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옥
1. 개요
전 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수이자 코치였으며, 전 부산고, 동의대 감독을 역임했다.
롯데 자이언츠 코치에서 경질되면서 롯데 프런트에 악감정을 품어왔으며, 롯데가 영입하려 했던 백차승, 추신수 등 부산지역의 여러 야구 유망주들이 롯데에 입단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그의 아들 조찬희가 프로야구 비공인 에이전트로 활동하며 롯데와의 악연을 2대째 이어가고 있다.
2. 선수 시절
아마 시절에는 국가 대표팀의 상위 타선에서 주로 활약했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결승 쓰리런으로 유명한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이기도 하다.
1984년에 롯데에 입단하여 1995년까지 12시즌 동안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은퇴했다. 입단 동기는 부산고 동기이기도 한 자갈치 김민호.
1983년 동아대 졸업을 앞두고 롯데에 입단하는 과정이 매우 순탄치 않았다. 대부분의 신인선수들의 계약이 끝난 11월이 되도록 계약에 난항을 겪었다. 당시 조성옥은 언론 인터뷰에서 '''"국가대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마추어를 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등은 이 발언이 롯데와의 계약조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줄다리기 과정일 뿐이라고 보도했다. 11월 28일 조성옥이 프로의 유혹을 뿌리치고 실업팀 제일은행에 입단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 그러다가 1984년 1월 5일 조성옥의 롯데 입단이 발표되었다. # 아마추어에 남아 국가대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발언은 결국 더 유리한 조건으로 롯데에 입단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는 언론의 예측이 적중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성옥은 유리한 조건으로 입단하기 위해 국가대표 타이틀을 이용한 셈이 되었다.
조성옥의 입단 조건은 계약금 2천만원, 연봉 1천200만원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당시 KBO 규정상 신인 선수들은 연봉이 1천200만원을 초과할 수 없다고 되어 있어 실제로는 이면 계약을 통해 계약금 1천700만원, 연봉 1천500만원의 조건으로 입단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
국가대표 출신으로 언론으로부터 큰 기대를 받고 프로에 데뷔했으나, 롯데에서의 프로 생활 동안 기대만큼의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프로 시절 내내 팀내 교체 외야수 역할을 했다. 2군으로 썩히기에는 좀 아깝지만, 그렇다고 주전으로 기용하기에는 미흡한 실력을 보였던 것. 12시즌 동안 프로 통산 평균타율은 0.248. 게다가 장타력도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발이 빠른 편이었으나 기록상 도루도 많지 않았다[2] . 그러나 어깨가 좋아 송구가 좋았고, 작전 수행 능력도 좋았다고 한다. 때문에 프로시절 내내 한번도 시즌 내내 고정적인 주전으로 뛴 적은 없었지만 대주자, 대수비 등 교체 선수로 제법 많은 경기에 출장했다. 시즌당 평균 76 경기에 출전했고 출전 경기당 평균 2.3타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의 교체 선수로 출장했음을 알 수 있다.
1984년 입단 첫해에는 타율 2할1푼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1985시즌부터 1990시즌까지 6시즌 동안 일관되게 거의 2할5푼에 머무는 타격을 기록했다. 1989년 홍문종이 이적하고 유두열이 급격한 노쇠화를 보이면서 드디어 조성옥에게 기회가 오나 했지만 조성옥은 여전히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그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대신 신인 김응국과 이종운이 두각을 나타내며 주전을 꿰찼다. 1991년에는 신인 전준호가 나타나 조성옥의 주포지션인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조성옥은 코너 외야수로 완전히 밀려나 은퇴할 때까지는 거의 코너 외야수로 출장했는데, 주로 이종운과 교체되어 우익수로 출장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현재 조성옥을 우익수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그래도 당 시즌에 팀이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때 3차전에서 홈런을 기록하여 이기지는 못했어도[3] 4차전으로 끌고가는데 공헌을 한 바가 있다.
조성옥의 전성기는 1992시즌부터 1993시즌이며, 특히 1992시즌에 타율 0.276를 기록하는 등 프로에서 최고의 해를 기록했다. 이 해가 바로 롯데가 우승한 해다. 그러나 우승 당시 3할 타자가 여섯명 포진한 롯데 타선에서 여전히 그는 풀주전으로 기용되기에는 미흡한 기량이었고, 전준호, 이종운, 김응국에 이은 제 4의 외야수로서 기용되었다.
1994시즌에는 팀의 주장이 되었으나 그때부터 급격하게 기량이 쇠퇴했다. 타율이 2할 1푼으로 떨어졌고 백업 외야수 자리마저 김종헌에게 밀리며 출장 횟수도 급격히 줄었다. 명색이 주장인 데도, 팬들이 그를 못알아보는 굴욕을 겪었을 정도. 1995시즌에는 완전히 비주전으로 밀려 2할 1~2푼을 왔다갔다하는 타율을 보이다가 그해말 은퇴한다.
선수 시절 두드러진 스타는 아니었지만, 성적이나 기록에 비해서 롯데의 올드팬들에게는 지명도가 다소 있는 편인데, 우선 아마추어 시절 재능이 대단했던데다가,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에다가 주장까지 했던 경력 때문에 당시 롯팬들은 조성옥이 성실한 선수라는 근거 없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실력을 발휘한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말하는 롯팬들도 많았다. 비록 그런 일은 끝내 없었지만...
하지만 인상과 다르게 성격은 아주 강했던 모양으로 입단 계약부터 연봉 협상까지 구단과 항상 각을 세웠던 모양이다. 또 비주전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호된 선배로 군기반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래도 나오지만 당시 스타 플레이였던 박정태도 엄청나게 두들겨 팼다고 한다. 이런 군기반장 역할을 자임한 덕분에 비주전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주장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훗날 박정태에 따르면 신인 시절 조성옥에게 여러 차례 호되게 혼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KBS N SPORTS가 프로야구 30주년을 맞아 제작했던 레전드 다큐멘터리 박정태 편을 보면 신인 시절 경기 도중 범타를 치고 들어오던 박정태가 분을 못 이겨서 덕아웃 쇠문이나 벽에 머리를 스스로 박거나 주먹으로 벽을 치는 행동을 했는데 이를 본 조성옥이 박정태를 끌고 들어가 "선배들도 있는데 새파랗게 어린 놈이 덕아웃에서 뭐하는 짓이냐"라고 욕하면서 두들겨 팼다고(...) 박정태 본인이 증언한 바 있다.
3. 지도자 시절
롯데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롯데에서 코치로 2년간 활동했다. 그러나 1997시즌 후에 재계약이 불발되면서 롯데 프런트와 불편한 사이가 되었고, 조성옥은 롯데 프런트에 대한 악감정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
1998년 부산고등학교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증이 나오지 않아[4] 전국대회 당시 관중석에서 팀을 지휘했던 일화가 있다. 부산고 감독이 된 직후 당시 청소년 대표팀의 에이스였던 백차승을 둘러싼 논란과 스캔들이 발생했다. 당시 언론에는 청소년대표팀 최주현 감독과 백차승의 갈등이 집중 부각되었지만 사실 조성옥 부산고 감독이 급작스럽게 백차승과 그의 부친을 부추겨 미국 진출을 시도하면서 백차승의 미 구단 테스트 일정과 청대 일정이 겹치는 등 여러 복잡한 사태가 발생했고 이 사태에서 조성옥이 흑막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관측이 있다.
1999년과 2000년 추신수와 정근우를 거느린 막강한 전력의 부산고를 지휘하여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5][6]
부산고에서의 우승 경력을 바탕으로 2000년 청소년대표팀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당시 청소년대표팀 멤버는 역대 최강의 초호화 멤버였는데, 이후 프로에서도 맹활약하게 되는 '''추신수''', '''이대호''', '''김태균''', 정근우, 이동현, 이정호 등이 있었다. 이 2000년 청소년대표팀은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연장전 끝에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부산고에서 황금 멤버인 추신수와 정근우가 나가고 나자 이후 7년 동안 부산고에서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했다.[7] 의아한 것은 장원준이라는 걸출한 자원이 있었지만 거의 대회에 출전시키지 않으며 아꼈다는 점이다.
2007년에는 동의대학교 야구부 감독이 되었고, 직후 두 차례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 시절 그의 특징은 엄청난 훈련량과 엄청나게 무서운 감독님으로 요약된다. 선수들에게 무척 무섭고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좋건 나쁘건 간에 그의 제자들이나 학부모의 입에서 한결 같이 나오는 소리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조성옥이 무서운 호랑이 감독이 된 것은 일본 요코하마 고교의 와타나베 모토노리 감독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부산고는 요코하마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겨울 선수들을 요코하마로 보내 훈련을 시켰다. 이때 추신수 등도 와타나베 모토노리 감독에게 많이 배웠다고 한다. 와타나베 모토노리 감독은 매우 엄격한 감독으로 유명했다. 조성옥도 와타나베 모토노리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조성옥은 선수가 본헤드 플레이를 하면 눈물을 쏙 빠질 정도로 혼내는 무서운 감독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일단 훈련이 끝나면 무섭지 않은 감독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훈련량이 엄청나 5시반에 기상하여 저녁 10시까지 훈련이 이어졌다는 것. 항상 훈련 중이었기 때문에 항상 무서운 감독님이었다. 한편으로는 선수 개개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추신수처럼 특출났던 선수에게서 나온 얘기인데, 추신수 정도의 재능을 가진 선수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감독이라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긴 하다.
경기 운용에 있어서는 프로야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아니 그 이상으로 엄청나게 많은 투수 교체를 가져간 것으로 유명했다. 전국대회는 물론 지역예선에서조차 잦은 투수 교체로 유명했다. 당시에도 '''김성근보다 더 하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투수교체가 워낙 많아 동대문야구장 기록실에서 기록지에 칸이 모자라다고 볼멘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펜 과부하로 투수들을 혹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8] 때문에 조성옥 시절을 거쳐간 부산고 출신 투수들 중에 유독 프로 시절 부상으로 고전한 선수들이 많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조성옥은 항상 '''장원준'''의 사례가 거론되며 일부 야알못 팬들로부터 투수들을 혹사시키지 않은 감독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전병두, 이지모, 정수민, 안태경, 이왕기''' 등은 프로로 진출한 후 선수 시절의 태반을 부상으로 인한 재활로 보내야 했다. 그밖에 다른 투수들도 대부분 최소한 한두번 이상씩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재활 기간을 거쳤다. 장원준은 32세 때까지는 꾸준함의 대명사로 불려오면서 조성옥의 혹사를 반박하는 대표적이자, 유일한 사례로 거론되었지만 30대를 넘기자 결국 탈이나며 사이버 투수가 된지가 벌써 3년째다.
사실 장원준은 조성옥을 거쳐간 여러 부산고 투수들 중에서 예외적일 정도로 특별한 관리를 받았던 선수다. 장원준 부친과 조성옥과의 물심 양면의 각별한 친분이 작용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조성옥은 기록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양아들 소리 듣던 장원준에게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특별히 관리를 해줬다. 장원준은 고1 때 43 1/3이닝을 던졌으나[9] , 고2 때 25 2/3이닝만 던졌고, 고3 시절에는 단 10이닝 밖에 던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치맛바람 아버지로 유명한 장원준의 부친 장성재는 조성옥과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성재는 부산고 학부형 등 1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조성옥 감독을 사랑하는 모임(조사모)''''를 만들어 이끌기도 했다. 이러한 돈독한 관계 속에서 조성옥은 아래도 나와 있듯이 부산고 출신 투수들을 지속적으로 해외로 진출시키는 브로커 역할을 했지만, 정작 자신을 거쳐간 제자 중 최고의 자질을 가졌던 투수였던 장원준에 대해서는 해외진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조성옥이 해외진출시킨 투수 네 명 중 추신수를 제외한 세 명은 모두 미국에서 예견된 실패를 겪으며 가시밭길 야구 인생을 걸어가야 했으나 장원준은 KBO리그에서 루키시즌부터 팀의 집중관리를 받으며 성장하여 성공적인 야구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추신수의 경우에도 시애틀이 야수로 전향시켜서 성공한 것이지 투수로서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조성옥은 한마디로 김성근의 고교-대학 감독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훈련량을 가져갔다는 점, 단기전을 위해 극단적인 벌떼 야구 운용으로 팀의 전력을 쥐어짜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 선수 혹사, 특히 불펜진의 혹사가 심했다는 점, 또 재임 초기에 싱싱한 자원들을 가지고 극단적인 전력 쥐어짜기로 반짝 성적을 찍었다는 점, 이후 선수들은 많은 훈련량과 혹사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어 부상에 시달리게 되고, 이로인해 팀 성적은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점, 그를 거쳐간 투수들이 나중에 부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 게다가 선수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무서운 감독[10] 이었다는 점,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신수, 장원준 등 양아들을 특별히 관리해주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 등등(...). 참고로 전병두는 조성옥과 김성근을 모두 거쳐간 선수지만 전병두의 은퇴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건 김성근이다. 전병두가 SK로 오기 전에도 부상과 재활로 고전하긴 했지만. 참고로 전병두는 고교 시절에는 2학년 때 13 1/3이닝 210구, 3학년 때 13이닝 182구를 기록한 것이 전부다.
부산고 시절 최대성이 조성옥에게 찍혀서 고생 좀 했다고 한다. 최대성은 원래 부산중 에이스 출신이었지만, 부산고에 들어온 후 동기 장원준에게 밀리게 되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성옥에게 찍혀 포수로 강제로 포변했다고 한다. 이후 고3이 되어서야 다시 투수로 기용되었다.
그의 제자들 중 프로로 진출한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4. 부산고 선수 해외 진출 브로커
부산고 감독 시절 제자인 백차승, 추신수, 안태경, 정수민 등의 해외 진출을 주도한 이가 조성옥이다. 기사에 따르면 조성옥이 롯데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유망주들이 롯데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한다. # 조성옥은 공식적인 에이전트는 아니었다. 언어와 법률 지식 등의 장벽 때문에 실제 정식 에이전트는 따로 있었다. 그러나 선수와 부모를 직접 설득해가며 미국에 진출을 추진한 이는 조성옥이었으며, 계약 과정에서 선수들의 의사 결정에 깊이 관여했고 계약 성사를 위해 실제로 미국을 오가기도 했다. 백차승과 추신수의 공식 계약 체결 현장에도 선수 가족들과 함께 참석했다. 추신수의 해외 진출 당시 조성옥이 추신수의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파악한 볼티모어 오리올스 프런트가 추신수의 영입을 위해 조성옥의 장남 조찬희를 칼 립켄 주니어가 설립한 야구학교에 유학 보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정도였다. #
98년 봄 롯데 자이언츠 코치에서 경질되고 부산고 감독이 되었는데, 아직 아마추어 지도자 라이선스가 없어 덕아웃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관중석에서 선수들을 지휘해야 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고 감독이 되자마자 당시 롯데 1지명이 확실시되던 백차승의 미국 진출에 발벗고 나섰다. 학기 중에도 학교를 비우고 미국을 오가는 수고를 마다한 끝에 백차승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
백차승을 시애틀로 보낸 후 추신수의 시애틀 입단을 추진한 이 역시 조성옥이었다. 조성옥은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인연을 이어가 추신수를 시애틀 측에 적극적으로 엮어주었다. 롯데가 추신수를 1차 지명했으나 롯데와의 계약을 파토내고 결국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성사시켰다. 계약 성사 직후 조성옥은 백차승 때와 마찬가지로 학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비우고 2000년 9월 추신수 가족들과 함께 미국 시애틀 구단을 방문했다. # 조성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시애틀에 입단하게 된 추신수는 조성옥을 평생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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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추신수는 위의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조성옥을 아버지 같은 분이라 추켜세웠다.
안태경과 정수민을 미국으로 진출시킨 이도 조성옥이다. # 조성옥은 안태경과 정수민이 1학년이던 시절만 지도하고 동의대 감독으로 떠났지만 동의대 감독으로 있으면서도 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말았다.
알려진 사례만 해도 이 정도니 실제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가 성사되지 않은 사례는 수없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무리해 보일 정도로 여러 선수들을 해외로 진출시켰으나, 추신수 단 한명을 제외한다면 모두 해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추신수도 고교 시절 투수였던 그를 시애틀이 타자로 전향시켰기에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고교 시절 그렇게 엄청났던 백차승도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백차승은 연이은 부적절한 처신 끝에 병역법 위반으로 평생 범법자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대한야구협회도 많이 욕을 먹었고, 일차적으로는 백차승 본인과 가족들의 책임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조성옥이 부산고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너무 갑작스럽고 무리하게 백차승의 미국 진출을 추진하면서 시애틀과의 계약 과정과 청소년 국가대표팀 일정이 겹쳐 꼬여버리는 등 조성옥의 무리한 계약 추진과 부적절한 대처가 백차승의 인생을 꼬이게 만드는데 한몫한 것도 사실이다. 이후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유망주들이 미국에서 줄줄이 실패한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진출하기에는 포텐이 의심스러웠던 정수민과 안태경을 미국으로 진출시킨 것은 노욕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안태경과 정수민은 거의 루키리그와 싱글A를 전전하며 고생만 하다가 귀국했다. 그나마 꾸준히 1군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정수민과는 달리 안태경은 사이버 투수로 전락한 끝에 2017시즌을 끝으로 방출당했다.
고교 유망주들의 해외진출 붐이 일어난 후 숱한 실패 사례를 통해 현 시점에선 정말 특출난 선수가 아니라면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 정설이 되다시피했다. 바로 메이저로 직행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대부분 미국 마이너리그를 거쳐야 하는데 이게 갓 성인이 된 선수들에게는 상당히 가혹하다. 열몇시간을 좁은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마이너리그의 살인적인 이동거리와 일정이 경기 외적으로 선수들을 지치게 한다. 긴 이동시간 좁은 버스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버스 바닥에 누워자는 선수도 적지 않다고 한다. 새벽 두시에 원정 숙소에 도착한 후 새벽 네시에 기상하여 다음날 낮경기를 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코칭 스태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국내 리그의 차이는 더욱 크다. 한국에서는 2~3군을 포함하더라도 팀당 등록 선수가 제한되어 있고, 코칭 스태프들이 알아서 선수들을 지도해 주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마이너리그 코치인 홍성흔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듯이 미국에서는 선수가 먼저 다가오기 전에는 절대 코치가 먼저 선수에게 이렇게 고쳐라고 얘기해서는 안된다. # 시카고 컵스에서 10년간 스카우터로 있었던 성민규는 이광용의 옐로카드에 출연했을 때 왜 본인이 스카우트한 선수들이 미국에서 다 실패했냐는 질문을 받자 "말을 호수까지 데려갈 수는 있다. 근데 한국에서는 호수까지 데려와 물까지 떠먹여준다. 하지만 미국은 물을 마시던 말던 상관을 안한다. 니가 알아서 마셔라 하고 그냥 놔둔다."라고 말하며 한국과 미국의 성공률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산하에 수많은 레벨별 마이너리그팀을 거느리고 있어 선수 자원이 넘쳐나고 있는 메이저리그팀들은 그 많은 유망주들을 일일이 지도하는 방식을 취하는 대신 각자 자기 능력껏 경쟁하면서 될 놈이 살아남을 때까지 기다리는 방목형에 가까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마이너리그 코치들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존재라기 보다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평가보고서를 작성하여 옥석을 가려내는 역할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미국팀들은 젊은 선수들을 자극하고 성공에 대한 욕구와 경쟁심을 부추기기 위해 일부러 마이너리그 환경을 열악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육성을 전제로 하는 한국의 2군, 3군 시스템과는 근본적으로 지향점이 다른 것이다.
엄격한 사제관계 하에서 코치로부터 일방적인 지도를 받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 선수들이 미국 코치에게 먼저 다가가 지도를 요청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언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코치에게 영어로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 코치들은 선수들이 먼저 말을 걸어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는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미국에 건너가서 나름 열심히 수개월간 회화 공부를 하고 미리 준비해서 어렵게 질문 한두가지는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돌아오는 대답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학연수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개월 공부해서 어찌어찌 질문은 할 수 있겠는데, 돌아오는 말이 도통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좌절한 경험이 많을 것이다.
조성옥에 의해 미국으로 진출한 정수민은 미국 마이너리그 시절 부상을 당했는데 자신을 도와줄 코치가 아무도 없어 혼자서 1년간 재활을 해야 했다는 사연을 털어 놓기도 했다. # KBO리그에 있었다면 당연히 재활/트레이닝 코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테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재활하면서 투구품이 무너졌지만 코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구단은 무너진 투구폼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신 주저하지 않고 그를 방출해 버렸다. 팀에서 방출당한 정수민은 국내로 돌아와 현역병으로 군입대하여 22사단에서 복무하게 된다.
안태경 역시 정수민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텍사스에서 부상으로 고전했으나 제대로된 관리를 받지 못했고 결국 중도 포기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귀국 후 현역으로 군복무를 했고 제대 후 늦은 나이에 드래프트에 나와 롯데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폼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기 때문에 결국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그처럼 열악한 미국 마이너리그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조성옥이 자신의 제자들을 계속 미국에 보냈던 것은 과연 진정 제자들을 위한 것었는지조차 의심받는 상황이다. 거액의 브로커 수수료 때문이었는지, 롯데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 때문이었는지는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들이 만약 한국 KBO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경우에 따라 FA를 통해 어느 정도 거액을 손에 쥐게 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결국 이들의 해외 진출은 팬들은 물론 선수 본인 입장에서도 무척 안타까운 선택이 되어버렸다.
사실 조성옥 뿐만 아니라 몇몇 고교 지도자들이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위한 브로커 노릇을 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표적으로 2000년 9월 충암고 감독직에서 해임당했던 곽성열 감독. 그 역시 브로커 노릇을 했던 것이 결정적인 해임 사유였다. 다만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정병규가 충암고 재단에 뒷돈을 주고 감독에 선임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다수의 학부모와 선수들이 이에 반발해 학교측과 갈등을 벌였다. 충암고에서 퇴출된 곽성열은 때마침 새로 야구부를 창단한 한광고 감독으로 영입되었고 충암고와 갈등을 벌이던 학부모와 선수들을 한광고로 집단 전학시켰다.[12] 이에 충암고 야구부는 한동안 암흑기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광고 야구부는 창단 1년 여만에 해체되고 말았고 그를 따라 전학갔던 충암고 출신 한광고 선수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곽성열 또한 다시는 야구판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충암고 야구부원 15명, 신생팀으로 집단 전학
5. 사망
2009년 7월 4일 간암으로 사망했다. 당시 동의대가 하계리그에 참가 중이었으며, 조성옥의 와병으로 투수코치인 이상번이 감독 대행[13] 으로 팀을 이끌어 결승에서 성균관대학교에 승리를 거두며 우승했다.
한편 추신수는 시즌 중이라 빈소를 찾지 못했고 대신 시즌이 끝나고 귀국하여 겨울에 천도재를 지내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추신수는 조성옥이 사망한지 2년여가 지난 2011년 11일 직접 영산재를 준비하여 다른 제자들과 함께 치렀다. #
6. 가족
그의 아들 조찬희가 비공인 프로야구 에이전트다. 추신수, 정근우, 장원준, 정우람, 강민호(2차 FA), 손아섭 등 주로 부산고 출신 선수들의 에이전트를 도맡았는데, 2017년 11월 현재 아직 협상중인 손아섭을 제외, 모두 롯데 자이언츠와 엮이다가 결국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말았다는 공통점이 있어 롯데 자이언츠 야구팬들과는 안연 중의 악연으로 엮인 인물이다. 손아섭은 FA계약 난항 중이며, 장원준과 강민호의 경우 롯데 제시액 보다 같거나 낮은 액수에 타팀으로 이적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14] 손아섭 포스팅과 윤성빈 해외진출도 조찬희의 에이전시로 추진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롯데 프런트와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라고 한다. 부친 조성옥 때부터 이어져온 롯데에 대한 악감정에다가, 선수 시절 끝내 프로에 지명되지 못하여 야구를 접어야 했던 사정 등으로 롯데 구단에 매우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외에도 부인은 윤혜련, 딸은 대선주조를 모기업으로 하고 있는 BN그룹에서 경영하고 있는 조은정, 남동생은 투수 출신의 조성태, 친조카는 축구 선수 등으로 맹활약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2] 한 번도 두 자리수 도루를 기록한 적은 없었다.[3] 롯데와 삼성이 연장 13회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으나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4] 이 당시 프로야구와 아마야구 간의 갈등이 있어 프로 선수 출신이 아마야구, 특히 학생야구팀의 감독을 맡는다고 해고 자격증을 바로 내주지 않았다. 프로와 아마의 갈등이 불식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다.[5] 2년연속 팀을 우승으로 이끈 투수가 추신수 였다. 동기생인 정근우는 2000년에 주장 및 2루수로 활약했고, 같은 해 투수 김백만은 추신수의 뒤를 받치는 역할을 했다.[6] 1999년에는 심수창과 이명호의 배명고, 2000년에는 이동현과 오승환이 있던 경기고를 결승전에서 제압했다.[7] 장원준, 박근홍을 포함한 부산지역 중학생 유망주들을 2001년 신입생으로 대거 입학시키자 경남고에서는 부산중 서동환을 개성중으로 전학시킨 후 경남고로 2002년에 입학시켰다. 당시 부산고는 경남중, 경남고는 부산중 선수를 스카우트하지 않는 일종의 묵약이 있었는데 묵약이 깨진 셈. 그리고 경남중 이상화가 부산고 입학을 추진하자 경남고에서는 경남중 후배들의 장래를 생각하라면서(...) 부산고 진학을 막았고 이상화는 경남고에 입학했다.[8] 일각에서는 조성옥이 선발을 5회나 심지어 5회 이전에도 내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선수를 혹사시키지 않았다고 하는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선발 투수가 짧게 던진 만큼 불펜 투수가 그만큼 더 많이 던져야 했고, 짧은 이닝을 던지기 위해서도 많은 공을 던지며 몸을 풀어야 하는 불펜 투수의 특성상 결국은 전반적으로 투수진의 체력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2018년부터 강화된 투구 수 제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나 선수 보호라는 명분에 밀려 제대로 공론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투수를 마운드에서 내린 뒤 내야수나 외야수로 잠시 보냈다가 다시 등판시키는 경우도 있었다.[9]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눈앞에 두고 통한의 동점을 내줬고 연장전 끝에 경남고에 패했다.[10] 김태군은 회고하기를 자다가도 '감독' 단어만 들으면 바로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11] 2005년 두산에 상위 라운드 픽으로 입단했으나 프로에서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12] 다만 당시 팀의 에이스 투수 조태수는 배명고로 갔고, 다른 일부 선수들은 배재고로 전학갔다.[13] 롯데 자이언츠 (1989년 ~ 1997년) 소속 투수였다. 조성옥 감독이 부산고, 동의대에서 감독 생활 당시 투수코치로 보좌했으며, 동의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역임했다. 당시 동의대학교 야구부에 있었던 타격 코치인 진종길을 빼면, 투수 코치가 비어 있게 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2009년 시즌 도중 롯데 자이언츠 곁을 떠난 양성제가 신임 동의대 야구부 투수 코치로 임명되었다. 이후 동의대학교 야구부에 있었던 진종길 코치 역시 엔씨 다이노스로 넘어간 바 있다.[14] 하지만 2017년 11월 26일, 손아섭이 롯데 자이언츠에 잔류하며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