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중국 신화)

 



'''황제(黃帝)
헌원씨
軒轅氏
'''

'''묘호'''
'''태초조(太初祖)'''[1]
'''시호'''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
'''제호'''
황제(黃帝)
''''''
공손(公孫), (姬)[2]
''''''
헌원(軒轅)
'''아버지'''
소전씨(少典氏)[3]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재위 기간'''
? ~ ?
1. 소개
2. 상세
3. 황제릉
4. 황제기원
5. 논란
6. 기타
7. 대중문화 속의 황제
8.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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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군주. 소전의 아들. 도교이자 현효청양의 아버지.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손헌원(公孫軒轅),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 헌원씨(軒轅氏)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유웅씨(有熊氏)라고도 하고 제홍씨(帝鸿氏)라고도 부른다.[4]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언급되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오제의 필두. 황보밀의 《제왕세기》에서는 삼황의 첫 번째로 언급된다. 《전국책》, 《주역》, 《예기》, 《회남자》에서는 오제의 세 번째, 나머지 기록에서는 오제의 첫 번째이다. 사후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태초조(太初祖)로 추존했다.
서양제우스가 있다면 동양엔 황제가 있다는 말 그대로, 중국 신화의 주신이다. 한국의 단군처럼 중국의 한족들이 전설적 시조로 가장 흔히 일컫는 존재이기도 하다. 황제에 염제 신농까지 포함해서 염황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화민국 국기가에서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世冑)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따르면, 황제 헌원씨는 기원전 2717년에 태어나 스무 살이 되는 기원전 2698년에 즉위하였고 119세 되는 기원전 2599년 천제(天帝)가 보낸 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2. 상세


황제는 화하(華夏)라는 실체를 구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임금으로, 사마천은 삼황오제에서 삼황 부분은 전설이라고 치부해 아예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오제부터는 본기(本紀)로 저술했으므로 이 부분부터는 역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5] 그리고, 황제라는 칭호는 황천상제(黃天上帝)를 줄인 것으로 '천상의 위대한 신'이란 뜻이다. 이에 걸맞게 천상과 지상을 호령하는 위대한 신이자 군주라고 한다. 끝없는 싸움과 투쟁의 결과로 지배자가 되었기에, 중국에서 황제 공손헌원을 묘사할 때에는 한 손에 항상 헌원검[6]이라고 하는 칼을 쥔 전쟁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황제 헌원은 인간이 아닌, 확실히 신(神)이다. 제(帝)는 본래 인간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고대 동아시아의 종교는 가문의 조상을 다른 종교의 신에 상당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구조(가부장이 제사장의 역)였는데, 이 조상신을 부르는 이름이 제(帝). 좀더 정확히는, 상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왕가의 자(子)성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帝)라고 불렀다.[7][8] 따라서 노란(黃) 제(帝)라고 불리는 존재가 본래 인간이 아님은 명백하다. 다만 처음부터 신적 존재로 섬겼을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책세상에서 펴낸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에 나오듯이 헌원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덧칠되었다.《포박자》에 보면 황제가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중에는 청구국(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다. 참고로, 은나라를 엎고 개국한 주나라의 희(姬)성은 자신들의 조상신을 천(天)으로 칭하며 하늘에 대입하고, 이것으로 제(帝)를 대체하는 프로파간다를 행하였다. 천자라는 명칭도 이에서 유래.
그리고, 황제 공손헌원은 신화적으로 창조신이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만들어낸 발명의 신이라고 한다. 신화상에서의 황제, 즉 신으로서 황제 공손헌원은 얼굴이 4개 있어 동서남북으로 자신의 땅을 바라볼 수가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에는 많은 동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황제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왕위를 내려놓고 수련하여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단순히 얼굴이 넷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에 누를 황(黃)자가 들어가는 신답게 노란 용, 즉 황룡의 모습으로도 묘사되곤 한다. 노란색은 황제가 흙의 기운을 지녔기 때문이고, 용이기 때문에 모든 기상현상 그 자체를 마음대로 주관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즉, 황제는 비바람 등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 황제는 전설 속 곤륜산에서 머무는데, 천계와 곤륜산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황제는 모든 신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귀신과 요괴들을 지배했다. 천하를 순시하다 동해 바닷가에 이를 때 백택이라고 하는 짐승으로부터 1만 1520종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을 배웠기에 이후로 귀신과 요괴들은 전처럼 마음대로 날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사기》의 기록은 신이었던 헌원을 위대한 인간 황제로 역사화했다.《사기》에 따르면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였으며, 남들이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때 이미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근근히 쳐들어오면 막고, 나면 먹고 안 나면 굶는 느슨한 공동체 생활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 방패, 수레(바퀴)[9], , 글자, 거울, 60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안 만든게 없다는 인물. 심지어 그의 스승들과 함께 한의학을 정리한 것이 황제내경이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훨씬 뒤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책이라는 게 정설이다. 거기다 내용도 상당 부분이 헌원이 신하이자 스승 기백천사에게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구조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 공손헌원에게는 아들 25명이 있었고, 그 중 14명이 황제 공손헌원의 성을 이어받아 수천 년 후 황하 평원을 가득 채울 부족이 되었고, 중국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역시 삼황오제이자 황제의 뒤를 이어 신들을 지배하게 된 전욱, 동해의 신 우호와 북해의 신 우경, 홍수를 다스린 곤과 우 부자 등 이름난 신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중원의 한족과 변방의 일부 종족들이 바로 이 황제의 후예로, 이 때문에 황제 공손헌원은 중국인의 시조가 된다고 한다.
그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세력은 농업의 아버지인 염제 신농(神農)이었고, 노쇠한 신농의 나라를 북동에서 내려온 치우(蚩尤)의 세력이 늘 노리고 있었다. 황제는 신농과의 주도권 싸움을 3차례 벌여 세 번 다 승리하고 거대한 연맹체를 구성, 치우와의 일대 결전을 벌여 결국 탁록 땅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다.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의 죽을 날을 택하고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 한다. 그 때 신하들이 같이 올라가려고 들어 용을 붙잡고 수염이 뽑혀서 떨어지는 등의 추태를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내는 총 4명이 있었다. 그 중 조강지처이자 본부인이며 첫번째 부인은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인데,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고 황제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네 번째 부인은 모모(嫫母)라고 하는 여자인데 외모가 추했으나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수시로 바람도 피고 다니며 결혼 생활을 개막장으로 해서 아내인 헤라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달리, 황제는 바람도 피지 않았고 건전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황제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설령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첨삭이 있었을 것이다. 단 그의 존재가 후세에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인물이 실제 있었다기 보다는그런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제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워낙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동양에서 학술적 내용의 연원을 고대에서 찾는 경향이 있어 각종 학파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황제는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도 소유했었다. 그중에 현주(玄珠)라는 검붉은 구슬이 있었는데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신통한 것이었으나 황제가 분실했다고 한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은 황제가 집필한 서적이라고 전하는데, 모호한 말로 쓰여서 혹자는 병법서, 도사들은 도가의 경전, 문인들은 유가의 말을 적은 책이라 여겼다고 한다.

3. 황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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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옌안 시에는 황제의 무덤이 실존하고 있다. 물론 전설에서 황제는 등선했다고 전해지므로 이 무덤은 의관총이다.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전국 중점 문물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분류상 고묘장(古墓葬)의 1호로, 달리 '''천하제일릉'''이라고도 부른다.
허난성 링보현에도 황제릉이 존재하는데, 2020년 현재 바이두 백과에 황제릉을 검색하면 이 쪽이 나온다.

4. 황제기원


황제가 처음 즉위했다고 하는 기원전 2698년을 원년으로 하는 황제기원도 청나라 말기에 사용되기도 중국에서 더러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일제시대 즈음해서 중국의 지식인들이 (당시에 식민지였던 조선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인 일본에 유학을 오곤 했다.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쓰곤 했다. 중국 지식인들이 일본의 황기를 보고 자극을 받아 중국판 황기를 창안해냈으니 바로 '황제기원'이다.
처음 황제기원을 주장했을 때에는 원년을 어느 해로 정할지 수백 년씩 널뛰기를 하였으나 1905년부터 기원전 2698년을 원년으로 하는 것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황제기원의 원년은 즉위한 해보다는 60갑자가 시작된 이듬해(기원전 2697년)가 더 좋다는 주장이 퍼져 이를 따른다. 기원전 2697년은 최초의 상원갑자(上元甲子)라고도 전하기 때문에, 옛 중국인들이 상당히 인위적으로 정한 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황기#s-2.1 항목 참고

5. 논란


헌원은 천자(天子)로서 사마천 사기에서 '오제본기'의 시작이자, 중국 한(漢)족인 화하족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기록들도 존재하는 데, 사기의 삼가(三家) 주석「사기집해」에는 응소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헌원의 직책에 대해 운사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昔者黃帝氏以雲紀 故爲雲師而雲名

옛적에 황제씨는 구름으로써 관명을 기록하였다. 고로 백관과 사장을 모두 운자로 이름하였다.

춘추좌전 '소공17년'

사기 '오제본기'에도 헌원의 직책이 운사라고 나온다.또한 상고시대의 기록인 '금문'을 보면 헌원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없다.[10] 중국 고대 왕의 계보는 신농으로 부터 시작하며 신농-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백익으로 나온다. 또한 진나라 진시황제나 한나라 태조인 유방이 전쟁 전에 헌원이 아닌 치우에 제사를 지낸 기록들이 나온다.# [11]
그래서 헌원과 치우에대해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6. 기타


  • 사자자리레굴루스를 중국에서는 '헌원대성'이라고 부른다.
  •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한나라 건국을 도운 최초의 셀러스티얼 '황제'가 존재하며, 황제가 쓴 병법서가 있다고 한다. 헌원씨 황제에서 모티브를 딴듯. 어쩌면 셀러스티얼 황제가 헌원씨 황제일지도 모른다.
  • 여신전생 시리즈에서는 황제라는 이름으로 영걸 혹은 영웅 종족의 악마로 등장 한다.
  • 전생검신 - 문서 참고.

7. 대중문화 속의 황제


  • 공손헌원 - 소설치우천왕기
  •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 용의 이야기에서 중국 문명의 고전 시대 하위 신으로 등장한다.
  • 천국의 신화 - 2부의 치우의 라이벌로 나온다. 서왕모의 아들로서 반고[12] 의 손에 자란다. 서왕모의 아들 답게 선천적으로 동물과 소통할 줄 알고, 무예에 매우 능통하다. 치우와 7년간 대립 결과 거의 파멸할 뻔하지만 치우가 흑화로 인해 가신들에게 살해 당한 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서 평화로운 시대를 이끈다고 에필로그에 언급된다.
순수한 선인도 악인도 없는 해당 작품 답게, 헌원은 악인임에도 의외로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황토인의 군주로 추대되자마자 자신에게 극진한 예를 다 하는 반고에게 '우리 친구인데 왜 그러냐'며 끝까지 반고를 신하라기보단 오랜 친구로 대했고,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정조를 지키는 히로인을 죽일 수 있음에도 차마 죽이거나 매몰차게 대하지 못 했다. 또, 전쟁이 끝난 후 내분의 씨앗을 없애고자 반고를 죽일 때[13], 반고의 마지막 부탁을 약속하고 그가 죽자 매우 슬퍼하며, 냉혈하면서도 타인과의 약속을 중요시 여기고, 사람 짐승 가리지 않고 허물없이 대하는, 잔인한 악인이면서도 자신의 백성들 앞엔 모범적인 군주인 캐릭터이다.

8. 관련 항목


[1] 왕망 추존.[2] 주나라의 왕실과 동성 제후들은 자신을 황제의 후손이라 여겼다.[3] 그의 아내는 유교씨(有蟜氏)라고 하는 여자로 염제의 친모라고도 한다. 이런 기록대로라면 황제 공손헌원과 염제 신농은 형제이다. 유교씨는 어느 날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천추성(天樞星, 두베Dubhe)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감응을 받아 임신하여 황제를 낳았다고 한다.[4] 여기서 씨(氏)는 중국 상고시대 인물들에게 상투적으로 붙이는 호칭이다. 그래서 황제와 맞서 싸웠다는 치우를 치우씨(蚩尤氏)라고도 부른다.[5] 사실 사마천도 이 부분에서는 고민이 많았다. 사기는 본디 서주 시대부터 비로소 진정한 역사 시대로 간주하지만, 유교적인 정통성 계승의 관점에서 최소한 한 가지 구심점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오제는 예외적으로 본기를 서술, 역사 시대처럼 묘사했다.[6] 황제 공손헌원의 칼로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으로 만든 칼이라고 한다. 별거 아닐 수가 있으나, 그 당시에 강한 철이라는 것은 농업과 전쟁의 필수요인이었기에 황제의 검은 전쟁은 물론 농경에도 크나큰 영향력을 미쳤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물건이다.[7] 사기의 은 본기에서도 상 왕조의 태조 탕왕은 시조인 설의 14대손이고, 설의 아버지는 오제 중 제곡, 제곡의 증조부가 황제로 기록되어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8]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관우. 삼국지의 그 관우 맞다. 후에 신으로 봉해진 관우의 별칭은 관제, 관성대제 등으로 제의 호칭을 땄다. 왕족도 아닌데 제란 호칭이 붙을 수 있는 한 가지 사례이다..[9] 이름 헌원(軒轅)의 한자에 '수레 거(車)'가 들어간 것이 이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10] 근데 이건 치우도 마찬가지다.[11] 하지만 애초에 헌원은 싸움잘한덕에 이긴것이 아니며 관우 또한 결과적으론 패배한 장군인데도 후대에 추양받은걸 보면 이상한것이 아니다.[12] 인간의 삶과 사람의 몸을 갈망하던 고대 푸른늑대의 후손으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의 중간단계인 늑대인간의 외형을 가졌다. 매우 영특하고 냉정하여 헌원을 강대한 군주로 가르쳤다.[13] 헌원의 스승이자 충신이며 친구인 반고는 정치적으론 헌원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만한 측근이었다. 때문에 헌원은 반고가 가르쳐 준 대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뿌리부터 뽑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