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태제

 



代宗
대종 경태제

[image]
묘호
없음[1] / 대종(代宗)[2]
시호
성여왕(郕戾王)[3] /
공인강정경황제(恭仁康定景皇帝)[4] /
부천건도공인강정융문포무현덕숭효경황제
(符天建道恭仁康定隆文布武顯德崇孝景皇帝)[5]
능묘
경태릉(景泰陵)[6]
연호
경태(景泰)[7]

주(朱)

기옥(祁鈺)
생몰 기간
1428년 9월 21일 ~ 1457년 3월 14일(30세)
재위 기간
1449년 9월 22일 ~ 1457년 2월 11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명나라의 제7대 황제로, 묘호는 대종(代宗), 시호는 부천건도공인강정융문포무현덕숭효경황제(符天建道恭仁康定隆文布武顯德崇孝景皇帝). 휘는 주기옥(朱祁鈺)이며, 다른 이름은 주기각(朱祁珏)이다. 선덕제의 둘째 아들이자, 정통제의 동생으로, 어찌보면 황족으로 그냥 무난히 살 수도 있는 운명이었으나, 후술된 형의 행적 때문에 인생이 꽤나 꼬이고 본인 욕심도 겹쳐 말년을 편히 보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비운을 맞았다. 연호는 경태(景泰).

2. 생애



2.1. 토목의 변


토목보에서 오이라트 에센 군에게 정통제가 잡혀가는 변을 당하자, 명의 조정은 급히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북경을 사수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 명나라 황실에는 나이도 적절하고 황제의 동생이기도 한 주기옥이 있었다. 그래서 주기옥은 새로운 명나라의 황제로 옹립되었고, 연호를 경태라 하였다.

2.2. 정통제 유폐


다음 해, 정신차린 명의 군대가 오이라트 족에게 매운 맛을 보여 주고 화의가 체결되자 존재감이 0에 치달은 정통제는 아무 조건 없이 석방된다. 그러나 이미 명나라 황실에는 어엿한 황제가 있었으니, 경태제는 돌아온 형에게 태상황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형이었던 정통제의 존재는 경태제에게 아주 큰 위협이 되었으므로 경태제는 정통제를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이래서 정통제는 명목상 태상황이었으나, 남궁에 유폐당한다.
그러나 조정은 이미 정통제 파와 경태제 파로 나뉘어 버렸다. 그리하여 2년 후 1452년 본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나 주견제는 병으로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8]

2.3. 탈문의 변


그리고 1457년 경태제가 앓아눕자, 정통제 파인 대장 석형(石亨), 태감 조길상(曹吉祥), 서유정(徐有貞)은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했다. 이렇게 정통제는 다시 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천순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경태제는 앓아누운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병사했다.

3. 기타


명나라 관련 역사를 다룬 책에서 경제(景帝)라고 칭하는 황제가 이 사람이다. 명· 시대의 관습대로라면 연호를 써서 경태제로 불렸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일반적으로 그냥 시호의 약칭인 경제라고 칭했다. 400년 전, 만력제 시절에 편찬된 백과사전 삼재도회에서도 경태제가 아닌 경제라고 칭했다.
억지로라도 이유를 추정을 해보자면 이런 사정 때문일 듯하다. 영종이 복위한 뒤 경태제는 황제였던 게 취소돼서 성여왕으로 강등당했는데, 연호 경태는 취소되지 않았었다. 즉 영종 복위 후의 관점대로라면 '경태' 연간은 경태제 주기옥이 재위 상태였던 게 아니고 명목상 영종의 치세였다. 그래서 이 관점대로라면 주기진 = 영종 = 정통제 = 경태제 = 천순제가 되므로[9] 감히 주기옥을 경태제라고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성화제 때 주기옥이 황제로 복권돼서 시호를 받았지만 그를 경태제라고 부르기를 꺼리는 습관이 남아 그냥 약칭 시호인 경제로 불렸다고 짐작해봄직하다.
북경에 있는 명 13릉에 묻히지 못한 명나라 황제 3명 중 한 명이다. 사망 후 명 13릉에 묻히지 못하고 북경 서산에 별도로 매장되었던 것.[10] 그의 장례식 역시 황제의 장례식이 아닌 친왕의 장례식이었으며 묘호 역시 주어지지 않았다. 묘호는 남명 정권 때 붙였지만 청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았고...
생모 오 태후가 조선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명사 외척전에는 오 태후는 단도현(장쑤 성 전장 시) 오안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에 반해서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오 태후가 1427년에 명나라로 보낸 우군사정 오척의 딸이고, 태후가 조선을 그리워해 자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조선으로 보냈으며, 그 화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썼다.

4. 대중매체에서


2016년 방영된 드라마 여의담윤현에서 정통제와 경태제를 다루었다.#

5. 둘러보기



[1] 명나라(남명 정권 제외)와 청나라 기준.[2] 남명홍광제가 올린 묘호.[3] 영종이 복위한 뒤 성나라 왕으로 강등당하고 려(戾)의 시호를 받아 성여왕이라고 한다. 성려왕으로 쓰기도 한다.[4] 성화제 때 황제로 복권시켜 주면서 올린 시호이다. 성화제 이후의 명나라(남명 정권 제외)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가 사용한 시호이다. 약칭 경황제 또는 경제이다.[5] 남명 홍광제가 올린 시호이다. 이 시호 역시 약칭 경황제 또는 경제이다.[6] 황제로 복권된 뒤에 황제의 능으로서 꾸며지긴 했으나 정식 능호를 따로 받은 것도 아니라서 연호에서 따온 경태릉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7] 사망 직전에 폐위된 황제이고 한 때 왕으로 강등당했음에도 연호는 취소되지 않았다. 때문에 정통제 및 경태제의 재위 기간을 다룬 실록인 영종실록에서도 정통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재위기간의 연도를 각각 정통, 천순 연호로 표기한 것과 더불어 경태제 재위 기간의 연도를 경태 연호로 표기하였다. 건문제와는 반대 케이스. 건문제는 왕으로 강등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연호가 취소 당했다.[8] 경태제는 1남 2녀를 두었으나, 그 가운데 딸 1명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9] 주기진을 굳이 경태제라고 부르진 않았지만(흑역사 연호라...) 엄밀히 따지자면 이렇게 된다는 뜻이다.[10] 나머지 두 명은 홍무제 주원장과 건문제 주윤문. 주원장 시대에는 남경이 수도였기에 남쪽에 무덤을 썼고 주윤문은 자기 삼촌한테 쫓겨났기에 시체조차 찾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