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
1. 개요
백제에서 야마토국으로 보내진 검이다.[2]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지는 철제 검. 원래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고(神庫)[3] 에 녹이 슨 채로 보관되었는데,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임명된[4] 국학자 스가 마사토모(菅政友 1824-1897)가 1874년 신고를 조사하며 칠지도의 녹을 떼보았다가 명문을 찾아내었다. 1953년에 일본 국보 고고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검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특이한 모양으로 뻗은 잔가지가 특징이고, 길이는 74.8 cm이다. 도신에 한반도 금관문화의 금상감 기법으로 '''황금문자 62자'''를 수놓은, 당시 기준으로 최고의 금속 공예기술이 들어간 보검이다.
특유의 복잡한 형상 덕분에 한 눈에 봐도 전투용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보배임을 알 수 있다. 칼자루에서부터 칼날에 이르기까지 형상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성한 나무로, 제사의 주관자를 상징한다. 또한 7갈래 가지는 북두칠성을 본 뜬 것으로 한 나라의 화복을 다스리는 군주의 통치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5]
말 그대로 제사와 통치를 모두 주관하는 군주의 증표이자 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각 나라 군주들 사이에서는 정교하게 제작한 보검을 선물로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대체적으로 대국의 통치자가 그보다 작은 나라에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용천지역에선 명나라 영락제가 티벳의 달라이라마에게 선물한 보검을 복원한 모조품을 전시했다. [6]
신검 전설에 소개된 칠지도 본문. 저 책 자체가 일본 책이라 아래 해석과 다르다.
칠지도 자체는 일본에 딱 한 자루만 있지만, 현대에 들어 사학자들은 한반도에서도 양식이 비슷한 보검들을 발굴하였다.[7]
[image] [8]
일제시기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 발굴된 철제 칠지상 철기. 문화재청 부여 군수리 사지 페이지에는 칠지도가 발굴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유물을 말하는 듯하다.
2. 문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적 분쟁
글씨 몇 자가 훼손되었기에 이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학계 간 의견차가 있다. 일본 학계는 보통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본에 '''바쳤다'''고 하고[9] 반대로 한국 학계는 백제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태자(미래의 근구수왕)를 외교사절로 보내서 '''하사했다'''고 여긴다. 왕위계승자를 사절로 보낸 점도 있어서, 쌍방의 견해가 상당히 충돌한다.[10] ''' 그러나 일본서기에서 칠지도를 전했다는 구저(久氐)가 근구수왕이라는 소리는 일개 학설일 뿐이지, 정확한건 없다. 그의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일대기를 보면 지극히 신료의 성격이 짙지, 태자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본론으로 돌아와 일단 당시 백제와 왜가 상당히 우호적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일단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보낸 것이 맞는다고 가정하자.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재위기에 백제는 바다 건너 요서와 교류하고, 한반도에서 상당한 우세를 점하던 고구려와 경쟁하던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반면 일본은 백제에게 전수받은 기술들로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던 상태였다. 따라서 백제가 일본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주장은 당시 정황상으로 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반박이 나온다.
건국대 홍성화 교수는 자신의 논문 《석상신궁 칠지도에 대한 일고찰》(2009.12.)에서 '전지왕 대에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전달했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다만, 전지왕은 고구려에 대해 수성적인 입장을 취했다. '병오 정양'이라는 표현을 단지 '양기가 강한 때에 만들었으므로 좋은 칼이다.' 하는 의미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이들은 칠지도가 정말로 태화 4년(369)[11] 11월 병오일에 만들어지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다. 그러나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조경철은 논문에서, 당대에 관용적으로 쓰이던 표현인 '丙午日中'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丙午正陽'이라고 쓴 것은 백제의 왕이 이 문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뜻하며, 칠지도를 만든 연대도 실연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만약 병오정양이 수사가 아닌 실제 제작한 날짜라면 408년이 유력하다. 11월 16일이 병오정양인 날은 408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전지왕 4년이 바로 서기 408년이다. 연호를 언제 썼느냐에 따라서 연호의 기년은 달라지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정확하게 떨어진다.[image]
《일본서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일본서기의 서술을 그대로 따르면 진구황후 섭정 52년은 서기 252년이다. 하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72년이 된다. 일본서기 진구황후조 섭정 55년에 "(백제) 초고왕이 죽었다."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일본서기 서술대로라면 섭정 55년은 255년이지만 근초고왕은 375년에 죽었으므로 이주갑인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일본서기에서 칠지도 등을 '바쳤다'고 말하는 진구황후 섭정 52년은 372년(근초고왕 27년)이 분명하다.(섭정) 52년 가을 9월 정묘삭 병자(10일)에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彥)을 따라왔다. 이때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신국(臣國)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수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입니다. 너무 멀어서 7일 동안 가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그 산의 철을 얻으니 영원토록 성조(聖朝)에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아뢰었다.[12]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
일본 역사학계에서 근거로 사용하는 《일본서기》는 한일 고대사 연구에서 몹시 중요한 사료로 한국 학자들도 종종 참고한다. 한국에는 그 시대에 쓴 역사서가 전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일본서기만큼 삼국시대를 자세히 서술한 다른 문헌이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야마토 정권의 공식적인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저술된 역사서이기 때문에, 천황과 일본 야마토 조정의 입맛에 맞게 집필한 내용이 너무 많아 객관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컨대 칠지도가 언제 일본으로 들어왔는지 쓴 기록이라면, 특별히 의심할 이유가 없는 한 일본서기가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하지만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했는지 '헌상'했는지 같은 정치적 입장 문제에서는 《일본서기》는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이러한 문제로 양국 학계에서 해석 차이로 논쟁 중이지만, 당시 백제가 일본에 조공할 이유나 근거가 떨어지기 때문에 한국에선 신뢰성을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게다가 한국 사학계 측에선 '''칠지도에 새긴 문구'''도 중요하게 여긴다. 아래는 칠지도 문구 원문이다.
학자마다 판독을 다르게 하는 글자는 괄호 안에 나타내었다. 이것의 구체적이고 정확한 해석은 학자마다 이견이 많기에 정설은 없으나, 큰 틀 안에서는 대강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앞면: 泰□四年十□月[13]
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作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십사삭윤표》에 따르면, 칠지도의 제작연도로 흔히 알려진 369년('''기사년''') 5월 16일, 11월 16일, 12월 16일은 각각 '''을미'''일, '''임진'''일, '''임술'''일이다. 뒤에 나오는 병오일과 '''맞는 날이 하나도 없다'''.태□ 4년 1□월 16일 병오정양에 백 번이나 단련된 철로 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공손한 후왕에게 줄 만하다. □□□□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니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여기서 ''''마땅히 공손한 후왕''''이라는 구절이 한국 사학계가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후왕'의 ''''후(侯)''''는 왕보다 하위에 있는 신하를 지칭하는 글자로 보통 '제후', '후작'과 같은 낱말에 쓰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부 일본 학자들은 백제가 아닌 동진에서 만들어서 단순히 백제를 거쳐 동진 → (백제) → 일본 형식으로 하사됐다는 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도 칠지도는 백제의 곡나철산이란 곳에서 채굴한 철로 만든 검이라고 기록되었다. 즉, 현대의 논쟁이나 후왕의 속뜻이 무엇이었든 당시 백제 왕실은 일본 왕실을 '후왕'이라고 부른 모양이다.
칠지도를 두고 백제가 왜에게 '인질'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인질을 보낼 정도면 칠지도도 솔직히 바친 거라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칠지도와 직지가 왜로 건너간 것은 서로 시대적 간극이 길어서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더군다나 백제가 보냈다는 인질에 대해서는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 정작 백제삼서의 기록[14] 과 일본 쪽 기록[15] 만 있지, 어디에도 '''인질을 보냈다고 하진 않는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정작 한참 후대인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이런 표현이 나올 뿐이다. 문제가 되는 삼국사기조차도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하여 상하관계에 따른 인신공납이 아닌 단순히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를 나행주를 위시한 학자들이 제시하여 설득력을 얻었다.
덴쇼 14년(1586)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지만 당시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굴복을 선언한 것이 아니듯, 전근대의 인질은 지금처럼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일본의 금속, 철기 제작기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스즈키(2013)는 2013년 세계대백제전 기념학회에서 백제의 금속기술을 다루면서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바로 칠지도는 명문에서 말하는 대로 '단련', 즉 '단조'된 것이 아니라 '주조'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칠지도 형상을 단조하기가 기술력으로는 매우 어렵고, 실제로 칠지도 단면은 길게 눌린 타원형인데 이런 모양은 단조하면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명문의 날짜나 수식어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병오정양이든 백번 단련이든 그저 멋진 미사여구를 갖다붙였을 뿐일 수도 있다.
주보돈은 2011년 <한국고대사연구>에 실린 『백제 칠지도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하사했느냐 바쳤느냐를 따지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칠지도의 태화(太和)를 백제의 연호로 보고 원년을 369년이라고 추정하였다. 369년 근초고왕이 황색 깃발을 사용하여 한강 남쪽에 사열을 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참고하였는데, 굳이 천자의 색인 황색 깃발을 사용한 것은 연호 사용과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게다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의 가라 7국 평정기사를 주체교체론 입장에서 받아들일 때, 백제는 가라 7국을 평정하고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했으며 일본과 관계를 텄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해 고구려의 침략을 물리쳤다.
따라서 백제는 사방을 평정했다는 자신감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여 황색 깃발을 사용하여 열병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낸 해였다. 그래서 이 해를 태화 원년으로 정하여 사용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칠지도가 제작된 것은 태화 4년으로,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완벽하게 우위를 점하고, 심지어 371년 평양성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왕을 패사시켰을 정도였다. 동진은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 領樂浪太守)로 봉했는데, '낙랑태수'라는 직책이 4세기 초반까지 한반도 주변을 아우르던 국가에 중국 왕조가 주던 실질적인 직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동쪽의 패자로서 근초고왕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백제는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칠지도를 제작하여 일본에 선물하였다. 따라서 백제 칠지도로 드러난 양국 간의 상하관계와 같은, 현대 양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는 지리멸렬한 소모적 논쟁 이전에 당대 백제의 자신감이 드러난 칠지도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자는 주장이다. 근초고왕 업적을 낚아챈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가라 7국 평정기사, 침미다례 도륙기사에 대한 주체교체론의 사실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실물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이병도는 태화를 백제의 독자 연호라고 보고, 태화 원년을 369년이라고 하여 태화 4년은 372년이라고 해석했다. 주보돈의 해석과 동일하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칠지도의 형태와 트렌드 등을 고려해 5세기나 6세기로 추정하는 모양이다. 그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칠자경을 근거로 그 무렵 유행하던 형식의 거울과 도검으로 보았다. 일본서기에는 칠자경과 칠지도가 백제로부터 전해졌다고 증언하지만, 칠자경은 일본에서 발굴된 바가 없고 칠지도만 있다. 6세기 초 무령왕 재위기 즈음 유행하던 형태라고 본다면, 주조(대량생산)되었다는 학설을 뒷바침한다.
2.1. 칠지도는 중국에서 만들어서 일본에 하사했다?
현재까지 일본 사학계가 주장하는 칠지도의 중국 동진 하사설은 두 가지이다.
- 백제가 단순히 전달자 역할을 하여, 동진이 왜왕에게 준 칠지도를 동진을 대신해 왜왕에게 전달해주었다는 설
- 원래 칠지도 자체는 동진이 백제에 준 것이 맞지만, 백제가 가지고 있다가 백제의 필요에 의해서 동진의 뜻과는 상관 없이, 군사적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일본에게 다시 주었다는 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일본측 주장대로 칠지도의 연호가 일단 백제의 연호가 아니라 중국의 연호라고 해보자. 역설적이게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칠지도에 씐 연호가 동진 것이라고 밝혀진다면, 일본 주장대로 중국에서 제조된 검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반대로 백제가 당시에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면[17] , 칠지도를 백제가 제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8] 일본 사학계에서 백제는 독자적인 연호가 없고 중국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제조된 검이요, 또한 중국에서 하사받은 물건이라고 주장하는데 논리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중국 연호이든 백제 연호이든, 백제가 연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의문을 해소할 만한 유물이 더 발견되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제조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19]
백제는 일반적으로 연호 또는 연호+간지(60갑자)로 연도를 적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그낭 간지만으로 연호를 표기했다. 《한원(翰苑)》에서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서 "연도를 기록할 때 따로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로만 차례를 삼는다[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있고 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도 "'''甲寅年'''正月"이라고 간지(60갑자)를 사용했다. 일본서기에서도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사들은 간지로만 적었다. 학자들은 백제가 외교문건이나 외교무대에서는 중국 남조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게다가 백제가 단순히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1번 학설은 헛점이 많으며 일본 내에서도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는 학설이므로 논점을 벗어났다. 그리고 동진이 백제로 하여금 일본에 하사하도록 지시했다면, 중국에도 일본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현전하는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중국이 만들었다면 칠지도 명문에도 중국이 주체로 언급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을 의미하는 문구는커녕 '''동진을 암시하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단순히 백제가 1번 논리대로 전달자일 따름이라면, 백제라는 문구가 나올 이유가 없다.[20] 일본에서는 동진과 백제가 조공 책봉 관계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후왕을 지칭하는 것은 (왜왕이 아니라) 백제왕이라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1번 논리로는 왜국과 동진이 주고 받는 물건에 굳이 백제나 백제왕을 언급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단순히 백제가 왜국과 동진 사이에 전달자 역할을 했고, 중국이 왜국에 사하라고 백제에게 전달했다면, 동진을 위시한 제후국인 백제와 중화 질서에 갓 편입한 왜국의 지위를 염두해야 한다. 일본 학계는 백제와 왜국은 당시 중화질서에서 지위가 같은 나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4세기 근초고왕 시절의 물건이 맞다고 해보자. 근초고왕은 진동장군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왜왕은 중국 남조에서 하사받은 작위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동진과 [21][22] 통교한 기록조차 없다. 백번 양보해서 동진 하사설이 맞다고 가정해도, 적어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일본 사학계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중국에서는 비슷한 양식이 출토된 적이 없으나, 한반도에서는 칠지도의 근간이 되는 원삼국시대의 금관양식이 지속적으로 출토된다.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금은동 제품이 한반도 고대왕조들의 오리지널리티라는 것. 그렇기에 연호 하나만 가지고 중국에서 만들었느니 하사했느니 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나 부실하다.
또 1번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후왕이라는 호칭[23] 등으로 보아 일본과 중국은 당대부터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인데, 문제 몇백 년 뒤에 쇼토쿠 태자가 중국 입장에서 보면 거만하게 "해 뜨는 나라의 천자"라는 외교문서를 보냈다가 수양제가 일본 사신을 죽이니 살리니 할 정도로 분노했던 사건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다른 방면에서 바라본 주장도 있다. 후왕 바로 다음에 나오는 한자들이 보이지 않아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 그런데 한문은 한국어나 일본어와는 서기 방식이 반대라 그렇게 보면 해석이 꼬여 이 부분이 문장 전체가 큰 효력을 잃는다. 후왕을 단지 길상구로만 받아들여 '선량한 후왕' 식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에도 이 설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이나 한계 때문에 1번 학설을 대체하는 것이 일본 학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되는 2번 학설이다. 즉, 한국에서 당초에 일본 학계의 주장이라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애초부터 동진이 왜왕에게 하사하려고 백제를 통해 준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학설이 일본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이유는, 한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백제가 하사한 물건이라는 주장을 부정할 수 있으면서도 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후왕'이라는 문구가 백제왕이 왜왕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동진의 황제가 백제왕을 지칭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번 해석의 근거는
1. 앞서 언급했던 연호의 문제[24]
2. 당대에 한반도 국가들 왕조에서 사용되던 태자라는 단어를 안 쓰고 세자라고 낮추어 자국의 태자를 부른 점[25][26]
3. 칠지도는 단조된 도검이 아니라 주조된 검이라는 점. 즉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는 뜻인데, 이는 칠지도가 양산품으로 각국 제후들에게 보낸 물품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됨
4. 칠지도 전면에 후왕이라는 문구는 제후를 뜻하므로 제조자가 (제국의 황제가 아닌) 백제왕이나 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3번과 연계되어 전면에 두루뭉실하게 수취자가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고 단지 '후왕'이라고만 하였으므로 '양산품'이라는 점을 뒷바침함
5. 전면과 후면의 서체가 다르므로 전면과 후면의 글귀는 서로 다른 사람이 새김
(전면과 후면에 동일한 문자 4개 즉 造, 百, 刀, 王가 쓰였는데, 글자들을 대조해보면 서체가 다르다는 것이 골자임) 즉, 전면은 중국에서 제조, 후면은 백제인이 재가공 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면과 후면의 문장은 서로 통하지 않는다.[27] 확실히 전면의 문장과 후면이 문장이 다소 중복되는 내용이 있긴하다. 이미 병오정양에 백번이나 단련 시켜 만들었다고 전면에 적혀 있는데, 뒷면은 백제 왕세자가 조(造)했다고 씌여져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전면과 후면은 둘다 사여하는 측에서 수취하는 측에게 일관되게 고압적인 문장으로 명령하므로, 중국 제조설과는 별개로 백제 측에서 헌상 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6. 聖音= 동진을 암시하는 문자로 奇生=寄生이다. 즉 동진에 기생하는 (기대어 사는) 혹은 동진의 성은을 입음이다.[28]
7. 간지를 후대에는 잘 사용했다는 근거가 나오지만, 칠지도에는 갑자기 뜬금없이 연호가 나오므로 (백제 연호인지 중국 연호인지는 차후의 문제로 두고 泰和4년이라는 문구는 연호가 맞다. ) 백제에서 제조된 물건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부차하자면 일본 사학계는 백제가 칠지도를 헌상한 이유는 고구려와 벌이는 전쟁에서 연합군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주장대로 372년이라면 남쪽으로 침미다례를 찢고 군사를 돌려 고구려 고국원왕마저 전사시킨 최전성기였으므로 말이 안 된다. 더구나 이후에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왜구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 전선에 섰음을 교차검증해줄 문헌이 없다. [29]
전면의 문장을 보면 두루뭉실하게 수취인이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제후를 뜻하는 후왕이라고 했을 뿐이다. 후면에는 백제왕세자와 왜왕[30] 이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제후들에게 하사하기 위해 양산품으로 만들어졌고 [31] 그것을 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의 백제왕세자 造라는 것을 근거하여 백제가 복제품을 만들어, 후면의 글귀를 재가공하여 보냈다고 주장한다. 전면과 후면의 문장이 서로 통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지 않음을 근거로 삼는다. 또한 奇生聖音이라는 문구를 중국 천자의 가르침이나 성은을 뜻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부처의 가르침 은덕이라고 해석하는 모양인데, 369년에는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는 칠지도의 제작년도가 369년보다 훨씬 후대임을 전제한 학설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도교의 철학의 영향이라고도 말한다. 반면에 일본 학계는 기본적으로 양산품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논리의 크나 큰 결함은 형식이 비슷한 도검은 일본 외에서 발견된 적이 없고, 백제에 있었다는 원품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번 학설은 임나일본부설과도 연계된다. 일본서기는 신공 52년(372년으로 비정)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를 헌상하였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칠지도 전면에 새겨진 태화 4년은 369년으로 이 해에 제조되어, 백제가 동진 황제에게서 받고 또 이것이 야마도 조정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일견 합당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동진과 백제의 수교 및 조공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도 일견 타당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가 동진에 조공한 기록 중 제일 이른 것은 근초고왕 27년(372) 1월, 28년(373) 2월이다.
하지만 한국 측에서는 진서에 기록된 백제의 조공은 372년 정월이 처음이므로, 아직 수교관계조차 성립되지 않은 나라(백제의 근초고왕)사여하려고 369년에 미리 글귀를 새겼다 함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링크27년(서기 372) 봄 정월,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28년(서기 373) 봄 2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다만, 일본측 주장처럼 애초에 제후국들에게 보내기 위해 양산된 물건이라면, 일괄적으로 글을 다 새겨놓고, 보관하고 있다가 사여 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2번 학설은 칠지도 전면의 글귀는 동진이 백제에게 하사하기 위해 새겼고, 칠지도 후면의 글귀는 백제가 재가공하여 왜왕에게 상납하기 위해 글귀를 새겼음을 전제로 나온 가설이다. 따라서 전면과 후면의 서체나 각필의 모양 등을 대조해보면 생각보다 쉽게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32]
백제가 동진에서 하사받은 물건을 소장하다가 필요에 의해서 후면을 재가공하고 9월에 일본에 보냈다는 설도 아귀가 딱딱 너무 잘 맞아떨어지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억지스러운 면[33] 이 있기 때문에 후대에 논리를 짜집기한 냄새가 난다.
또한 수서에 기록된 내용을 빌리자면 백제에서 당대 항해력으로 탐라(牟羅)에 도달하기 까지의 시간은 세달이라고 했다. 372년 정월에 도검을 하사 받자마자 3-4개월을 걸려 백제로 돌아오자마자 일본에 모조품을 전달해줄 생각으로 바로 제조해서 제주도보다 먼 일본에 도달 했다면 세달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걸렸을 것이다.
마치 중국 연호라고 확정지어 그것에 매몰 되어 많은 전제와 가설을 쌓고 반박 당할때마다 방어기재로 새로운 설을 추가한 인위적인 느낌이 나는 것에는 부정 할수 없다.게다가 동진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에 편입을 제안하기 위해서 동진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면, 동진과 왜국의 수교 및 통교 기록은 가까운 시일 내에 성사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 413년에 통교했다는 기록[34] 이 발견되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내용과는 별개로, 일본서기에서 칠지도의 재료가 된 철의 산지라고 언급한 곡나철산(谷那鐵山)[35][36][37] 을 언급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만든 물건이란 주장의 신빙성도 문제가 된다. 일본서기조차도 백제 곡나철산이 산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백제가 전달한 물건은 칠지도와 칠자경이 있다. 칠자경[38] 은 현대에 전하지 않기 때문에 철제인지 청동제인지도 모르지만, 칠지도는 철제 도검이다. 백제 곡나철산에서 채굴한 철을 얻었다고 했다. 철로 만들어진 칠지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지칭한단 말인가? 그러나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동진에서 하사받은 칠지도는 따로 백제가 보관하고, 곡나철산에서 채굴한 철을 이용하여 칠지도의 모조품을 만들어 하사했다고 우긴다.
위에서 인용한 일본서기의 칠지도 관련 기록을 조금 더 길게 인용해보자.
앞에서 일본서기의 372년은 마냥 신뢰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는데, 위 곡나철산 내용은 사신이 떠드는 구체적인 진술로 구태여 윤색하여 기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신빙성에 문제는 없다.(섭정) 52년 가을 9월 정묘삭 병자(10일)에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彥)을 따라왔다. 이때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신국(臣國)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수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입니다. 너무 멀어서 7일 동안 가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그 산의 철을 얻으니[39]
영원토록 성조(聖朝)에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백제왕이) 손자 침류왕(枕流王)[40] 에게 "지금 내가 교류하고 있는 바다 동쪽의 귀국은 하늘이 계시하여 세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천은을 베풀어 바다 서쪽을 나누어 나에게 주니, 나라의 기틀이 영원히 견고해졌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닦아 토물을 모아 공물을 끊임없이 바친다면 죽어도 무슨 한이 남겠느냐?"라고 일러두었다. 이후로 매년 끊임없이 조공하였다.[41]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乃謂孫枕流王曰:「今我所通、海東貴國、是天所啓。是以、垂天恩、割海西而賜我。由是、國基永固。汝當善脩和好、聚斂土物、奉貢不絶、雖死何恨。自是後、每年相續朝貢焉。
또한, 칠지도 후면의 문장을 살펴보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造 즉, 백제 왕세자가 제조했다고 하였다. 이것을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르다, 도달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모양이다.[42]
그리고 '왕세자'란 명칭 또한 논란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를 통해서 고대 한반도 왕조의 국왕의 아들을 왕세자라고 칭한 사례가 거의 없다. 왕세자라고 쓴 기록은 칠지도와 광개토대왕비뿐. 그렇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은 백제의 왕세자가 아닌, 백제의 왕과 그의 세자를 통칭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다른 일본 학계에서는 동진이 하사한 물건이기 때문에 태자라는 직위를 낮추어 세자라고 칭했다는 학설 등이 있다. 후자라면 앞서 언급했던, 칠지도가 원래 백제에게 하사한 유물이지만, 백제가 왜의 군사적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시 일본에 헌상했다는 2번 논리밖에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2번 학설을 검토해보면 애초부터 백제왕에게 하사하는 동진의 칼에 구태여 왜왕을 언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앞서 선술했듯이 일본 측에서 받아들이는 2번 학설에 전면은 동진이 백제에게 하사하기 위해 적은 글귀, 후면은 백제가 재가공하여 수령자인 왜왕을 위해 각필했다는 가설을 첨가한 학설이 팽배하다. 확실히 세자의 용례를 따지자면, 중국 황실에서 변방국의 태자를 낮추어 부르는 칭호긴 했다. 이 관점으로 본다면 중국 제조설이 힘을 얻는다.
일본 측 주장에 대한 내용은 링크에 상세하게 나왔다. 다소 기계적인 번역인 느낌이 있지만 이해하기 딱히 어려움이 없고, 상술한 포인트를 모두 언급하고 설명하고 있다. 요지는 칠지도 자체는 동진에서 백제에게 하사 되었으며, 양산품이며, 후면에 각필 되어있는 백제왕세자 組을 근거로 들어 원품(原品)은 따로 있으며,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곡나철산에서 체굴한 철로 복제품을 만들어 건냈다는 것이다. 이 논리의 커다란 문제점은 동진에서 제조했다는 양산품은커녕, 백제가 소장했다는 원품도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동진 하사설과 관련해서 전문적으로 알고 싶다면, 2009년 나온 학술논문 石上神宮 七支刀에 대한 一考察을 참조하기 바란다. 위키 본문의 내용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극히 압축해 놓았으며, 간단히 알아보고 싶다면 여기 참조.
일각에서는 그저 백제가 일본에게 있어 우위의 관계였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 떼를 쓰는 게 아니냐는 냉담한 반응도 있다.[43]
3. 각종 매체에서의 칠지도
모양이 특이하고 일본 고대사의 한 아이콘이 된 것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여러 매체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헬게이트 런던에도 나온 바 있고, 어느 온라인 게임에서는 불 속성의 검으로 나오기도 했다. 물건너의 여러가지 게임이나 매체에서 뭔가 굉장한 무엇인가로 등장한다. 신화의 캐릭터가 사용하기도 한다.
3.1. 한국
- 리젠드의 주된 소재이기도 하다. 근데 단행본에 의하면 연재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는데, 칠지도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작가도 어이가 없었는지 단행본에 '칠지도는 교과서에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에서 고대삼국 유물무기로 등장했다 일반 칠지도와 능력이 해방된 眞칠지도로 나뉜다.
- 만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 지역랭킹 1위로 나오는 영미의 몬스터 딥다크몬이 쓰는 무기가 칠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 게임 던전 앤 파이터에서 85제 레벨의 도로 구현되었다. 도(던전 앤 파이터) 참조.
- 소설 퇴마록의 국내편 중 '초치검의 비밀'에서는 닭우에게 왜를 정벌하라고 하사한 칼이라는 설정이 나온다.
- 만화 보물찾기 시리즈 중 일본에서 보물찾기의 주 소재는 바로 칠지도이다. 일본에서 찾아야 할 보물도 바로 누군가가 조각내어 잘 보존시킨 또 하나의 칠지도. 봉팔이는 이 칠지도를 야쿠자에게 넘겼다가 지팡이에게 매국노 소리를 듣는다.[44]
- 천년의 신화에서는 근초고왕이 들고 다니면서 적군을 썰어버린다. 다른 본영 국왕 영웅과 큰 차이는 없다. 순 외형 차이뿐. 하지만 남들이 밋밋한 그냥 검을 들고 다닐때 은근히 뽀대는 난다. 여기서도 검을 휘두르기 보다는 찌르는 공격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백제의 본영인 남당 입구 옆에도 한 자루가 놓여 있다.
- 임진록2+ 조선의 반격에서는 검을 사용하는 영웅 유닛이 장착 가능한 무기 아이템으로 '쿠사나기의 검'이라는 아이템이 등장하는데, 생긴 건 영락없는 칠지도이다.(뭥미?) 성능은 공격력을 45% 정도 상승시켜주는데...같은 검 아이템인 청홍검이 공격력 100% 증가 + 일정 확률로 일격필살[45] 이라는 멋진 옵션을 가지고 있어서 쿠사나기의 검은 버림받는다. 사실 이건 폭마혈도나 용비늘검 같은 개성 강한 몇몇 검을 제외한 대부분의 검들이 같은 처지...
- 탱구와 울라숑에서도 포스와 관련된 내용에서 잠깐 등장한다.
- 웹툰 더 게이머 - 신살이 가능한 무기로 등장
- 네이버 웹툰 나이트런 - EX 오프닝 75화 마지막 컷에서 세븐이 산반술사 당주 인증 후에 소환한다. 이 때의 칠지도의 모습은 기존의 것과는 다르다.
- 웹툰 신을 죽이는 방법에선 화랑이쓰는 신살구 열쇠검의 7번검으로 포획과 수렵에 특화되어 있다.
- 판타지 수학대전에선 성검 칠지도가 등장한다.
3.2. 일본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보니 일본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다만 칠지도 자체로 나오는 경우보다는 토츠카노츠루기나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등의 고대의 성검을 그려넣을 때 그 모양을 칠지도처럼 그려넣은 경우가 많다. 또한 칠지도를 다루는 일본 매체에선 보통 고대의 신비로운 검이란 무기 이미지를 강조하지, 한국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로 나무, 번개, 불꽃 등을 형상화한 듯한 무기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 가면라이더 블레이드에서 나오는 언데드 중 디어 언데드가 쓰는 칼 두자루가 칠지도와 무척 비슷하다.
- 귀멸의 칼날에서 카마도 탄지로의 회상에서 카마도 탄쥬로가 히노카미 카구라를 출 때 가지고 있던 무속 도구가 칠지도 형태다. 다만 색이나 광택 묘사를 보면 칼이 아니라 그냥 뼈나 나무 종류로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 그림노츠에서 나오는 레어 양손검으로 등장. 이름도 대놓고 칠지도다. 뭔 우연의 장난인지 캐릭터 체인지라는 요소를 공유하는 전국전승에서도 초기작 최종결전때 칠지도스러운 검이 사용되었다.
- 디스가이아에서도 검 계열 무기 중 꽤 강한 축에 속하는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 여신전생 시리즈 및 페르소나 시리즈 등장하는 악마 및 페르소나 스사노오가 든 칼이 칠지도 모양이다. 아마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나 토츠카노츠루기인 듯 하다. 그런데 일러스트를 자세히 보면 톱니가 오른쪽에 3개, 왼쪽에 4개가 있기 때문에 칠지도가 아니라 사실 팔지도다.
- 인왕 2에서도 오니를 쓰러뜨린 전설의 무기로 등장한다. 이름은 소하야마루 평소에는 봉인되어 있어서 단검과 크로스가드로 분리되어있지만 둘을 합칠 경우 봉인이 풀리며 본래 칠지도 모습으로 변한다.
- PS1판 닌자잠입액션게임인 '입체닌자활극 천추'에선 최종보스가 쓴다. 최종보스가 쓴 무기인 만큼 당연히 데미지가 장난 아니게 아프다.
- 별의 커비 시리즈에서, 메타 나이트가 보검 갤럭시아라는 이름의 금색 검을 들고 다닌다. 초창기 삽화에는 칠지도였는데, 설정상으로만 칠지도가 작중 스프라이트는 표현력의 한계로 그냥 칼로 나왔다. 3D 모델링을 사용하기 시작한 별의 커비 Wii 이후로는 제대로 칠지도 모양으로 표현되는데, 이때 어째 옆날이 6개가 아니라 4개로 변경되었고, 이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 사가2 비보전설에서 숨겨진 레어무기로 등장. 라스트 플로어인 천계의 신전 최하층에서 가끔씩 랜덤등장하는 중보스 하니와(埴輪)[46] 를 잡으면 극소확률로 드랍한다. 7히트 판정으로 위력은 절륜하여 힘80이상인 경우 4자리수데미지가 왕왕 뜨지만 역시 공격소비회수가 7밖에 되지 않는다.[47]
- 세키로: 섀도우 다이 트와이스의 보스 앵룡이 들고 나온다.
- 섬란 카구라 시리즈 시노비 버서스 -소녀들의 진영- 에서 비립헤비죠시 학원의 미야비가 사용하는 무기로 나온다.
- 소울 엣지의 ps1판에서 지크프리트 슈타우펜의 추가 무기로 나온다.
- 수전전대 쿄류저의 악역 간부 분노의 전기 도골드는 칠지도 모양의 검을 주무기로 사용한다.
- AIR의 히로인 칸나 비노 미코토가 이터널 파이터 제로의 진 최종보스로 등장할 때 이걸 소환하는 기술을 사용한다. 그리고 칸나를 비롯한 익인의 신앙이 백제와 관련 있다는 설도 있었다.
- 히미코전 코믹스에서 주인공이 각성하면서 소환하는 무기가 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 고전 인기만화 공작왕에서는 강력한 마물을 일격에 끔살시키는 아이템으로 한 차례 등장했다.
- 다크 클라우드2에서 모니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검으로 등장한다. 영문판 이름은 7 Branch Sword. 그런데, 외형상으로는 갈퀴가 5개만 달려 있어서 칠지도가 아니라 육지도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무기 정보 링크
- 파이널 판타지 11에서 플레이어가 사용 가능한 무기로 등장한다. 일본판 이름은 七枝刀, 영문판 이름은 Nanatsusaya 이며, 여기서 스샷을 볼수 있다.
- 파이널 판타지 에어본 브리게이드에서 등장하며, 한글판 이름은 '칠지검'으로 나온다.
- 쿠루마다 마사미 선생의 풍마의 코지로의 성검전쟁편의 적측의 성검중 한 자루로 등장.처음에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이지만 쿠루마다 스토리 답게 주역 파워로 밀리면서 가지가 하나 둘 부러지면서 마지막에는 다 부러지고 사용자도 패배한다.
- 2013년작 배틀물 에로게 환창의 이데아의 주인공 유마의 검이 영락없는 칠지도이다. 그리고 매우 크고 아름답다.
- 모바일 게임 하얀고양이 프로젝트에서 3성 검사 무기들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4성 아닌 2, 3성 무기들은 무기스킬도 없고 오토스킬 구성도 최악이기 때문에 뜨면 바로 갈아버리는 게 다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