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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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매체

于謙
(1398년 ~ 1457년)

1. 개요


명나라의 인물. 자는 정익(廷益), 호는 절암(節庵). 최악의 상황 속에서, 총대를 메고 최선의 결정을 함으로써 나라구했으나, 자신은 망친 애국자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2. 생애


절강 전당 사람으로 1420년에 진사가 되었고 강서 순무로 부임하기도 했으며, 성미가 강직해 왕진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힌 적도 있지만 관리들의 탄원으로 풀려놨다. 1446년에 병부시랑이 되었으며, 1449년에 오이라트의 추장 에센이 변경을 침입하자 정통제가 왕진의 권고로 인해 싸우러 나갔다가 정통제가 사로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난다.
집단 패닉에 빠져 최소 황하, 최대 장강 도하를 결행할 것을 재촉하는 북경의 뭇 대신들을 상대로 당시 병부 시랑(조선의 병조 참판, 오늘날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이었던 우겸은,

'''"수도는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길 바라는가? 북송이 어찌 망했는지 모르는가?"'''

라 일갈한 뒤 스스로 나서 포로가 된 황제를 태황제로 올리고 황제의 동생 주기옥을 새로이 천자로 등극시키는, '''후일 대역(大逆)의 죄를 뒤집어 쓸수도 있는 일련의 수습 과정'''을 추진한 뒤 방어군을 지휘, 북경성 주변의 성읍들과 연계하여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한 뒤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린다.

'''"북경성 문을 걸어 잠가 퇴로를 없이하라.''' '''선봉이 물러서면 후위가 선봉을 참할 것이요, 사졸이 장군의 명을 듣지 않고 퇴각하면 그 역시 참할 것이요, 장수가 사졸을 돌보지 않고 도망한다면 그 또한 목을 벨 것이다."'''

군령을 내린 뒤 '''몸소 성밖에 나가 야전군을 지휘'''한 우겸은, 토목보에서의 승리 뒤 파죽지세로 명을 들이치려 했던 에센의 오이라트군의 진격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점차적으로 전황이 교착되던 와중, 명군측에 남쪽에서 징발되어 온 근왕병과 물자들이 속속히 공급되기 시작했고, 결국 에센은 정통제를 지렛대 삼아 협상을 시도하나 명 측에서 '그분은 이미 태상황이 되셨고 우리는 새로이 천자를 세웠다' 라며 무시해버리는 상황까지 이른다. 격노한 에센은 북경으로 진공했으나 이미 명군은 22만의 대군과 막강한 화력으로 철옹성을 구축해 놓은 상황이었고, 에센의 오이라트군 역시 토목보에서 명군에게 빼앗거나 명군이 버려놓고 간 화기들을 획득하여 상당량의 화기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 사용법을 몰랐던 건지 아니면 쓸 줄은 알았어도 화약이 없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전투 내내 발포가 불가능했다.
결국 창의문과 덕승문 일대의 공성전에서 명군 측의 불쇼에 처절히 농락당한 끝에 에센은 동생까지 잃고 카라코룸을 향해 퇴각하게 된다. 오이라트 입장에선 데리고 있어봐야 쌀 도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 정통제는 이후 무사하게 송환되어 태상황이 된다.
경태제는 정통제를 태상황으로 하고 남궁에 안치했다. 이후 복건, 절강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우겸이 모두 진압한다.
허나 1457년에 석형, 조길상, 서유정 등이 탈문의 변을 일으켜 정통제를 복위시켰는데, '''사실상 이것으로 우겸의 비참한 최후는 결정되었다.''' 아무래도 뒤가 구렸던 쿠데타 세력은 희생양으로 우겸과 대학사(황제의 고문) 왕문을 내세우는데, 사실 우겸은 성품이 강직하고 고지식하여 아무리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라 할 지라도 법을 어기면 죄를 주는 인물이었고, 그때문에 당시 관료 사회에 정적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쿠데타의 핵심 인물인 석형과 서유정 역시 우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결국 우겸은 외번을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처형되었다.
복위된 영종 천순제는 우겸을 죽이는데 망설였지만 석형과 서유정은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한 명분이 없어집니다." 라며 죽일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우겸은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우겸과 함께 갇힌 왕문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우겸은 씁쓸히 웃으며

"이건 억울하고 아니고의 문제도 아니고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닐세..."

라며 담담하게 최후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우겸이 죽는 날 하늘도 슬퍼했는지 대낮에도 안개가 자욱해 암흑 천지였다고 하며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지만 값나가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고 있는 것이라고는 책 뿐이요, 곳간에도 경태제가 하사한 예복과 검 등의 무기 밖에 없다고 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래서 천순제도 우겸을 처형한 것을 후회했다고 하며, 성화제 취임후 복권되었다. 홍치제때 숙민(肅愍)이란 시호를 받았고, 만력제때 고쳐 충숙(忠肅)이라 했다.


3. 평가


'''제2의 정강의 치욕을 200년 뒤로 늦춘 인물'''
정통의 변 때 최악의 상황에서 우겸이 경태제를 친정을 하게 해 오이라트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우겸의 대업적이자 현명한 일이었다. 만약 황제와 중앙군이 함락된 상태에서 황하 이남이나 남경으로 수도를 옮겼다면 오이라트 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오이라트는 대대적인 침공을 하여 몽골 제국 - 원나라 때처럼 다시 한번 중원을 공략하였을 것이고 '''만주족의 청나라보다 200년 앞서 오이라트의 북경 함락이 일어나 위진남북조 이래 제 3의 북방 민족의 중원 정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겸의 사형 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용의자 0순위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즉위한 천순제에게 우겸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겸은 경태제를 옹립시킨 1등 공신이다. 다른 걸 떠나서 자기를 공기로 만든 존재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겸은 황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고, 북경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그의 능력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용서했다면,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대뻘짓'''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우겸이 청렴결백한 신료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하며,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자기 측근들을 처형했다.
우겸은 조정 대신이었음에도 집이 아주 초라했는데[1] 이것을 알고 경태제가 저택을 하사하겠다 하였으나 우겸은 끝내 고사하며 "나라가 어려운데 신이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하며. 하도 국사에 열중한 나머지 집에 들어와 자는 날이 1년에 몇일 밖에 되지 않았고 황제가 하사한 책이나 갑옷, 검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평소에 감추어 놓다가 1년에 한번씩 꺼내 보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시 구절 중 "오로지 청백함을 세상에 남기리니 이 몸이 가루가 된들 두려울게 있으랴" 의 표현에서 그의 청렴함과 나라를 위한 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영종을 복위시키고 우겸을 죽인 석형과 서유정, 조길상 등 간악한 간신배들은 또 다시 권력 다툼을 벌여 서로를 모함하다가 제각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다.

4. 매체


이우혁의 소설 <쾌자풍>이 토목의 변, 탈문의 변과 그에 얽힌 우겸 일족의 복수를 조선인 입장에서 다룬 소설이다.
양우생의 소설 평종협영록에서는 만고의 충신으로 언급된다. 아예 2부에서는 장단풍에게 무공을 사사한 딸 우승지가 주인공으로 나올 정도.

[1] 사실 명나라는 관리의 녹봉이 적었던터라 관리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이 흔했다. 특히 관리들은 녹봉이 적다보니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서 뇌물을 받거나 착취하고 공금을 횡령하여 가외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이 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