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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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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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영어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중국어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프랑스어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 지린성 지안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v)[5]
지정번호
1135
將軍塚 / 将軍墳遺跡
1. 개요
2. 무덤의 구조
3. 무덤의 주인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돌무지무덤(적석총, 積石塚). 화강암을 쌓아 만들어서 적석총이라고도 한다. 무덤의 형식은 돌무지 돌방무덤이며, 동방의 피라미드, 금자탑이라 할 만큼 규모가 크다. 한 변이 31.5~ 33m이며, 높이는 14m. 근처에 있는 다른 고구려계의 무덤, 수도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것으로 등록된 것도 사실 위치가 중국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나마 유네스코의 감독을 받으며 문화유산으로서 보호가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름의 장군은 군대의 지휘자를 이르는 일반명사이고, 총은 연고가 확인되지 않은 무덤을 의미한다. 명칭에 대해서 다소 이야기가 있지만 일본군이 만주에 세력을 뻗친 후에 '장군'에 빗대어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전혀 근거없는 내용일 뿐이다. 명문화된 첫 조사였던 1907년 프랑스 동양사학자 에두아르 샤반느의 조사때 부터 이미 장군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전하며, 일제가 편찬한 한국의 문화재 도록인 조선고적도보 제1권(1915년 간행)에는 '장군분(將軍墳)'이라고 기재함에 있어 지역민들이 부르던 명칭임을 명기하고 있다.[6]
참고로 일반적인 대형 왕릉급 무덤에 대해 지역민들이 장군 또는 ㅇㅇ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맥락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대가 청나라 때에 봉금조치로 인해서 역사적 맥락이 끊겨 장군이라는 다소 막연한 명칭을 사용했을 수 있다. 태왕릉천추총, 서대총과 같은 소위 네임드들 또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이나, 지리적 특징으로 일제강점기의 조사 때 붙여진 것이다. [7]
비슷한 예를 보더라도 성주군에 소재한 성산동 고분군도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때부터 조사되었던 고분군이다. 예로부터 성산동 고분군에는 팔장군묘라는 이름의 무덤이 있었고 이는 일제에 의해서 작명된 고분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사용하던 명칭을 고스란히 사용한 사례이다. 이거 말고도 이처럼 동네의 거대한 봉분을 갖는 무덤에 대해서는 으레 왕, 장군과 관련된 명칭과 설화가 전하는 역사적, 민속학적 차원의 사례가 많다.

2. 무덤의 구조


장군총은 적석총의 구조상으로 가장 완성된 형태이자 적석총 변화의 마지막 형태로 보고 있다. 장군총은 논자마다의 용어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보편적으로 계단식석실적석총[8]으로 분류되고 있다. 세부 제원은 상술.
장군총은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장군총을 비롯, 배총 2기, 추정 제사시설 1기, 배수구 1기, 추정 부속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능원(陵園)을 갖는 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군총은 강돌을 깔아 기초부로 삼고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그 위로 7개의 계단으로 구성하여 석재를 쌓아갔다. 장군총에는 1146매의 석재를 사용해 외면을 구성하였으며 그 내부를 강돌로 채웠다. 특히 장군총에 사용된 석재들은 태왕릉의 석재 가공도보다도 더욱 가공되고 대체로 일정한 규격으로 돌을 짜르는 등 한층 규격화되고 정치해진 석재를 사용하였다. 특히 장군총의 가장 밑의 계단인 1단 부분에 사용된 석재는 그 위로 쌓은 다른 계단에 사용된 석재에 비해서 훨씬 크다. 또 1단의 계단에 사용된 석재를 보면 살짝 들여쌓아가면서도 석재가 맞물리는 면에 과속방지턱처럼 턱을 두어 하중으로 적석총의 형태가 어그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9]. 이러한 건축 기법 상에서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장군총을 가장 적석총의 발전과정에 있어 가장 마지막이자 완성된 형태로 보는 것이다.
장군총의 매장주체부는 평행고임식의 천장을 갖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장군총의 밑에서부터 세릴 때, 3번째의 계단 위에 묘실을 두었다.[10] 무덤 현실의 한 변은 543~550cm의 정방형이고 높이는 510cm로 집안 통구 고분군 내에서 가장 가공도가 높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장군총보다 먼저 만들어진 태왕릉보다 규모적인 측면에서는 작아졌지만 매장주체부만 놓고 보면 장군총의 매장주체부가 태왕릉의 그것보다 2배가량 크다.
무덤의 정상부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난간의 일부도 확인되었다. 이에 연구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한데 단순히 난간이 있다는 설, 나아가 적석총에 계단을 밟고올라가서 제의를 할 수 있었다는 설, 아예 무덤 위에 기와로 형성된 구조물이 있었다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장군총의 주변과 계단의 상면에서 기와나 막새가 출토되는 맥락을 보면 분명 구조물이 있었던 것으로도 볼 여지는 있으나 역시 구체적인 형태와 사용 양상을 추정할 근거는 이 이상으로는 없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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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중간에 사람이 서있으니 비교해보면 된다. 사진에 보이는 큰 돌이 바로 장군총의 특징적 요소인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이다. 호분석이란 무덤을 보호하는 돌이라는 뜻으로 적석총의 구조상 하중이 기단부로 몰리게 되면서 큰 측압을 받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밀림현상을 막기 위한 시설로써 가장 큰 호분석이 높이 4.5m, 두께 1.9m에 달한다. 각 호분석의 크기는 평균적으로 태왕릉, 천추총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호분석을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장군총의 주변으로는 배총이라 불리는 왕의 근신자(近臣者)의 무덤으로 현재까지 2기가 확인되었다. 2호의 상태야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주로 거론되지 않지만 1호의 경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마치 장군총의 미니어처판과 같은 형태여서 장군총과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2호 배총의 서쪽으로는 이른바 제대(祭臺)라고 불리는 추정 제사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물질증거로도 제사와 관련된 시설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연접된 적석총의 기초부라는 견해도 있으나 마찬가지로 명확히 알 수 없다. [12]

3. 무덤의 주인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 JYM0001[13])이며, 인근에 있는 태왕릉보다 정제된 스타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장수왕릉(長壽王陵)이라고 알려져 있다. 태왕릉은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광개토왕의 능이라는 의견이 많고 무덤 축조 양식이나 기술적으로 후대의 것이 확실한 장군총은 장수왕릉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이라는 설도 있다. 이쪽이 일반적으로 광개토왕릉이라고 알려져있는 태왕릉보다 광개토왕릉비로부터 거리는 멀지만, 방향으로 볼 때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태왕릉은? 장군총=광개토왕릉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중 다수는 고국원왕릉으로 본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광개토태왕 등으로 인해 오해는 많지만, '태왕'이라는 호칭을 쓴 것은 광개토왕 외에도 다수 존재한다. 또 태왕릉=광개토왕릉설의 다른 근거로는 2003년 무덤 근처에서 수습된 '신유년 호대(태)왕(辛卯年 好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울[14]인데, 앞에 호(好)자를 붙인 고구려의 왕은 한둘이 아니다. 2019년에도 발표된 자료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므로 장수왕릉은 평양에 있을 것이라고 본다.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평양에서 보낸 장수왕이 죽었으면 당연히 평양에 매장했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설들에 대한 재반박으로 장수왕릉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먼저 평양이 아닌 집안(국내성)에 장수왕의 무덤이 있는 이유를 이것이 북위효문제의 예시를 들어 수릉(壽陵), 즉 살아 있었을 때 만든 무덤일수도 있다고 한다. 또 장군총=광개토왕릉설의 주요한 근거인 방향문제는 2000년대 중국 고고학계의 조사보고서가 장군총과 태왕릉의 동북쪽과 동쪽 방향(즉 태왕릉의 경우는 광개토왕릉비 방향)에 제단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발견돼서, 태왕릉의 방향 문제에 반론을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태왕릉의 정면은 제단쪽이며, 광개토왕릉비와도 방향이 일치한다는 것.[15] [16]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무덤 관련 논쟁은 처음 태왕릉이 발견된 1906년때부터 끊이지 않던 떡밥이었고, 오늘도 역사학자들은 이 무덤들의 피장자가 누구인지 마르고 닳도록 싸우고 있다. 다만 대세론의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장군총=장수왕릉, 태왕릉=광개토왕릉은 일단 상대적으로 더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참고로 북한과 중국 학계는 이 문제에서는 다수설로 거의 일치하고 있는 실정.
다만 한국에서는 장군총을 고구려 시조묘로서 신전과 같은 상징적인 의례를 주관했을 것으로 보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건축학적으로 제례를 위한 공간으로서 설계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추측되며 삼국사기 등에 묘사된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 같은 행사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4. 기타


돌방무덤 구조답게 입구가 있기 때문에 도굴꾼들에게 '''아주 탈탈 털렸다.''' 현존하는 돌방 무덤들은 거의 대부분 죄다 털려서 후대에 건질만한게 내부 양식과 벽화 빼면 개판이라고 보면 된다.[17] [18] 주인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유가 이런 탓. 도굴당한 것이 유명했으면, 조선 시대 허백당시집의 <망황성교>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언덕처럼 돌을 쌓아 황제[19]

무덤 만들어도 / 累石如丘作帝冢

목동에게 많은 보물 도굴되고 말았어라 / 金多竟遭牧豎兒

<망황성교> 中 (#출처)

반면 고구려식 무덤과 달리 신라의 경우는 통일 전후까지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를 이루어 대체로 이런 참화를 면할 수 있어서 금관 같은 것이 출토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와 달리 중국측에서 장군총에 따로 철제 계단을 설치해두어 관광객들이 올라가서 볼 수 있었으나 2005년부터 유적의 보호 차원에서 장군총 내부 관람을 차단면서 철제 계단도 치워버렸다. 그래도 바깥은 구경할 수 있는데 관리는 소홀하다. 하지만 태왕릉을 제외한 다른 통구 고분군 내의 왕릉급 적석총과 달리 유료인데다가 제복을 입은 안내자 들이 나름대로의 삼엄함을 보여주고 있다.

5.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그 밖에도 당시 조사자들이 각자 출간한 단행본에도 이에 대해서 지역민이 부르던 명칭이라고 써놓고 있다.[7] 예를 들면 서쪽의 큰 무덤이라는 의미로 서대총, 서강(西岡) 남쪽의 가장 큰 무덤 : 서강 남대석묘(現 우산하 2110호)등의 명칭이 붙여진 바 있다.[8] 계단형태의 적석부를 갖는 굴식돌방 돌무지무덤의 의미, 중국측의 방단계제석실적석총과 의미가 상통한다.[9] 태왕릉, 천추총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확인된다[10] 이는 태왕릉, 천추총을 비롯한 이전 단계의 적석총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미 적석총이 주된 무덤 양식으로 채용되던 시점에도 흙으로 무덤을 만든 굴식돌방무덤(석실봉토묘)이 도입되어 있었다. 장군총의 묘실의 수직적인 위치는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과 거의 비율이 비슷하며 장군총 자체의 비율또한 굴식돌방무덤과 유사하여 굴식돌방무덤의 영향을 꾀나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1] 장군총 외에도 다른 고구려 적석총의 상면에는 기와와 막새가 출토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적석총의 상부에 목조시설이 있었다는 견해, 소위 와즙(瓦葺)이라하는 기와로 무덤을 덮는 치장을 하였다는 견해 등이 있다.[12] 흙으로 만든 시설은 흙을 파보면 흔적이 남지만 돌은 누가 옮겨버리면 끝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이러한 점이 고구려 적석총의 고고학적 분석과 연구에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13] 集安 禹山下 墓群(Jí'ān Yǔshānxià Mùqún)의 약자, 통구 고분군 내 우산하 고분군(JYM), 마선구 고분군(JMM), 산성하 고분군(JSM), 만보정 고분군(JWM), 칠성산 고분군(JQM), 하해방 고분군(JXM)으로 크게 구분된다.[14] 자세한 것은 태왕릉 참고[15] 단, 2000년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받기 위해 무수히 쏟아진 이 중국 보고서들은 국내 학자들에게 자주 까일 만큼 졸속인 정보도 많은지라...게다가 이 석축이 실제로 가 보면 알겠지만 제단이라고 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보기에는 그저 돌을 나란히 깔아 만든 만든 경계선 정도라 카더라. 무엇보다 제단은 앞쪽이고 입구는 뒤쪽인 무덤이 있을까?[16] 중국의 보고서는 다소 문제가 있긴하지만 최소한 집안 통구 고분군의 왕릉급 무덤들에 대해서는 공을 들인 편이다. 그 중에서도 태왕릉과 장군총은 발굴의 누적이 다른 적석총에 비에 현격하다. 다만 연구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단지 제단이라 추정되는 제대의 기능의 문제일뿐 중국측의 졸속보고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한국측에서도 이러한 제단시설을 인정하고 제단시설로 보는 견해, 그렇지 않은 견해로 대별된다.[17] 출토유물이 풍부한 태왕릉의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 도굴품이다. 무덤 근처에 도굴할 때 한번에 들고가지 못해 나중에 들고가려고 도굴품을 묻어둔 '''도굴갱'''에서 확인된 것이다. [18] 장군총에는 벽화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장군총이 축조되는 시점까지도 그 이전의 왕릉급 고분에 벽화가 있었던 경우는 없다. 다만 장군총 이전의 무덤에는 벽화가 아닌 벽화와 같은 제재로 그린 장막을 벽화처럼 걸어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19] 이 때까지만 해도 역사가 잊혀져 사람들은 금나라의 옛 무덤인 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