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화
1. 소개
KIA 타이거즈의 前 선수 및 코치, 감독. 커리어를 보면 알겠지만 야구 인생을 KIA와 해태에서 보낸 원클럽 프랜차이즈이다.
2. 아마추어 시절
광주일고에 다니던 그는 고교시절 감초역할을 톡톡히 하다가 1976년 실업구단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하게 된다. 1977년 전지훈련에서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의 관심을 받기도. 이후 프로 입단 전까지 올스타전에 여러 번 출전도 하고 국제대회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3. 프로 시절
그렇게 실업야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고향팀인 해태에서 지명을 하여 프로 원년에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게 되었다. 1989년까지 내야를 골고루 보며 상당히 매끄러운 수비를 보여주면서 서정환과 함께 센터라인을 담당하였고 수비율로만 뽑았던 원년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었다. 타격으로는 평균 이하의 똑딱이 타자로, 주로 김일권과 이순철의 뒤를 받쳐주는 2번과 9번을 전전했지만 종종 찬스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해태의 5회 우승에 힘을 보탠 후 1989년에 은퇴를 선언한다.
4. 코치, 감독 시절
은퇴 이후 구단측에서는 곧바로 차영화를 코치로 기용하였고 모기업이 바뀐 이후에도 수비며 작전, 주루 코치를 하는 등 명칭만 바뀌고 한 팀에서 코치로 지내다가 2006 시즌에는 2군 감독 겸 수비코치를 맡았다. 2007 시즌 초반 잠시 1군에 올라와서 주루, 작전 코치를 맡다가 다시 2군 감독을 맡았고, 2009 시즌에는 2군 감독을 맡다가 2010 시즌부터는 3군 총괄코치를 지내게 되었다.[1]
4.1. 불의의 낙상사고 후 근황
이렇게 3군 총괄코치를 하던 2013년도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10월 4일 낙상사고로 '''경추골절'''상을 입었다. 선수단과 팬들은 이런 날벼락같은 소식에 혼란을 겪으면서도 선수단은 아직 재활중인 김동재 코치를 겸해서 돕는 일일호프 행사를 열기도 했다. 2013년 12월 즈음 소식에 따르면 눈만 깜빡이다 손도 조금씩 움직인다고 한다. 이듬해 14년도에도 차영화 전 코치를 돕는 일일 호프 행사를 열었는데 소식에 따르면 아직도 투병 중이라는 듯.
2016년 9월 초에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에서 김동재 전 코치와 함께 병문안을 다녀갔단 기사가 났는데 안타깝게도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5. 기타
- 야구계 사람들 말에 따르면 선수, 코치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다고 한다.[2] 그래서 2, 3군 선수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사고 소식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 실업팀 롯데에서 6년 동안 선수생활을 한 것을 빼면 광주를 떠나본 적이 없는 광주 토박이이다.
- 1999년 5월 29일, 김응용 감독이 장진범 심판을 폭행하고 1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자 당시 코치였던 차영화는 그 해 5월 30일부터 6월 10일까지 진행된 10경기 동안 감독대행을 하여 8승 2패의 좋은 성적을 거둔 이례적인 기록이 있다.
- 해태 코치 시절 1990년대 중반에 함평에 사비를 들여서 훈련장을 지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시간이 흘러서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가 지어지면서 매우 좋아했다는 후문이다.
- 아들 차정구도 야구선수였지만, 프로 지명은 받지 못했고 2006년 삼성 라이온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1년만에 방출되었다. 2012년에 KBO 심판이 되었다. 그의 광주일고 동기로는 김성계, 모창민이 있었다.
6. 관련 문서
[1] 원래는 구단에서 2010 시즌부터 2군 수비코치로 기용할 방침이었지만 3군이 신설되면서 그냥 3군 총괄코치로 눌러앉게 되었다.[2] 1980~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가 구타와 폭력으로 유명한 팀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특이한 케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