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VS 최동원

 

[image]
1. 소개
2. 맞대결
2.1. 첫번째 경기
2.2. 두번째 경기
2.3. 세번째 경기
2.4. 잘 알려지지 않은 2번의 경기
3. 총평
4. 관련 링크


1. 소개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최동원선동열의 선발 맞대결. 선동열과 최동원은 호남과 영남, 동서를 대표하는 투수였다. 선동열은 광주일고-고려대를 나왔으며, 최동원은 경남고-연세대를 나온 것도 대조적이고, 선동열은 슬라이더를, 최동원은 커브볼을 주무기로 삼았던 것도 대조적이다.[1]
당시의 호남지방 팜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기에 최고의 전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해태의 선동열과, 상대적으로 약세라고 평가받은 롯데의 최동원. 그 둘의 승부는 '''선발 등판 3번 중 1승 1무 1패'''로 동률이며, 나머지 두 번의 언급되지 않은 대결은 선발 등판한 최동원의 완투승 한 번과, 구원 등판한 선동열의 승리 한 번으로 마감되었다.

2. 맞대결



2.1. 첫번째 경기


첫번째 맞대결은 1986년 4월 19일 사직 야구장에서의 대결. 최동원이 3회 송일섭에게 선제 솔로홈런을 내주면서 1실점. 그리고 그것이 결승점이었다. 선동열은 데뷔 이후 첫 완봉승이었고 최동원은 완투패로 12연승을 마감해야 했다. 이날 경기 인터뷰에서 최동원은 "몸이 늦게 풀렸다"고 했다.
이름
이닝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투구수
기록
'''최동원'''
9
5
(1피홈런)
2
5
1
118
'''완투'''
'''선동열'''
9
6
1
5
0
121
'''완봉'''

2.2. 두번째 경기


두번째는 1986년 8월 19일 역시 사직 구장에서 벌어졌다. 선동열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1회 선두타자 정학수를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를 시켰고 2번타자 조성옥은 보내기 번트를 시도, 홍문종이 내야 안타를 치며 1사 1,3루의 상황. 이때 홍문종이 기습 도루를 시도하면서 해태 포수 김무종의 송구를 해태 2루수 차영화가 놓치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3루주자 정학수가 득점을 성공, 1점을 내주었다. 이어 김용철의 우전 안타를 기록하며 2:0.
이날 2실점은 모두 비자책이었다.
반면 최동원 역시 실점을 하지 않았지만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1회부터 6회까지 매회 주자를 출루시켰던 것. 하지만 무실점으로 막으며 2:0 승리를 가져갔다.

2.3. 세번째 경기



당시 뉴스[2]
마지막 대결은 1987년 5월 16일. 이번에도 사직구장이었다. 이 경기는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데 '''무려 연장 15회'''까지 가고도 끝내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2회말, 선동열이 김용운과 최계영의 내야 안타로 2실점을 기록.
3회초, 최동원이 2사 2루의 상황에서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맞아 1실점을 기록.
9회초, 최동원이 김일환[3][4]에게 2루주자 한대화를 불러들이는 큼지막한 2루타를 허용하며 1실점을 기록.
10회초, 최동원이 1사 만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11회말, 선동열이 2사 만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12회초, 최동원이 무사 1,2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12회말, 선동열이 1사 1,2루를 실점없이 막아냈다.
이 경기에서 '''최동원의 투구수는 209''', '''선동열의 투구수는 232개'''로 선동열의 투구수는 여전히 '''한경기 최다 투구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둘의 선발 대결은 모두 사직구장에서 벌어졌고, 모두 완투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팀의 승패 이전에 대한민국 최고 투수 간의 모든 것을 건 자존심 대결이기 때문에, 그리고 팬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투수였기 때문에, 중간 교체는 양팀 감독들이 생각하기 힘들었다.
김일환을 투입한 해태는 포수가 없어서 내야수 백인호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선동열의 볼을 받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이 때문에 선동열은 오로지 직구만 던져서 마지막 이닝까지 마무리 지었다.[5]
경기가 끝난 후 최동원이 선동열의 손을 맞잡으며 "동열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함 던지볼까?"라고 묻자 선동열이 "형님, 한번 해 볼까요?"라고 웃음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5월 16일의 연장 15회 혈투가 끝난 후, 선동열은 4일 휴식을 갖고 5월 21일에 등판하나 허리 통증으로 1.1이닝만을 투구하고 자진강판한 후 5월 내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최동원이 5월 20일(3일 휴식, 9이닝 완투승) - 5월 24일(3일 휴식, 9이닝 완투승), 5월 28일(3일 휴식, 9이닝 완봉승)을 기록하며 구단의 정신나간 혹사 속에서도 자신의 무쇠팔을 입증해보이는 엄청난 저력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승부를 주제로 만든 영화가 퍼펙트 게임이다.
이름
이닝
타자
타수
피안타
사사구
사구
탈삼진
폭투
보크
실점
자책점
투구수
기록
'''최동원'''
15
60
51
11
6
2
8
0
0
2
2
209
'''완투'''
'''선동열'''
15
56
50
7
5
1
10
1
1
2
2
232
'''완투'''

2.4. 잘 알려지지 않은 2번의 경기


언급되지 않았지만, 선동열과 최동원이 동시에 마운드에 오른 적은 총 두 번이 더 있다.

  • 최초의 만남은 첫 번째 라이벌전보다 앞선 1985년 7월 31일 구덕 야구장에서의[6] 경기.[7] 다만 이 경기는 선동열의 구원등판으로 이루어진 투수전이었으므로 둘의 대결이 6이닝동안 이어지기는 했지만 정식 맞대결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경기 결과는 2:4로 롯데 자이언츠의 승리.
이름
이닝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기록
기타
'''최동원'''
9
5

7
2
승리
완투승
'''선동열'''
6.2



1

승계주자 3실점
이날 경기에서 최동원은 9이닝 2실점[8], 7탈삼진을 기록하며 완투승을 거두었으며, 선동열은 3회 1사만루에 구원등판했으나 모든 승계주자들을 불러들여 3실점[9]을 한 후[10], 6회 1실점[11]을 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던졌다.

  • 역사적인 무승부 대결 전인 1987년 4월 12일에도 사직구장에서 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다만 이 땐 해태 선발은 김대현, 롯데 선발은 최동원이었다. 김대현이 1회 아웃카운트 1개만 잡은 후 선동열에게 공을 넘겨준 것. 경기 전부터 팔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던 상황이라 김대현을 올릴 수 없었지만, 규정상 한 타자는 상대해야 투수교체가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아웃카운트 1개만 던지고 내려온 것.

해태 김응룡 감독은 4월 9일에 3.1이닝을 투구했던 선동열을 이틀 휴식 후 구원등판시켜 8.2이닝을 던지게 했다.[12][13]
이름
이닝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기록
기타
'''선동열'''
8.2
9
3
9
2


'''최동원'''
6



6
'''패배'''

이날 경기는 6:2[14]로 선동열의 해태가 승리를 거두었다. 최동원은 4회까지는 1볼넷 무피안타를 기록했으나 5회와 6회에 각각 3실점씩, 총 6이닝 6실점을 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네번째, 다섯번째 경기는 일반적으로 맞대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최동원도, 선동열도 "우리 맞대결의 결과는 1승 1무 1패"라고 이야기를 하고 언론에서도 이 경기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둘다 마무리보직을 경험했지만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대표하는 선발투수임에는 틀림없기에 모두가 입을 모아 맞대결은 각각 선발로 맞붙었던 3번이라고 한다.

3. 총평


29세 최동원과 24세 선동열의 승부는 그렇게 팽팽했다. 그 자존심 강한 선동열도 '최동원이 있었기에 그를 넘고자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발언할 정도이니.
3차례의 경기 이후 최동원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오랜 기간 누적된 혹사로 인한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1989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15] 된 후 1991년 은퇴했고, 반대로 선동열은 무려 0점대의 시즌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내다 1996년 초 일본으로 진출했고 1999년 은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은퇴 후 지도자로서 함께 그라운드에 선 기간이 매우 짧다. 최동원은 은퇴 이후 줄곧 방송인의 삶을 살다가 2001년과 2005~2006년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2007년부터 2년간 한화 이글스에서 2군 감독을 지냈다. 선동열은 2004년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를 지낸 후 2005년부터 1군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서 경질된 뒤인 2011년 안타깝게도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동열의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이었던 김응룡 감독은, 이 둘의 승부를 떠올리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선수의 자부심이 걸린 승부였기 때문에, 투수교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아마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과 성기영 감독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3번의 승부에서 두 선수 모두 완투를 하게 되었던 것.
현재 야구인들의 평가를 들어보면 다수가 최동원을 더 높게 평가한다. 예를 들어 이 둘과 선수생활을 함께 한 이순철 해설은 "학창시절 선동열은 내 밥" 이었다고 평가한 반면에 최동원의 공은 정말 대단했다고 1초의 고민도 없이 최동원을 선택했다. 본인 생각을 배제하고라도, 야구인들 전수조사를 하면 최동원의 평가가 선동열보다 더 높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기록 자체는 선동렬이 비할 바 없이 압도하지만, 전성기 기간의 임팩트로는 시즌 성적과 더불어 사실상 우승을 만든 84시즌의 한국시리즈를 반영했을 때 최동원도 못지 않다. 또한 최동원은 선동렬과의 맞대결 시점에선 이미 많은 투구로 서서히 기량이 떨어지려는 시점이었고 팀도 상대적으로 약팀인 것도[16] 최동원의 평가를 더욱 올리는 요인중 하나다. 이에 대해 박문성 축구 해설은 모든 스포츠에서 사람들은 숫자보단 서사를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핵심은 감동이라고 하였다.[17] 더불어 축구 해설위원인 한준희[18]는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할때 선동열의 뒤에는 무시무시한 해태의 타자들이 있었던 반면 최동원 뒤에는 시원찮은 롯데 타자들이 저조한 타격과 어이없는 실책으로 자기팀 투수를 괴롭혔다며 한풀이에 가까운 평가를 쏟아내기도했다.
더불어 최동원은 경기 외적인 면으로도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선수협 구성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면서 야구계에 지대한 끼친 영향력 측면이 있기에 이미 선수로서도 슈퍼스타이지만 더욱 고평가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선동열씨가 최동원 같은 기라성 선배가 있었기에 자기가 있다고
말을 하였다.kbs 스포츠 채널 레전드 최동원 편을 참고 하자.

4. 관련 링크



[1] 이 내용은 영화 퍼펙트게임에서도 언급된다.[2] 링크에서 멘트를 하는 앵커는 손석희[3] 우투수 전문 대타 선수. 이날도 포수 장채근을 대신해 대타로 출전해 동점타를 기록했다. 원년인 198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으나, 이듬해 1983년에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였다.[4] 영화 퍼펙트게임에서는 가상의 포수 박만수 캐릭터가 동점 홈런을 날린다. 배우는 마동석.[5] 야구빠들은 잘 알지만 전문포수가 아닌이상 130km대의 변화구는 받기 힘들다.[6] 두 사람이 동시에 등판한 경기 중 유일하게 사직 야구장이 아닌 곳에서 열린 경기다. 이 경기가 열린 시점(1985년 7월)의 사직 야구장은 마무리 공사 중이었고 석 달 뒤인 1985년 10월에 개장했다.[7] 참고로 1985년은 선동렬이 데뷔한 해로,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계약 파동때문에 7월 2일에야 데뷔전을 치렀다. 즉, 프로에 입문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루키였다는 것.[8] 7회초 김무종에게 2점 홈런을 맞았다.[9] 만루에서 조성옥의 내야땅볼 후 홍문종의 안타로 3실점[10] 선발투수였던 강만식의 승계주자이므로 본인의 자책점으로 기록되진 않는다.[11] 홍문종의 안타 후 김용철의 2루타로 1실점[12] 선동열은 1987년 당시에는 전문 마무리 투수가 아니었다. 1987년 중반에 허리 부상으로 한 달을 쉬기 전까지는 선발로도 꾸준히 출장했다. 게다가 11경기나 선발로 출장했기 때문에 전문 마무리라고 할 수는 없다.[13] 선동열의 등판이 비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선동열의 등판일지를 보면 4월 5일에 5.1이닝 구원승 (3일 휴식) 4월 9일 3.1이닝 세이브였다. 선동열은 개막 이후 8.2이닝 투구가 전부였고 이는 1980년대 KBO 에이스의 등판 일정으로는 조금도 무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김대현은 4월 12일에 강판된 후, 15일에 3이닝 세이브를 거둔 바가 있어 위장선발 의혹도 있다. 따라서 선동열이 등판하기 힘든 상태라고 보기 어렵고 3연승 이후 3연패에 몰리는 상황을 원치 않았던 김응룡 감독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는 쪽이 설득력 있다.[14] 이날 4회에 기록한 롯데의 2득점은 의미가 있다. 바로 선동열의 연속이닝 무실점 (49와 2/3이닝)을 끊은 실점이기 때문이다. 이 해에도 선동열은 괴물이었던 시절이었다.[15] 구단은 원래 선수 동의 없이 트레이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는 전략적 트레이드가 아니라 선수협회를 만들려고 했던 선수들을 길들이기 위한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한 트레이드였다. 그리고 이것과 별개로 기량도 하향세이기도 했다.[16] 다만 전체적인 면에서의 약팀도 특정팀이나 선수엔 강할 수 있기에 충분한 가산점이라 하기엔 무리는 있다.저 당시만해도 선수 평균 30세 안밖이면 거의 은퇴 하는 시기였다.[17] 영상[18] 축구 해설위원이지만 오랜 롯데팬이면서 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