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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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436호'''
'''서울 선농단'''
서울 先農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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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면적'''
3\,933㎡
'''지정연도'''
2001년 12월 29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위치'''


1. 개요
2. 상세
2.1. 설렁탕의 시초(始初)와 어원
3. 특징
4. 바깥고리
5. 사적 제436호


1. 개요


先農壇(Seonnongdan)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조선시대 때의 제단(祭壇). 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상세


대한민국 음식 중 하나인 설렁탕의 어원이 생긴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며, 본래 '선농탕(先農湯)' 이라 불렸던 것이 발음이 바뀌어서 설렁탕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선농단에 관한 기록은 신라시대로 신라에 중국의 제례 제도가 들어온 뒤부터 나타나지만, 국가제사로 완전히 정착하기는 조선시대부터다.[1]
조선태조 이성계흥인지문 밖 전농동(現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일대에 제사를 지낸 뒤 임금이 직접 이곳에서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는 시범을 보이면서 농사의 소중함과 농민에 대한 고마움을 알리는 의식이 열려서 임금과 농민들이 함께 밭을 갈며 농사를 지었던 장소로 잘 알려졌다. 왕이 선농단에서 이렇게 농사에 관련된 제를 올릴 때, 왕비는 선잠단에서 역시 잠신(蠶神: 누에치기의 신) 서릉씨(西陵氏)[2]에게 제를 올린 후 백성들 앞에서 뽕을 따서 누에를 치는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태조를 시작으로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농사의 신 염제 신농과 후직을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렸다. 이후에도 임금들이 농민들의 도움 아래 친히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폐지되었다. 이후 1979년부터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제사를 지내다가, 1992년부터 현대에는 매년 곡우 무렵에 동대문구 주최로 이 제례를 재현한다.
7차 교육과정 중1 국어 교과서에 실린 '국물 이야기'라는 수필에 관련 내용이 있어 해당 교과서를 사용하였던 사람들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비슷한 시설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사직단(社稷壇)이 있다. 사직단은 토지신 후토[3]에 제사하는 사단과 곡식의 신 후직에 제사하는 직단으로 나뉜다. 역시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적 제례인데, 제사하는 신의 직능이 확연히 다르기에 낮은 담장[4] 안에 제단이 하나인 선농단과 달리 단이 2개로 확연히 나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제례를 크게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나누었는데, 사직단 제례는 대사인 반면 선농단 제사는 중사였다. 선농단 제사가 격이 더 낮기 때문에 사직단 제사에 비하여 단의 규격도 작고 제사를 지내는 방식도 더 단촐했다.
2015년 서울 동대문구에서 선농단의 역사와 의의를 전시하는 선농단역사문화관을 개관하였다. 선농단에 관해서 알고 싶다면 이 문화관을 먼저 들려보는 것이 좋다.

2.1. 설렁탕의 시초(始初)와 어원


설렁탕의 어원이 선농단이라는 설이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당시 행사 및 제사가 끝나고 나서 참여했던 사람들의 허기와 공복(空腹)을 채우기 위해 우골(牛骨)을 고운 뽀얀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었던 국물 음식을 나눠주었는데, 사람들이 선농단 제사에서 먹었던 탕(湯)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고 불렸고 후에 '설렁탕'으로 바뀌었다는 것. 설렁탕 문서 참조.

3. 특징


현재는 선농단 본단(本壇)과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오래된 향나무가 있으며 문인상이 있다. 최근 개보수를 하면서 카페를 겸한 선농단 역사문화관이 생겼지만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고려대학교고려대역, 안암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제기동역 에서 걸어서 5분거리이다[5] 물론 이 사실을 아는 고대생은 많지 않다. 안암로터리 뒤에 있다고 말하면 '''그런 게 거기 있었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다만 1호선 제기역에서 내려 통학하는 경우에는 학교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알 수밖에 없다. 6호선이 개통되고 제기역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적어지면서 덩달아 아는 사람도 적어진 듯하다.

4. 바깥고리



5. 사적 제436호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선농제는 삼국 신라시대 때부터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이미 농사의 삼신(三神), 즉 선농과 중농, 후농에 제사를 지내는 등 선농제향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도 선농제는 행해졌는데 중국 의식을 따라 정월 해일에 적전(籍田)에서 신농씨와 후직에게 제사를 지냈다. 성종 2년(983) 정월 신미일에는 환구단에서 기곡제를 지내고 같은 달 을해일에 적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불교나 팔관회와 같은 고유 전통에 의존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이 시대의 선농제는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예법에 의거한 선농제가 국가의 주요 전례(典禮)가 되었고 그 의미도 강화되었다. 태종은 선농제의 제향일을 정월 길(吉) 해일에서 경칩 이후 길한 해일로 바꿔 거행하고 친경의계를 제정하였다. 중농․후농제를 폐지하고 대신 삼신을 대표하는 선농제만 모셨다. 태조 1년(1392)에는 한양 근교에 왕이 친경(親耕)하는 전지(田地)인 동적전을 설치하고 경작하였으며 이를 관장하여 경작과 수확을 살피는 고직인 적정령이 내려지고 승(丞)이 설치되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선농제를 위한 제단의 단과 유의 설치 규정이 마련되었다. 세종 재위 당시에는 친향선농의와 친경의주를 제정하고 《국조의례의》, 《길례》에 선농단과 경작에 대한 의식을 규정하였다. 성종은 《국조오례의》의 친경의례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성종 7년(1476)에는 친경대를 신축하고 처음으로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영조 43년(1767)에는 친경의궤를 편찬하고 권농과 고례를 특히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순종 3년(1909)에는 사직단으로 위패가 옮겨지고 선농단 일원이 국유화되면서 제향이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선농단이 위치한 곳에 청량대(凊凉臺) 공원을 조성하고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세워 선농제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말살하였다.

폐지된 제향행사는 1979년에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선농단친목회에 의해 비로소 재개되었으며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에서 인수받아 매년 선농제를 모시고 있다.

※(선농단 → 서울 선농단)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조선시대 성리학적 이념에 의거하여 국가의례를 정비하고, 여말선초부터 시작된 민간신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국가의 제례도 불교/도교/무속적 성격이 짙었고, 민간신앙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형식의 제례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2] 중국 황제 헌원씨의 아내라고 전하는 인물. 전설에 따르면 상고시대에 서릉씨가 처음으로 누에에서 실을 뽑아 비단을 만드는 법을 알아내어 알려주었다 하므로, 중국에서는 서릉씨를 잠조(蠶祖)이자 잠신(蠶神)로 숭앙했고 조선도 이를 받아들였다.[3] 중국의 토지신이다.[4] 한자로 유(壝)라고 쓰는데, 제단을 두르는 담장을 뜻한다.[5] 1번출구에서 나와 바로 보이는 두산베어스타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주택가 안쪽길로 직진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