도장을 찍어주는 곳이 있다.
[1] 광복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과 평안남도 용강군 신녕면을 잇는다.[2] 온전히 독단은 아니고 그 나름대로 전문가 집단의 지지를 받긴 했다. 다만 둑이 너무 방대해진다는 반대여론이 있었는데 김일성이 현 위치를 적극 지지해서 묵살시켰다. 코랭면 드립 나올까봐 덧붙이자면 어쨌거나 김일성 멀쩡하던 시절에는 북한도 그 나름의 회의도 하고 의견수렴도 했다. 김일성과 대비되는 김정일의 통치스타일 특징으로 괜히 '''회의 없는 독단적 결정'''을 꼽는 게 아니다.[3] 이 때문에 북한에서 '열두삼천리벌'이라 부르는 안주평야는 "쌀 한 됫박은 줘도 물 한 그릇은 못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4] 게다가 대동강 하류지역은 평야가 발달해서 비도 적게오는 소우지중 하나다. 괜히 지리시간에 대동강 하류가 소우지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5] 인구 규모가 비슷한 부산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밀양 수산대교에서 을숙도대교까지 낙동강 위에 다리가 한 개도 없는 수준이다(...)[6] 이전 버전에는 1개 사단이 실제로 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하였으나, 한국어 위키피디아를 비롯하여, 두산백과, 신동아 등 여러 언론/사전지에서 이 설을 채택하는 바 신빙성이 강한 주장으로 보인다. 다만, 학술지차원의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7] 서해안의 전통적 하구항인 군산, 목포가 모두 이런 방식을 썼다.[8] 남포항 바로 건너편은 은천군인데 현재 대한민국 법령상 국도 8호선과 51호선은 은천군 선창리에서 남포항으로 넘어가도록 지정되어 있다. 남포-은천 사이에 다리가 놓인다면 당연히 현 은천지역과 및 재령에서 은천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안악이 엄청난 수혜를 보는 반면 서해갑문을 통해 남포와 황해남도의 유일한 연결통로 역할을 하던 은률은 엄청난 쪽박을 찰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