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구수왕

 


'''백제 제14대 건길지'''
'''近仇首王 | 근구수왕'''
'''시호'''
근구수왕(近仇首王)
'''성씨'''
부여(扶餘)
''''''
구수(仇首) · 수(須)[1] / 귀류(貴流) · 구소(久素)[2] / 귀수(貴首) · 귀수(貴須)[3]
'''왕후'''
아이부인(阿爾夫人)
'''왕자'''
부여침류(扶餘枕流), 부여진사(扶餘辰斯)
'''부왕'''
근초고왕(近肖古王)
'''모후'''
왕후 진씨(王后 眞氏)
'''생몰연도'''
음력
320년대 이전[4] ~ 384년 4월 (60~70대 추정)
'''재위기간'''
음력
375년 11월 ~ 384년 4월 (9년)
1. 개요
2. 생애
2.1. 태자 시절
2.2. 왕위에 오른 후
3. 평가
4. 삼국사기 기록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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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 이후, 누가 어려움을 극복하여 다시 이곳[5]

에 오겠는가?'''

今日之後, 疇克再至於此乎?

치양 전투의 승리 이후의 발언. 전성기 백제의 강력함을 보여준다.

백제의 제14대 국왕이자 건길지.
이름은 기록에 따라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양서(梁書)》에는 수(須), 《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또는 근귀수(近貴首),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귀류(貴流) 또는 구소(久素).

2. 생애



2.1. 태자 시절


치양평양성의 위치
근초고왕의 아들로 태자 시절에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여러 전쟁에 참여해 많은 전공을 세워 명망을 높였다.[6]
371년 반걸양(치양) 전투에서 본래 백제 사람이었던 사기(斯紀)가 백제로 다시 돌아와[7] 부여수에게 고구려의 군사기밀을 제공했다. 고구려군은 숫자는 많으나 붉은색 깃발을 들고 있는 군대만 정예군이고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니 붉은색 깃발을 들고 있는 군대만 격파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진다는 것이 내용의 요지. 그 결과 근구수는 고구려군을 박살내고 고구려군의 1/4인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뒤쫓아 수곡성[8]까지 진출했다. 부여수는 더욱 진격하려고 했지만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도덕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부여수는 이를 옳다고 여기고는 더 이상 고구려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대신에 을 쌓아 올려 표시를 남겨 놓고는 그 위에 올라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 곳에 올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9] 그리고 실제로 백제에서 근구수왕 이후로 평양성 근처까지 밀고 간 왕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고구려고국원왕은 2년 뒤인 371년 다시 보복전을 걸어오지만 이 때는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나서서 그들을 물리친다.

2.2. 왕위에 오른 후


375년 정작 왕위에 즉위하고 난 뒤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이나 외교 업적 이외에는 기록이 별로 없는 탓에 내정에 대한 부분은 자세히 알 수 없다.

'''二年 以王舅眞高道爲內臣佐平 委以政事'''

2년(서기 376) 임금의 외삼촌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즉위 1년째인 376년 장인어른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여담으로 근초고왕처가가 진씨인데 근구수왕의 아내 역시 진씨다. 4세기 백제에서 외척 진씨 가문의 강대한 위세를 알 수 있는 부분.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376년 11월 고구려가 침공하여 다음 해까지 치열히 싸웠다.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3년(서기 377)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十一月 高句麗來侵'''

11월, 고구려가 침범해왔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근구수왕'''

이에 377년 10월 근구수왕은 병사 3만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377년 11월에 고구려가 또다시 남침을 개시해 왔다.
379년 3월 중국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냈는데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사신단이 동진에 도착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편 중국 기록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에 백제왕 수(須)가 …중략…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나중에 언젠가 다시 사신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중국은 물론 한편으로는 일본과도 국교를 맺어 중국의 제반 문물을 일본에 전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학자를 구하므로 본인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면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며 왕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382년에는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서기》에 따르면 382년에[10]에 왜인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가라국(비정 미상)을 공격해 가라국 왕이 백제로 귀부하자 망명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료 해석의 문제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재위 9년만인 384년 4월에 승하했는데 공교롭게도 동년 11월에 라이벌고구려소수림왕 역시 승하했다.

3. 평가


부왕인 근초고왕 재위기 때부터 전장을 누비며 활약했고 즉위 이후 전성기를 유지시키는데 성공하며 백제의 양대 전성기를 구축해냈다. 태자 시절부터 백제의 최전성기의 주역으로 맹활약하였으며 즉위 이후에도 아버지 근초고왕이 이룩한 백제의 전성기를 유지시킨 왕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백제의 군주들 중 평양성을 직접 마주한 유이한 왕이기도 하다.[11]
하지만 라이벌소수림왕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드는 개혁에 성공해 광개토대왕장수왕 때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과 달리 근구수왕은 이미 근초고왕 말년부터 시작된 백제의 쇠퇴를 자신의 치세에 최대한 늦추는 것에 그쳤다. 근구수왕 사후 장남침류왕불교 공인 외에는 업적이 없이 죽고 침류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아신왕나이가 어려 자신의 차남이자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즉위한 후 백제는 이 때부터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콤보를 얻어 맞으며 수도한성까지 함락당하는 상황이 된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근구수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근구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장인 진고도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三年冬十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三年冬十一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五年春三月 사절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五年夏四月 흙비가 종일 내리다
六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六年夏五月 땅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다
八年 비가 내리지 않아 굶주린 사람이 많이 발생하다
十年春二月 대궐 뜰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히다
十年夏四月 근구수왕이 죽다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근초고왕


[image]
'''드라마 근초고왕에서의 근구수왕'''
배우는 아이돌 초신성의 멤버 건일.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후반부터 등장했다. 어이없게도 기록에 맞게 진씨 부인의 소생이 아니라 가상 인물 부여화의 소생이다. 게다가 부여화의 전 남편이었던 고국원왕이 친부라는 소문 때문에 궁궐 밖에서 지냈고 어릴 때 죽을 뻔해서 역사 왜곡과 사극 막장화의 중심으로서 공홈과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등에서 욕을 먹었다. 이름도 기록대로 수, 귀수, 휘수가 아닌 쇠꼬비에서 나중에 구수로 개명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이후 부여근이 태자 자리를 포기하고 진구를 따라 야마토로 떠나자, 홍란의 양자가 되어 백제태자가 된다.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아버지 근초고왕이 승하하자 오열한다.

5.2. 천년의 신화


백제 진영의 궁수 기병 영웅으로 등장하며 아버지 근초고왕이 재임하던 시절인지 태자라고 나온다. 3국 영웅 중에서는 마법까지 사용이 가능하다보니 나름 강력한 편.
[1]양서》에서도 수라고 써있다.[2]속일본기》.[3]신찬성씨록》.[4] 손자인 진손왕(辰孫王)이 356년생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이 추측이 가능하다. 게다가 둘째 아들의 아들이니 나이 차이가 좀 났을 것이다. 저 320년대 이전이라는 것 역시 최소의 나이로 역산한 것이다.[5] 수곡성 인근 지역으로 현재의 황해남도 신계군.[6] 때문에 삼국사기 원문에서도 대부분의 국왕 본기가 즉위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데 근구수왕 본기는 근초고왕 재위 기간에 있었던 태자 시절 기록부터 상세히 나오는 편이다.[7]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주했었는데 이 때 다시 귀환.[8] 지금의 황해도 신계 부근으로 추정.[9] 근구수왕의 말발굽 자국은 삼국사기의 지금인 고려시대 때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10] 일본서기 상으로는 262년. 이는 120년 갑자설 때문에 시기가 앞으로 당겨진 것이다.[11] 성왕의 경우에는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