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15호

'''16호'''

17호
경주 흥륜사지
'''경주 월성'''
경주 남고루
[image]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한글'''
경주역사유적지구[1]
'''영어'''
Gyeongju Historic Areas
'''프랑스어'''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2], (iii)[3]
'''지정번호'''
976
1. 개요
2. 명칭
3. 구조
4. 역사
5. 주요 건축
6. 발굴과 복원 논란
7. 관련 항목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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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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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月城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의 궁궐터. 사적 제16호.
성 바로 북동쪽에 동궁과 월지가 있는데 지금은 둘 사이에 원화로라는 도로가 나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궁처럼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바로 남동쪽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여기도 1974년 건설 당시, 그리고 2000년에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일부 역사학자들이 동궁과 함께 남궁#s-2(南宮)이 있었고 그 위에 박물관을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image]
동궁 부지와 합하면 약 21만 제곱미터에 달해 상당히 넓은 왕궁이었다. 게다가 2020년 기준 동궁과 월지 북동쪽에도 왕궁의 흔적이 발견되어 동궁의 범위가 훨씬 더 컸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정확한 것은 동해선 철도를 신경주역쪽 신선으로 보내고 제대로 조사해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동궁과 월지 문서 참조.

2. 명칭


멸망 후 후대에 붙여진 지명인 고려만월대와는 달리, 여기는 신라 때부터 궁궐이 있던 곳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고 했다. 혹은 반달 모양에 가깝다고 반월성이라고도 한다. 신라 당대에는 그냥 간단하게 임금이 사는 성이라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렸다고.[4] 어쨌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는 반월성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이 달 모양은 인공이 아닌 자연적 지형이다. 위 사진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언덕처럼 솟은 지형이다. 비록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언덕 위로 과거에는 궁궐 건물들이 올라가 실제 건물 규모나 월성의 높이보다 더 높아보였을 것이다.
기록상 반월성, 월성, 신월성 등 여러가지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이 모두 지금의 경주 월성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란 설도 있고, 서로 다른 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도 있다.

3. 구조


월성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름대로 초승달 내지 반달 모양 언덕 형태인데, 주변보다 높은 언덕 지역에 남쪽에는 남천이 자연해자 역할을 해서 고대에는 천혜의 요새지였을 것이다.[5] 지금은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언덕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0년대 여러 번 탐사하여 궁궐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남쪽은 남천이 자연해자 역할을 하고 나머지 동, 서, 북쪽 방면은 인공 해자성벽으로 둘러쌌으며 그 안에 많은 궁궐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확인했다.
다만 월성 해자는 전쟁이 사라진 삼국통일 이후로는 다듬은 석재를 활용해 석축해자를 조성했는데, 이는 정세가 안정되어 더 이상 방어시설 본연의 역할보다는 동궁과 월지 연못처럼 조경 기능을 가진 미관을 고려한 시설로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쓸모없어진 해자 일부는 신라 당대에 이미 고인 물이 오염되면서 메꿔 버렸다고 한다.
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있어 정북쪽의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 월성의 남쪽에 남천이 흐르므로 주작대로와 연결된 정문은 북쪽에 있다. 옛날 동아시아의 웬만한 도시들은 중국장안을 본따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6]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나 있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라[7]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 당연히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전 까마득한 고대부터 서라벌이 수도였고 자연지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중대에 들어서는 나름대로 중국의 장안을 본따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해 계획도시의 형태를 갖추었다. 전체가 정사각형 36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방은 작은 구획 16개로 나누었는데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미터 도로를 깔았다.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55리 36방으로 나누었다.
특히 전성기에는 바둑판식으로 된 구획안에 기와집들이 빽빽히 차있고, 거기다가 당시에는 1층이 아닌 2층한옥들을 서로 연결했다. 현재까지 월성의 8개 층 중에서 1개 층만 발굴했는데 건물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역사


기원후 101년(파사왕22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하였다.'''

문헌기록에서 원래 신라 건국 이래 왕궁은 금성이라는 성이었는데, 혁거세거서간이 쌓았다고 하며 이 월성과 다른 위치에 있던 성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제5대 파사 이사금 22년(101)에 월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성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위 기록을 역으로 읽으면 월성 서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성의 위치는 여러 설이 있는데 금성 문서 참조.[8]
동경잡기에는 유례 이사금 7년(290)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소지 마립간 9년(487)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이외에도 중수만 29번을 거쳤다고. 동해안으로 상륙한 왜구가 월성을 포위할 정도로 위기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전성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의 위협이 거세던 자비 마립간(475년)~소지 마립간(488년) 사이 십몇 년에 명활성에 잠깐 왕의 거처를 옮겼던 것 정도를 제외하면 신라 멸망까지 8백여 년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삼국통일 이전의 월성은 삼국사기에서 월성 주위가 1023보이며,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월성은 여러 번 수리 및 증축했는데, 특히 문무왕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사라지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궁궐을 증축했다. 현대의 조사 결과 월성-동궁과 월지-황룡사까지 이르는 넓은 영역이 통일신라 시기의 왕궁 구역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궁전이 있기 전 처음에는 초기 신라의 재상 호공의 집이 있었는데 탈해가 그 땅이 좋음을 알고 숯과 부싯돌을 몰래 묻고 나서 자신이 대장장이의 후손이며 옛날에 우리 가문이 살았던 땅이라고 호공을 속여 빼앗아 살다가 그 자리에 월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고도 한다.
현대에 들어 월성은 지표조사, 발굴조사, 월성 내부 지하레이더 탐사(GPR)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성의 동, 서,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고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남쪽은 강을 따라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해자 용도로 이용하였다. 동쪽으로는 문무왕 이후 새롭게 왕궁 구역으로 편입된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지금은 안에 있던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보물 제66호)만 남아 있다. 지금으로써는 정확한 월성의 건물 배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유구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고 아직 발굴이 안 된 부분이 많다.
1955년 경주군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자, 경주군의 잔여지역을 이 월성의 이름을 따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였다.[9] '월성 원자력 발전소'라는 이름 등에서 아직까지 월성군 명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1989년 다시 경주군으로 명칭을 환원하였고 1995년 도농통합제 실시로 경주군이 경주시에 통합되었다.
참고로 관산성 전투 당시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신라군이 붙잡아 처형한 백제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의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신라의 왕궁이 월성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월성 계단 밑에는 성왕의 머리가 잠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라기보다는 당시에 떠돌았던 소문 중 하나일 가능성도 높다. 일단 일본서기의 해당 구절을 읽어봐도 본문에선 성왕을 처형하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쓴 뒤 그 뒤에 '이렇게 말하는 책도 있더라' 정도로 언급하고 있다. 성왕, 진흥왕 문서 참조.

5. 주요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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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서라벌 시가지의 모형.
그러나 위 이미지의 월성의 건물 배치는 본격적으로 월성 발굴이 아직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뚜렷한 근거가 없는 상상일 뿐이다. 또한 앞으로 서라벌 시대의 층까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내려가서 배치를 알아내려면 최소 10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오른쪽 중간쯤에 황룡사가 보인다. 월정교일정교, 안압지 호수 등은 남북국시대가 돼야 생겨서 여기에는 없다.[10] 참고로 월성 남쪽에 있는 절은 인용사다. 월성 북쪽으로 큰 도로가 있고, 그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전랑지(대궁지)다. 정확한 이름은 불명.[11]
삼국사기 등 사서에는 왕궁 내 각 건축물의 이름들이 남아있는데, 숭례전, 강무전, 명학루, 월정당, 월상루, 망은루 등의 건물과 임해문, 인화문, 무평문, 현덕문, 귀정문, 준례문, 적문 등의 출입문이 있었다. 이 중 중심이 되는 정전의 이름은 삼국유사에서 법흥왕이 즉위했다는 자극지전(紫極之殿)이나, 여러 기사에서 이름이 나오는 조원전(朝元殿)으로 추정된다. 숭례전은 중국 일본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썼다. 그 외 요석궁, 고루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진보한 레이더 관측으로 지하에 묻힌 유적을 탐사했는데, 위 상상도 같은 당초의 예상과 달리 월성 위 각 건물의 배치가 그리 바둑판식으로 반듯하지는 않았다. 남북방향을 기본으로 하지만 둥글게 기울어진 초승달 모양인 월성 언덕 자연지세에 맞춰서 전각을 배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 외로 건물들이 촘촘하고 정렬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성 북쪽 남북대로와 바로 연결되는 북3문과 임해전으로 연결되는 동1문 사이에 대형 건물이 있는데 이 곳이 정무와 관련된 중심 건축물, 위에서 언급한 조원전으로 추정된다.
서남쪽 끝에는 대형 건물들이 'ㅁ'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는데 사기(역사책) 천궁서에 나타나는 궁궐 배치 원리 오성좌를 감안하면 이 곳이 신라 임금이 지내는 침전 혹은 내전으로 추정되었다.[12]
중앙에서 약간 서쪽의 북1문과 북2문 사이에는 작은 인공 연못과 여러 중간 규모의 전각이 있어 궁내 의식이나 연회와 관련있는 장소로 추정된다.
물론 이게 8개 의 각각의 층 중에서 이제야 1개층을 조사한거니 앞으로 100년 이상은 발굴조사를 해야한다. 월성 안에는 여러 건물들의 초석 외에도 지름 40미터 안팎의 호수와 가마터, 공방, 우물 등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6. 발굴과 복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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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복원 상상도. 중심 건물인 조원전이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됐지만 건물과 행각의 위치 등은 상상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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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건물인 대전의 상상 복원도. 겹처마가 인상적이다.
경주시 땅에 수많은 신라 관련 유적이 있지만 월성은 신라 국왕이 천 년 동안 살았고 정치의 중심이 되는 왕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개 무덤이나 사찰터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귀중한 고고학적 비밀이 묻혀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장 궁전의 일부였던 안압지에서만 나온 발굴 결과는 월성 발굴에 큰 기대를 걸게 만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발굴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대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발굴팀장의 말에 따르면 땅속을 불과 10미터밖에 파지 않았는데 기와더미가 줄줄이 나와가지고 이거 도저히 안된다고 발굴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당시 발굴기술로는 감당하지 못할만큼 많은 유물이 있어서 발굴을 중지한 것이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레이더 탐사를 비롯한 전면적 학술조사 결과 예상대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유구가 잘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각종 건축물이 초승달 모양의 월성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으며 그 초석, 기타 유물이 온전하게 매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실수하면 무령왕릉과 같은 일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알려지면서 고고학계에 있어서는 희망인 동시에 큰 과제가 되었다. 제대로 발굴하려면 50년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볼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규모였고, 그만큼 과 정성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천 년 세월 동안 건물을 세웠다 허물었다를 반복했고 월성 지하에는 여러 시대의 흔적이 수직으로 겹쳐 섞여있어 발굴하기가 매우 까다롭고[13], 섣부른 발굴은 오히려 파괴를 부를지 모른다고 보는 시각도 크다. 당장 무령왕릉의 사례만 봐도 졸속 발굴로 알아내지 못한 정보가 컸으며 바로 옆 안압지도 예상하고 시작한 게 아니라 발굴과정이 비교적 부실했다.
뜬금없다면 뜬금없지만 월성 신라왕궁을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복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간간히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이유인즉슨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신라 궁궐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볼 때 난처하다는 것과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군은 연간 600만 명 국내외 관광객 유치 목표로 6904억 원을 투입해 백제문화단지를 만들어 백제문화역사관, 사비 궁, 능사(왕국 내 사찰), 5층 목탑, 생활문화마을, 관광리조트 등을 조성했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야하지 않겠냐는 것. # 어째 고구려 왕궁 안학궁 옆에 세워진 테마리조트(...)가 생각나면 기분 탓이다. 이웃 일본도 역사적 근거가 상당히 부족한 가운데 많은 부분을 상상에 근거해 헤이조쿄를 복원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는 실정이다.[14]
어쨌든 간에 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결하는 주 통로로 사용된 대규모 교량이었던 월정교는 현재 복원 중이다#. 물론 이것도 역사적인 고증이 부족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고 말이 많다.# 그리고 고증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월성 북쪽을 두르는 석축 해자도 2021년 기준 복원해서 마무리 단계다.
2025년까지 복원을 위해 국비 1890억 원, 지방비 810억 원 등 2700억 원을 투입한다. 우선 2017년까지 140억 원을 투입해 월성 발굴 조사 및 기초 학술 연구를 진행하고 궁궐 핵심의 복원에 착수한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발굴 조사 성과를 토대로 복원 가능한 유구(옛 물건) 등의 복원을 추진할 예정이다 #. 그리고 2014년 12월 12일 드디어, 월성에 대한 본격적 발굴이 시작되었다. # 일단 발굴을 통해 남아 있는 건축물의 흔적을 확인해 복원까지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이 2023년까지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다.
- 1단계(2014∼2018년/5개년): 월성 중앙부 시굴조사와 정문으로 추정되는 북문지와 동문지, 남문지, 서문지를 발굴 조사
- 2단계(2019∼2023년/5개년): 원지와 기타 유구 확인지역을 발굴하며, 학술대회 개최 및 발굴 종합보고서를 발간
월성을 제대로 발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성벽이나 해자 발굴만 진행되었고, 월성 내부에 대한 발굴은 이번이 최초인 것. 따라서 학계는 이번 발굴에 거는 기대가 크다.
월성 주변 발굴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으로 월성 주변 발굴 조사를 함. 월성 서쪽의 남쪽 성벽 일대
(골촉, 골침, 멧돼지 이빨, 사슴뿔, 동물뼈, 탄화곡물, 토기편 등 발굴)
1979~1980년> 동문지 발굴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문터를 확인, 성벽에 대한 대략적인 토층 상황과 석축 해자 유구를 확인)
1984~1985년> 성벽 바깥에서 해자 발굴
(해자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 해자가 기능을 상실한 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
1985~2014년> 1~5호 해자와 계림 북편 건물터, 첨성대 남편 적심(積心) 건물지, 월성 북서편 건물지 등 확인
https://t1.daumcdn.net/cfile/blog/27268544548A81F42D
2007년에 행해진 지하 레이더 탐사와 이후의 시굴 조사에 의해 많은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2017년 5월 국내 최초로 성벽의 기초층에서 인신공양에 희생된 듯한 인골 2구가 발굴됐다. 성벽 아래층에 인위적으로 묻은 듯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인간기둥(人住)이라고 추정한다. 6세기 지증왕 시기까지 순장을 했으니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실제 근거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7. 관련 항목



8. 둘러보기



[1]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월성 발굴 때 재성이라고 적힌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5] 실제로 경주에 가서 남천을 보면 이런 졸졸졸 개울물 정도로 과연 적이 못 넘어오게 막는 해자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지금 남천이 예전보다 많이 말라붙은 것이지 과거에는 월성보다 상류인 배반동 갯마을까지 배가 다닐 정도였으므로 지금보다는 훨씬 수량이 많았을 것이다.[6] 발해상경용천부, 일본나라, 교토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따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7] 중국식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경복궁이나 자금성을 떠올려보면 된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이 정문이고 광장 쪽이 주작대로.[8] 삼국유사에서는 경주 서남쪽 창림사 자리가 신라 초기의 궁(금성)이라고 쓰고 있다. 나정이나 오릉과도 가까운 곳이다. 이곳도 조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2018년까지 사찰의 흔적은 찾았으나 왕궁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9] 같은 예로 수원시와 화성군(현 화성시)이 있다.[10] 단, 안압지와 붙어있던 임해전 건물은 보인다[1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북궁이 전랑지라는 설도 있고 성덕왕대 창건된 신궁터, 국가의 중요한 제례를 행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인 명당 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2017년 현재 아직 전랑지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떤 건물이었는지 추정하기 힘든 상태. 전랑지는 개발만 막고 그냥 공터로 남겨두고 있다.[12] 혹은 왕궁 내 사찰 건축물일 가능성도 있다.[13] 당장 좀만 더 걸어가면 경주 향교를 비롯한 최부자 종가가 있고 또 당장 월성 북쪽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선덕여중이 있는 등 월성 주변은 변화를 많이 거쳤다. 또 최부자 종가 작은사랑채터에 남은 주춧돌이 월성에서 빼내온 주춧돌이니만큼 당시 만들어진 석재는 이리저리 반출되었을 것이고, 발굴은 더 어려울 수밖에.[14] 다만 헤이조쿄는 대극전(大極殿) 복원에 필요한 자료가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헤이안 시대 말기에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가 만들게 한 『연중행사 에마키(年中行事絵巻)』라는 문헌에 고시라카와 덴노 당시의 '''대극전 모습이 그림으로 수록'''되어 있었고, 이 그림은 나라의 대극전을 복원할 때 기본 자료로 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이 헤이조쿄를 발굴하고 대극전 복원을 완료하기까지는 '''60년'''이 걸렸다. 현지에서는 "'''1300년을 기다렸는데 10년 정도 못 기다리겠냐'''"라는 반응이었다고.나라현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한겨레21). 그렇긴 한데 사실 "연중행사 에마키"에 수록된 회화는 "헤이조쿄"와는 다른 "헤이안쿄" 정전의 1층의 일부 기둥만 묘사한 수준이라... 전체적인 모습은 야쿠사지 등을 통해 추측해서 만들었다고 한다.http://dictionary.sanseido-publ.co.jp/wp/2015/07/18/絵巻で見る-『年中行事絵巻』巻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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