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농

 



'''염제(炎帝)
신농씨
神農氏
'''

'''시호'''
신농 열산씨(神農 烈山氏)
'''제호'''
염제(炎帝)
''''''
(姜)
''''''
신농(神農)
'''외조부'''
유교씨(有嬌氏)
'''아버지'''
소전(少典)[1]
'''어머니'''
여등(女登)
''' 고향'''
천수(天水)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3218년 4월 26일 ~ 기원전 ?년
'''재위 기간'''
? ~ ? (140여년)
1. 개요
2. 상세
3. 생애
4. 유망과의 관계
5. 후손
6. 제사
7. 미디어에서의 신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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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남방을 다스리던 신이자, 소전의 아들이다. 또한 농업, 의약, 약초[2]의 신. 그리고 염제의 염 자가 불꽃 염(炎)인 것에서 알 수가 있듯이, 을 관장하는 신이며, 같은 삼황오제이자 오제의 첫 번째인 황제 공손헌원과 마찬가지로 태양신이기도 하다. 흔히 신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 부족 사회에서는 열산씨, 여산씨, 연산씨, 저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2. 상세


의 머리[3]를 한 반인반수로 염제(炎帝)[4]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인간에게 농사를 본격적으로 알리고, 가르친 것이 있다. 그래서 이름(神農)이 농사(農)의 신(神)인 듯하다. 그리고, 최초로 나무를 깍아 호미를 만들고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호미를 만든 농기구의 발명자이기도 하며, 횃불 또한 처음으로 발명하고, 처음으로 우물을 파낸 신이기도 하며, 도자기 굽는 법, 야금술, 옷 짜는 법 또한 발명했고, 물물교환이 가능한 시장 또한 만든 인물이라고 한다. 이것 말고도, 인간아버지라는 존재를 모르고, 오로지 어머니만을 알 당시,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개념 또한 만들어내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차를 즐기는 중국 문화의 시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오제 중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황제 공손헌원과 더불어 중국인의 시조로 여겨진다고 한다.
신농(神農)은 중국 고대 삼황(三皇)중의 하나로 흔히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라고 불린다. 본명은 강석년(姜石年)이며, 별칭으로는 열산씨(烈山氏), 염제주양씨(炎帝朱襄氏)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농씨는 염제신농국을 세웠고 나라는 그의 자손들로 이어져 8대 520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다. 신농씨는 황제헌원 이전에 한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백초의 풀을 직접 맛보아 해독을 하였으며, 오늘날 한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한의학의 최초의 저서로 유명한 '신농본초경'을 저술하였다.
염제신농씨는 5300년전 중국 섬서성 기산현을 흐르는 강, 강수(姜水)지역에서 자라 지명을 따서 강씨(姜氏)를 득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치우(蚩尤)천왕과 춘추시대 제나라의 왕인 강태공(姜太公)도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염제신농씨는 세계 강씨(姜氏)의 시조이다. 염제신농씨는 황제헌원과 더불어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베트남 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강씨 웅왕왕조가 베트남을 2,000년간 통치함.)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는 중국의 천수강씨(天水姜氏), 한국의 진주강씨(晋州姜氏), 중국 한족(漢族) 고씨(高), 한국 및 중국 범양노씨(盧), 여(呂), 오(吳), 중국 한족(漢族) 허씨(許), 평해구씨(丘,邱), 강(强), 온양 방씨(方), 중국 제양당 정씨(丁), 주(朱), 장(章), 사(謝), 제(齊), 습(習), 악(岳), 시(柴), 하(賀), 경(景), 신(申), 향(向), 가(柯), 뢰(賴), 상(尙), 중국 돈황 홍씨(洪)(남양홍씨 당홍계), 초(焦), 기(紀), 최(崔)(중국)[5]좌(左), 역(易) 등 통합 247여개 성씨가 있다.
이렇듯 신농씨는 의술과 농업에 관련이 깊은 신이며, 그래서인지 백성들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농사와 한의학이 신농씨가 남긴 업적이라 하여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 칭하며, 농촌에서는 신농유업이라는 구절을 쓴 깃발을 만들고, 한의원에서는 신농유업이라고 글씨를 써서 걸어두기도 했다. 요즘은 보기 힘든 모습이다.
경제에 관련된 신이기도 하다. 신농씨가 시장이라는 것을 두어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했는데, 태양이 머리 위에 떴을 때 시장이 서도록 하고 얼마쯤 지나면 끝나도록 하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농경체계가 도입된 후로 사유재산과 계급 분화가 생겨났다. 신농의 설화는 농경체계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 변화가 반영된 것.
황제 다음으로 중국 한족의 시조로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염제이다. 한족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 외에도 염제와 황제 모두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염황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화민국 국기가에서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世冑)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계수나무와 얽힌 염제의 일화도 있다. 염제는 오강이란 이에게 신선 수련을 시켜준 적이 있었는데, 행실이 나쁘기로 유명했던 그의 조카가 오강의 처를 겁탈해 자기의 사생아 둘을 임신시키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오강이 염제의 조카를 죽이자 화가 난 염제는 오강으로 하여금 달로 가 그곳에 있는 계수나무를 배어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오강은 이를 받들어 달로 가 계수나무를 배려 하지만 그 계수나무는 배거나 찍어내는 즉시 상처난 자리가 회복되어서 오강은 영원히 그 계수나무를 도끼로 찍기만 하는 형벌을 받게 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오강의 아내가 달에서 염제의 형벌을 받는 오강을 생각해 자식들을 달로 보내는데, 오강의 아내 겁탈범(염제의 조카)의 아이들이기도 한 자식들은 자신들을 알아보면 오강이 자신들을 해할까 무서워서 두꺼비와 옥토끼로 형상을 바꾸고 오강의 곁에 머물러줬다고 한다.[6]
후손인 강태공강족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신농도 원래는 강족이라는 것이 된다. 신농이 태어난 천수는 현재 간쑤성 소속인데, 강족이 분포하는 지역이 간쑤성 동남부와 쓰촨성 쪽이다. 게다가 천수는 훗날 춘추전국시대 때 중국에서 가장 서쪽 변방에 있던 진나라보다도 더 서쪽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7] 현대 중국의 천수 강씨나 한국의 진주 강씨, 함양 여씨 등의 경우는 강태공을 비조로 삼으므로, 둘 다 강족 성씨라고 해야겠으나, 강태공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한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이고, 또, 이후 한족에 동화되기도 했고, 한국의 강씨와 여씨 같은 경우는 이미 한반도로 유입된 지가 천 년이 넘었으므로 민족을 따지기가 무의미하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시대 이후로 농신(農神)으로서의 신농씨과 후직씨(后稷氏)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뜬금없겠지만 설렁탕과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는 '선농단'이라는 제단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봄이 되면 임금이 직접 참석해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임금도 이 때만은 백성들과 함께 직접 소를 몰고 밭을 가는 의식을 했는데 이를 친경(親耕)이라 하였다. 제사와 친경이 끝나면 임금은 백성들에게 술과 소뼈를 푹 고운 '선농탕'을 내렸는데,[8] 선농탕의 이름이 바뀌어 설렁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곡식의 신이 바로 염제 신농을 가리킨다.'''
중국 창세 신화에 등장하는 다른 신인 동제 태호 복희씨, 서제 소호 금천씨, 북제 전욱 고양씨와 비교해서 황제와의 전투가 매우 많은 편인데, 소호와 전욱은 황제의 후손이자 후계자이므로 황제와 싸운 기록이 있으면 그게 더 웃기긴 하다.
신화에서 신농과 헌원이 형제로 나올 때가 많은데, 둘의 형제설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서적인 《국어(國語)》<진어(晋語)>에서 친형제로 날조한 것이다. 이후 이복 형제설, 이부 형제설 등 각종 이설이 발생했으며, 중국에서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어쨌든 형제설을 정설로 보게 된다.
일단 신농씨 스스로가 판천에서 헌원과 싸워 패배했고, 그의 후손인 치우와 그의 형제들, 공공, 그의 신하인 형천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단순히 우주의 지배자인 황제에게 패하여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에 대한 서민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담고 있지 않았을까. 과연 치우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던 때, 그는 염제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였다. 또한 중국에게 지속적으로 침략당했던 베트남의 설화집인 영남척괴열전에서도 베트남 민족의 시조인 낙룡군을 염제의 후손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를 보좌하는 신하로 불의 신 축융(祝融)이 있다. 축융은 여름을 관장하기도 하며 용맹 또한 대단했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그의 용맹은 치우나 형천과는 조금 다른 쪽으로 묘사된다. 대표적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신 공공을 참했다고 하는데, 이미 모시는 신인 신농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반기를 든 신농씨의 신하들과는 달리 황제와의 전투 기록이 달리 남아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축융 항목 참조.

3. 생애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女登)은 제후 유교씨(有嬌氏)의 딸이자 제후 소전씨(少典氏)의 비(妃)로, 어느 날, 그녀가 화양(華陽)으로 나들이 갔다가 신비스럽게 생긴 용(龍)을 보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데, 그 후 임신을 하여 열 달이 지나자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반인반신을 낳았으니, 이 아이가 바로 신농이었다. 『진주강씨대동보(晋州姜氏大同譜)』에는 기원전 3218년 4월 26일에 천수(天水: 현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날은 중국에서 ‘신농대제탄신(神農大帝誕辰)' 등으로 부르며[9]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외에도 기원전 28세기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10]
전설에 의하면, 그가 갓 태어나자마자 주위에는 저절로 아홉 개의 우물이 생겨 불이 솟아 올랐다고 한다. 그 우물의 물을 길으면 나머지 여덟개의 우물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가 인류에게 오곡의 파종법을 가르치려고 할 무렵 하늘에서 수많은 씨앗이 떨어졌다. 그는 이것을 모아 밭에다 심었는데, 이것이 인류가 먹는 오곡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어날 지 사흘밖에 안 지났음에도 저절로 말을 하고 닷새 만에 걸었다고 한다.
이후 나라를 세웠는데 『춘추좌씨전』에서는 그가 열산(烈山, 현 허베이 성 수주)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열산씨(烈山氏) 혹은 여산씨(厲山氏)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진(陳: 현 허난 성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에 곡부(曲阜: 현 산둥성)으로 옮겨 140여년 간 통치했다. 신농이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해서 다투지 않았고, 위세는 강했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형벌을 제정했지만 사용하지 않았으며, 법은 번잡하지 않았다고 한다.

4. 유망과의 관계


유망(楡罔)은 염제 신농의 8대손인데, 실제 중국 문헌에 판천(阪泉)에서 전쟁을 하고 황제 헌원과 동시대에 살았던 신농은 유망이다. 즉 중국 문헌에서는 신농씨의 후예 유망을 신농과 동일한 인물로 기술 하고 있다. 최초 염제 신농이 출연한 시기가 기원전 3218년이고, 황제 헌원이 즉위한 해가 기원전 2697년으로 서로 5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서로 동 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전해지는 신농씨의 계보는 제1대 염제신농(炎帝神農)부터 시작하여 2대 제괴(帝魁), 3대 제승(帝承), 4대 제명(帝明), 5대 제직(帝直), 6대 제리(帝厘), 7대 제애(帝哀), 8대 제유망(帝楡罔)까지로 전해 지며 황제 헌원에 의해 유망이 판천에서 패하여 신농씨의 국가는 사라진다.

5. 후손


5천년 전 중국 산시 성(섬서 성) 강수에서 자라 지명을 따서 강씨(姜氏)를 득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키백과에서는 강씨가 현존하는 성씨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11] 신농으로부터 이어지는 성씨가 바로 중국의 천수 강씨이며, 천수 강씨에서 갈라져 나온 한국의 진주 강씨도 신농의 자손이 된다. 강태공도 염제 신농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12]
신농의 가계(家係)에 관해서는 당(唐)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를 보충하여 쓴 「삼황본기(三皇本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신농씨는 분수씨(奔水氏)의 딸인 청발(聽詙)을 들여 비(妃)로 삼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제괴(帝魁)를 낳았다. 그 뒤를 이어 제승(帝承), 제명(帝明), 제직(帝直) 등이 차례로 자리를 이어받아, 8대(代) 530년 동안 계속되다가 황제 헌원씨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주(州)·보(甫)·감(甘)·허(許)·희(戲) 등이 강성의 후예로서 제후가 되고 사악(四嶽)을 나누어 맡았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포후(甫侯)·신백(申伯)은 왕실의 지혜로운 재상이 되었고, 제(齊)·허(許)는 제후의 서열에 끼어 중국에서 패(覇)라 일컬어졌다.
위 기록을 보면 헌원씨와 전투한 것은 신농 본인이 아니고, 신농이 죽은 후에 신농을 따르는 세력과 그들을 통솔하는 강씨 왕조가 새로 일어난 세력인 헌원씨와 싸운 것이라 보인다. 온양 방씨의 비조인 방뢰의 아버지가 신농씨의 10세손인데 제호가 유망황제(楡罔皇帝)라는 점을 보아 헌원이 일어나고 나서도 신농의 세력이 잔존하여 신농의 후손인 강씨 왕조와 헌원의 후손인 공손씨 왕조가 서로 대립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이 세력이 패배 후 헌원의 세력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신농이 헌원과 직접 대치했다면 기원전 28세기에 태어났다는 설이 맞년, 이 경우에야 헌원과의 즉위도가 들어맞는다.
염제신농씨는 황제헌원과 더불어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베트남 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강씨 웅왕왕조가 베트남을 2,000년간 통치함.)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는 중국의 천수강씨(天水姜氏), 한국의 진주강씨(晋州姜氏), 중국 한족(漢族) 고씨(高), 한국 및 중국 범양노씨(盧), 여(呂), 오(吳), 중국 한족(漢族) 허씨(許), 평해구씨(丘,邱), 강(强), 온양 방씨(方), 중국 제양당 정씨(丁), 주(朱), 장(章), 사(謝), 제(齊), 습(習), 악(岳), 시(柴), 하(賀), 경(景), 신(申), 향(向), 가(柯), 뢰(賴), 상(尙), 중국 돈황 홍씨(洪)(남양홍씨 당홍계),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 등 통합 247여개 성씨가 있다.

6. 제사


중국에서는 기원전 3218년 4월 26일에 태어났다는 설을 받아들여, 음력으로 4월 26일이면 신농을 모신 여러 사당에서 제사를 올린다.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매년 경칩 후 해일(亥日)에 임금이 직접 선농단에 나아가 선농제(先農祭)를 지내며 농업신인 신농과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였다. 농촌에서는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될 무렵이면 그 마을의 상징이며 농신(農神)인 신농씨와 관계된 농기(農旗)에 대한 고사를 지냈다. 이때 그 기폭에는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나 ‘신농유업(神農遺業)’, ‘신농사명(神農司命)’ 등의 글자를 넣어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하였다.

7. 미디어에서의 신농


무쌍 오로치 시리즈신농 항목으로.
후지사키 류의 봉신연의 외전에 등장. 여와, 복희 등과 함께 살아남은 외계인중 1명. 신농, 수인, 축융은 자연과 동화되었기에 본편에선 등장하지 않았다. 갑자기 복희를 찾아와 치계정 공선에 의해 미래가 바뀌어 세계가 멸망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며 바로잡아 줄 것을 부탁한다. 어찌어찌 해결하자 다시 찾아와 수인이 남긴 빅뱅발생보패와 축융이 남긴 지구멸망보패의 관리를 부탁하고 사라진다.
이현세천국의 신화에서는 소 머리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 그려진다. 소대가리(....)를 나름 재해석해서 이마의 일각과 월각이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와 마치 뿔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그렸다.
[1] 참고로 소전의 친아들은 아니다. 생애 부분 참고.[2] 약의 풀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라는 약재와 한방의 고서인 본초강의 기초를 단진 인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신농 본인이 농사를 직접 가르치는 등 여려가지 업적을 토대로 역사적으로 재해석을 해 본다면, 신석기 시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3] 염제 신농이 관장하는 분야 중에 "농업"이 있다라는 것을 생각을 해보면, 염제 신농이 몸은 인간인데, 머리가 소인 것은 이러한 이유인 듯 하다.[4] 엔테이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炎帝=エンテイ.[5] 우리나라의 최씨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최씨는 신라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6] 이 이아기는 월궁항아전설과도 연계된다. 오강과 항아가 함께 나오는 전설에 따르면 항아는 염제의 형벌로 인해 오강이 배게 된 계수나무가 절대로 벨 수 없는 물건임을 알았으나 그녀 역시 달 말고는 갈 데도 없는 데다 오강을 도울 수도 없는 일개 신선의 입지였기에 오강을 도와줄 수도 없고 해서 그저 안타까워했다고 한다.[7] 다만, 사실상 기원전 30세기까지 올라갈 정도면 한족이나 강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탄생하기도 전, 훨씬 아득한 옛날이다. 상나라 때 오랑캐로 취급된 강족이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지긴 했지만, 한족이라는 통일된 민족관을 가지기 시작한 때가 겨우 기원전 2세기, 전한의 건국 때였다. 진나라조차 서융이 꽤 큰 비중을 차지했고, 초나라는 아예 묘족 계통의 국가였다. 한족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족은 혈통으로 묶은 민족 계통이 아니고 오랜 세월 여러 민족이 어우러져 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집단으로 받아들여야 맞다.[8] 아무래도 좋을 여담으로 먹는 사람이 많다보니 모인 사람들에게 다 줄때까지 선농탕에 계속 물을 타서, 나중엔 거의 맹물이 되었을 거라 한다(...)[9] 통일된 명칭은 없고 적당히 부르는 듯.[10] 헌원이 기원전 27세기 사람인 것을 보면 이쪽이 맞을 수도 있다.[11] 그보다 먼저 복희의 풍(風)씨가 생겼지만 그것이 기록된 시점으로부터도 한참 전에 사라져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12] 증산계 종교의 교조인 증산 강일순이 진주 강씨였는데, 그래서 자기가 말한 종교적 주장에서도 신농씨에게 특별한 위상을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