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120호

121호

122호
고성 내산리 고분군
사직단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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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社稷壇


분류번호
대한민국 사적 제121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89 (사직동)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면적
43,587㎡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건립시기
조선시대, 1395년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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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주변 및 근린시설
2.1. 단군성전(檀君聖殿)
2.2. 황학정(黃鶴亭)
3. 사직단의 중요성
4. 지방 사직단
5. 기타
6.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의 사당 목록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제사유적.
조선 태조 이성계가 옛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경(지금의 개성특급시)에서 한양(지금의 서울특별시)로 천도(遷道)한 후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태조 4년(1395) 1월 29일 영조하기 시작해 같은해 완공한 제단(祭壇)으로 인왕산 아래에 있다.
1922년 일제가 공원으로 개조해버렸으나, 일부 시설을 해방 후 복원하여 문화재 보호시설로 지정했다.[1]
경복궁 서쪽(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근처)에 있다. 주변에 서울특별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2][3][4]과 시립 도서관 등이 있으며, 매동초등학교, 배화여자중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대학교 등의 학교들도 있다. 시립도서관과 배화여고 사이에는 교직원 연수원도 있었다.
주로 노인층들이 들르고 머무르는 곳이라 하여 '실버들의 쉼터' 라는 별칭도 붙었다.[5] 이 외에도 단군(檀君)의 영정과 모형상을 모셨다는 단군성전(壇君聖殿)과 본래 경희궁에 있었다가 인왕산 아래로 옮겼다는 국궁(國弓) 터 황학정이 있다. 공원 광장에는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 동상이 있다.
조선왕조 시절에는 임금과 왕족, 관련 직무를 맡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聖域)이기 때문에, 양반조차도 쉬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22년 일제가 사직단을 모두에게 개방된 공원으로 조성하면서부터 성역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제단 일부도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심지어는 현 단군성전이 있는 자리에 신사(神社)를 지어서 일본인들은 물론, 조선인들도 일제의 지독한 협박과 강요 속에서 신사참배를 하느라 왕래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신사는 철거되었는데, 1968년에 공원 내에 50 m 국제 규격 실외 수영장(파라다이스 수영장)#과 사대 10여개 규모의 10 m 공기총 사격장[6]이 들어섰고, 파라솔 달린 탁자를 여러 개 놓은 (현재도 있는) 매점을 설치하고, 공원에 사진사도 상두하는 등 여전히 유원지, 공원으로 격하, 운영되었다.[7]
이후에 사격장과 수영장은 시설이 노후되었고 적절지 않은 시설이라는 여론에 의해 철거되었다. (안내도에서 정문 반대편 단군성전 부근이 수영장-사격장 자리) 지금의 사직로 포장공사 등으로 인해 고종이 세웠다는 사직문(社稷門)이 본래의 위치에서 밀리기도 했다. 신사 자리에는 단군성전이 세워져 매년 10월 3일 개천절이 되면 이곳에서 단군에게 제례를 올린다.
사직공원은 인근에서 운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부지를 가진 유일한 공원이라 많은 주민들이 낮밤으로 애용해왔다. 또한 경내에는 종로도서관, 서울시립 어린이도서관이 있다. 이 두 건물은 각각 서울 최초의 도서관, 한국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2012년 종로구로부터 관리 권한을 인계받았고 조선시대 제단을 (상상해서) 복원하겠다는 이유로 운동장을 포함한 사직공원을 폐쇄했다. 또한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까지 허물고 사직단을 조선시대 규모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주민들과 뜻 있는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담을 설치하는 등 일부만 손을 보는 데 그쳤다. 이 사업은 2027년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시민공원으로 쓰이던 사직공원을 조선시대풍의 복제 건축물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사단법인 '예올'이 주도적으로 해왔다. 예올은 현대중공업 정몽준 명예회장의 부인 김영명 이사장으로 있는 조직이다.

2. 주변 및 근린시설



2.1. 단군성전(檀君聖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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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공원 북서쪽 인왕산 등산로 입구 부근에 위치해 있는 단군왕검의 숭모시설. 원래는 사직단의 성역(聖域) 중 일부였지만, 1922년 일제가 사직단을 공원으로 변질시키게 됨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훈령에 의해 일본식 신사(神社)가 지어지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과 일제의 모진 강요와 협박 등으로 한국인들은 강제적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다.
해방 후인 1945년에 신사가 철거되면서 일제가 뿌린 잔재를 청산하는 뜻에 따라 1960년대 후반 일본식 신사가 철거된 자리에 지금의 전통 한옥으로 지어졌으며[8] 현재 사단법인 현정회가 관리, 운영하고 있다.
성전 안에는 단군왕검의 영정과 모형상이 설치되어 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기념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안내판에서는 단군성전이 있던 자리에 있던 일본식 신사가 이라고 표시하였는데 불교를 배척한 조선왕조의 상징인 사직단 내에 절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렇고 실질적으로 추측한 결과 일제 때 사직단을 공원으로 개조한 조선총독부에서 지어놓은 일본식 신사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성전이 위치한 자리는 1970-1990년대에 수영장과 사격장이 있던 곳과 상당 부분 겹친다.

2.2. 황학정(黃鶴亭)


황학정 문서 참조

3. 사직단의 중요성



사와 직이시여, 풍년 들게 해주시옵소서.

사와 직이시여, 비가 오게 해주시옵소서.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을 보면 조정 회의가 벌어지는 장면에서 왕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할 때마다 신하들이 "종묘와 사직을 잘 모시어..."하는 대사가 자주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사직이 바로 사직단이다.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라면, 사직은 토지의 신(사社)과 곡식의 신(직稷)을 위해 제를 지내는 곳이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기치를 내운 조선 왕조답게 농업에 있어서 땅과 곡식은 조상을 모시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그 정도로 아주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보통 도읍을 건설할 때 적용되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여기서도 충실히 지켰다.[9]
종묘가 왕의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이라면, 사직은 왕이 다스리는 땅을 주관하는 신을 모신 사당이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 중에서는 사직이 더 우위였으며, 어떠한 사정이 생겨 종묘에서 지낼 제사를 생략하더라도 사직에는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만들기 전까지는, 사직이 조선왕조에서 가장 격이 높은 제사장소였다. (다만, 조선의 임금들은 사직보다도 자기 가문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제사에 심정적으로 더 기울었다.) 종묘사직=국가=조선와 같은 말이었을 만큼 사직은 국가의 정신적 근간과 정통성을 이어가는 중요한 시설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1922년에 공원을 만든다며 제단 주변 13개 주요 전각들을 심하게 훼손하거나 철거했다. 이는 당연히 조선의 전통과 국격을 깔아뭉개기 위한 정책이었다. 해방 후에도 경제개발 논리에 밀려 부지가 축소되고, 수영장 도서관 등 각종 근대시설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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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문화재청은 사직단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회복하기 위해 복원정비계획을 마련해 제례공간인 전사청 권역 등 핵심영역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주요 전각 13동을 복원하고 3동은 보수할 계획이다. 복원은 사직단 권역을 셋으로 나눠 진행한다. 핵심은 안향청과 전사청 등이 있던 제례 공간인 Ⅰ영역이다. Ⅱ영역은 후원 공간으로 현재 어린이도서관, 종로도서관, 단군성전 등이 있다. Ⅲ영역은 사직단 대문과 전면 도로 등의 진입 공간이다. 중ㆍ단기 계획으로Ⅰ영역부터 복원을 마친 후에 나머지 두 영역은 지역 주민, 관계기관, 관계 전문가, 문화재청 등으로 협의체를 구성해 사업 추진 여부 결정할 예정이다. 또한 인근 인왕산과 어울리게 지형과 수림을 복원하기로 했다. 총 사업비는 164억 8천만 원이라고 예상한다.
국가가 보전해오던 사직대제는 1908년 일본의 강압으로 폐지됐다. 1988년에서야 전주이씨대동종약원(현 사직대제보존회)이 복원했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돼 매년 9월 첫째 주 일요일 사직단에서 거행된다.

4. 지방 사직단


사직단은 비단 서울에 있는 사직단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지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기렸다. 한양의 종묘와 사직단의 역할을 지방의 객사와 지방 사직단이 맡은 셈.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사직'과 연관된 지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사직 야구장으로 유명한 부산 사직동도 동래 사직단이 있던 곳이며 광주광역시와 청주시의 사직공원도 마찬가지로 사직이 있던 곳이다. 현재까지 남아있거나 복원된 사직단은 다음과 같다.

5. 기타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 나오는 대서양그룹 회장 김태진(이순재) 회장댁으로 촬영되었던 한옥이 이 공원 부근에 있기도 하다. 참고로 드라마에서는 종로구 가회동으로 설정되었지만 실제 촬영장소는 종로구 사직동 사직공원 입구 부근에 있는 이 한옥에서 촬영되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도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사직공원 근처에 조선 선조의 잠저였던 도정궁이 위치했었다.

6.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의 사당 목록


[1] 현재 제단 부분은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다. 제단 밖 부분은 공원으로 활용.[2] 어린이 도서관 이전에는 서울시립아동병원으로 사용됐다. 현재 시립아동병원은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3] 병원에서 도서관으로 다 바뀐 게 아니라, 병원 따로 도서관 따로 있었다. 그 중 병원이 옮겨간 것.[4] 이 어린이 도서관은 1970년대부터 있었으며 1990년대 말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 몇 안 되는 대표적인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MBC의 <느낌표>의 꼭지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캠페인에서 국내의 도서관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도서관으로 많이 소개되기도 했다.[5] 공원 광장에 게이트볼장이 있다. 그 주변으로 농구 골대와 작은 축구 골대도 있는데 여기는 젊은이들이 모여 운동을 하기도 한다.[6] 파인베르바 공기총 등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서울시 여러 곳의 선수들도 많이 훈련하러 오던 곳. 표적지 확인은 손으로 도르래를 감아야 했다.[7] 왕족과 일부 양반층이 전유하던 공간을 모든 시민이 즐기는 공원으로 바꾼 것을 '격하'라고 봐야할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참고로 순종황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전 국민에게 개방했을 때 당시 조선 여론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일제가 동물원과 놀잇배를 들이고 유원지화했던 창경궁의 해방 후 창경원 시절과 면적만 좁지 비슷한 분위기였다. 대신 입장료는 무료.[8] 제대로 된 한옥은 아니다. 철근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현대 공법으로 만들었고, 단청 대신 근본 없는 베이지색으로 칠해 놓았다.[9] 여기에서는 정궁인 경복궁에서 숭례문 방면으로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좌 종묘-우 사직'이 되는 것이다. 즉, (우/서)사직-(중)정궁-종묘(좌/동)로 종묘와 사직이 배치됐다. 하늘의 임금인 북극성이 천구의 북극에서 남쪽에 있는 신하(다른 별)들을 본다는 것을 따와, 유교적인 제례에서는 남쪽을 바라봄을 기준으로 좌우를 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