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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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빙고(慶州 石氷庫) 보물 제66호.
1. 개요
2. 설명
3. 구조
4. 여담


1. 개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든 석조 창고.

2. 설명


기록에 의하면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일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3대 유리 이사금 때 얼음 창고를 만들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지증왕 11년(505) 때 얼음 창고를 만든 기록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일을 맡아보는 관청은 빙고전(氷庫典)이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에도 정종, 문종 때 얼음을 나누어주는 기록이 나오지만 그 얼음을 저장했을 석빙고 유구(遺構)는 지금까지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 없다. 위의 사진의 경주 석빙고는 그 위치는 신라의 왕궁이었던 경주 월성에 있긴 하지만, 경주 석빙고 자체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된 것이다. 즉 조선시대의 유적이라는 의미
이런 얼음은 왕실의 제사에 쓰이거나, 왕실과 고급 관리들의 음식이나 고기 등의 저장, 의료용 또는 식용으로 사용했다. 워낙 얼음이 귀했기 때문에 경국대전에 엄격히 규정할 만큼 얼음 배급은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장빙제도(藏氷祭度)가 있어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빙고(氷庫)라는 직제를 두어 5품 제조(提調) 이하의 많은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다. 당시 엄동설한에 깡깡 얼은 얼음을 잘라 날라서 빙고에 넣는 일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을테니까 얼음을 잘라 넣는 일은 겨울에 해야 될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경우 음양오행이 국가의 통치철학에 해당되던 시기였던지라 음기가 극심할 때 얼음을 넣어 양기가 극심할 때 더위를 이김으로서 음양의 부조화를 다스린다는 것은 심오한 의미까지 더해지는 관계로 얼음을 잘라 넣고, 이를 여름까지 잘 보관하는 일을 국가의 큰 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장빙이 시작되는 날에는 우선 하늘에 제사부터 드리고 시작하였고, 세종같은 경우 인부들에게 술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지시를 여러번 내린 것이 실록에 등장한다.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는 서울의 한강북쪽 연안에 설치되었던 얼음창고인데, 석조가 아닌 목조로 된 빙고였기 때문에 내구성이 적어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경주 석빙고(慶州 石氷庫, 보물 제66호)·안동 석빙고(安東 石氷庫, 보물 제305호)·창녕 석빙고(昌寧 石氷庫, 보물 제310호)·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보물 제323호)·달성 현풍 석빙고(達城 玄風 石氷庫, 보물 제673호)·창녕 영산 석빙고(昌寧 靈山 石氷庫, 보물 제1739호)·해주 석빙고(海州 石氷庫, 북한 국보 제69호) 등이 있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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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천장에 1~2m의 간격의 4~5개의 홍예(虹霓)라 부르는 아치를 만들고 그 사이가 움푹 들어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사이에 더운 공기가 갇히고 위쪽의 환기 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게 된다.
빗물을 막기 위해 봉토를 조성할 때 진흙과 석회로 방수층을 만들었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왕겨, 밀짚, 톱밥 등의 단열재를 채워 외부 열기를 차단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도록 했다.
빙고 외부의 봉토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로 인한 열 손실을 막고, 외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여 외기를 차단했다. 그리고 2~3곳의 환기구를 만들어 외부 공기와 통할 수 있게 하였는데 봉토 바깥까지 구조물이 나오게 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4. 여담


조선 전기에는 국가에서 관리했지만, 상업이 발전한 후기에는 '사빙고'라고 해서 민간에서 관리, 운영하는 석빙고도 많았다. 오히려 사빙고에 저장된 얼음이 몇 배나 더 많아서 조정에서는 이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 빙계라는 조직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 시절 얼음 보관량이 많았던지 어물전이나 정육점에도 얼음을 사용하였고, 빙어선이라 하여 화물칸에 얼음을 채운 냉장선까지 만들어 생선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운송하였다. 조선후기엔 서울에서만 관영빙고와 사빙고에 저장된 얼음이 3백만정(丁)~5백만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현대기준으로는 6만톤에서 10만톤의 얼음이 저장된 셈이니 그 성세가 대단했다.
석빙고와 비슷한 원리의 창고는 근대까지 존속했다. 가스나 전기로 돌아가는 냉각기술이 보급될 때까지, 이런 얼음창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냉장고를 식히는 등 다양한 용도로 썼다. 국내서는 1960년대까지 존속. 현재도 얼음창고라는 명칭으로 검색해보면 몇 가지 근대건축유적이 뜨는데, 국내에도 남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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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나마 현재까지 남아있는 얼음창고. 등록문화재 제24호. 정확한 소재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 603-1.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에서 복무한다면 한 번쯤은 보게 되는 건물. 원리는 석빙고와 같다. 겨울에 산명호의 얼음을 잘라 넣고는 오래오래 보관하는 것.
1930년대에 일본인 식당 주인이 개인사업 목적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오래되긴 했지만 콘크리트로 지어진 단층건물이고 외벽만 약간 남은 채 깡그리 박살나서 건축학적인 가치는 어느모로 봐도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이게 철거되지 않고 오히려 등록문화재로 남은 이유는 바로 민족 최대의 비극 한국전쟁 때문. 철원에는 노동당사, 수도국지 등 다수의 한국전쟁 이전 여러 건물이 폐허만 남아 문화재로 등록, 보존되어 있다. 대개의 건물은 벽이나 남기면 다행인 수준.
전쟁 이전에는 여럿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붐볐겠지만, 지금 민통선 안은 이런 폐허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싹 논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이라곤 군인, 성묘객, 농민, 민통선 내 마을 주민, 안보관광객이 고작인 썰렁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