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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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제9대[1] 황제. 명 최후의 명군[2] 이자 중국 한족 왕조 최후의 명군[3] 으로 평가된다. 묘호는 효종(孝宗), 시호는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 휘는 우탱(祐樘). 성화제의 아들.
2. 생애
2.1. 초년
태아 때부터 부친 성화제의 후궁인 만 귀비에 의해 '''낙태약으로 독살'''될 뻔했으나 무사히 태어났다. 그러나 만 귀비의 끊이지 않는 핍박 때문에 어머니가 결국 만 귀비에게 독살당하고 민가에서 몰래 양육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고난이 많은 소년기를 보냈다.
주우탱이 태어나자 만 귀비는 갓 태어난 주우탱을 죽이라고 환관에게 시켰는데 환관은 그런 아기인 주우탱을 보면서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모든 걸 각오하고 아기를 궐 밖으로 빼돌려서 자신의 지인이 사는 집에 숨겨 기르게 했다. 당연히 만 귀비에게는 죽여서 소각시켰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후 성화제가 후사가 없어서 걱정을 하자 이 환관이 자신이 빼돌린 황자가 있다고 보고를 했고 이에 주우탱은 성화제의 명령에 따라 입궁하게 된다.
황태자가 된 후 황제 수업에 충실했으며 1487년 성화제가 죽자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 신하들이 만 귀비의 전횡을 징계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홍치제는 이를 그냥 없던 일로 했다. 사실 아버지 성화제 때에도 만 귀비를 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만 귀비를 너무 아꼈던 성화제 역시 이를 그냥 넘겨버렸다. 효성으로 이름난 홍치제였기에 아버지의 결정을 따른 것이라곤 해도 자기를 핍박했던, 그것도 목숨까지 위협했던 여인에 대해 그냥 넘겼던 것을 보면 대인배. 만 귀비는 성화제가 죽던 1487년에 성화제보다 조금 앞서 사망했다.
2.2. 즉위
즉위 후 업적은 제법 볼만한데, 성화제 때까지 혼란에 빠졌던 국정을 수습하고[4] 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재정비하여 문형조례를 반포했다. 외정적으로는 건주 여진과 타타르 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명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런 주목할 만한 치적으로 인해 그의 치세를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 부르며 혼란에 빠졌던 명나라가 다시 부흥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제법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리기 마련이었던 여러 중국 황제들 속에서 '''정실 황후에게만 충실한 황제'''라는 점. 정말 금욕주의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색을 밝히지 않아서 정실 황후인 효강경황후 장씨에게만 충실했으며 후궁을 두지 않았다. 황후와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하며 한 번은 성화제의 국장 기간 동안에 신하들이 후궁감을 몇 명 뽑아놓았다는 말을 듣자 "삼년상도 안 끝났는데 어찌 후궁을 들이겠느냐?"며 이를 물렸다는 일화도 있다.[5]
이렇듯 업적과 인간성 딱히 흠잡을 만한 곳이 없는 군주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오래 살지는 못했다. 1505년 감기를 앓다가 어의가 가져온 약을 마시고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결국 병상에서 재상들에게 태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재위 기간은 18년이었지만 향년 34세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이 바로 정덕제'''였다는 점. 그야말로 호부견자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어쨌든 홍치제 본인은 군주로서 모범을 보였고 그의 치세 동안 경제적 호황과 잠잠한 변방이 함께 해서 명나라의 태평기를 이끈 중흥의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 뒤의 암울한 명나라의 황실사를 생각하면 진정한 '''임금 구실 제대로 한 마지막 명나라 임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군주. 말 그대로 한족 왕조의 마지막 명군.
3. 기타
홍치제의 시기는 조선 성종 말년과 연산군 전반에 걸친다. 또한 홍치제 즉위 초에 제주도에서 태풍에 휘말려 표류했던 최부가 표해록을 남겨 이 시기의 중국의 사회상이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 사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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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제와 그 전 황제들의 어진과 그 이후의 어진을 비교하면 같은 황족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제로 이전까지는 영락제, 선덕제, 정통제, 성화제는 물론 성격은 유약하다는 홍희제도 거대한 체구에 풍성한 관우 수염이 돋보이는 황제들이었지만, 홍치제 이후에는 황제들의 얼굴이 마른 체형에 수염도 풍성하지 못하다. 그나마 만력제가 풍채는 비슷하지만 수염이 빈약한 편이고.. 공교롭게도 조선 왕도 성종(조선)까지는 태조(조선) 이성계로부터 전해진 유전자가 발현된 것으로 보이지만 연산군 때부터 다른 모습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6]
그의 치세 초기에 원나라 말부터 명나라 초를 휩쓴 고려양의 복식을 금지시켜서 이전의 한족의 한푸로 돌어가게 된다. 원명 시기의 한류, 고려양
명나라 때 관리였던 육용(陸容, 1436년-1494년)이 저술한 숙원잡기(菽園雜記) 권10에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馬尾裙始於朝鮮國, 流入京師, 京師人買服之, 未有能織者. 初服者, 惟富商, 貴公子, 歌妓而已, 以後武臣多服之, 京師始有織賣者. 於是無貴無賤, 服者日盛. 至成化末年, 朝官多服之者矣. 大抵服者, 下體虛奓, 取觀美耳. 閣老萬公安, 冬夏不脫. 宗伯周公洪謨, 重服二腰, 年幼侯伯駙馬, 至有以弓弦貫其齊者. 大臣不服者, 惟黎吏侍淳一人而已. 此服妖也, 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馬尾裙)은 조선국에서 비롯되어 수도에 유입되어 수도 사람들이 이를 사고 입었으나 능히 이를 짤 수 있는 직공이 있지 않았다. 처음에 입은 자들은 부유한 상인, 귀족, 기생뿐이었으나 이후 무신(武臣)들 대다수가 이를 입었으니 수도에서 비로소 이를 짜서 파는 자가 생겼다. 이에 귀천을 떠나 입는 자가 날로 성해졌다. 성화(成化, 1465년~1487년)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이를 입었다. 대체로 옷은 하체가 비어있고 펴져있으니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각로(閣老,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뭇 공(公)들은 이를 편안히 여겨 겨울과 여름에도 벗지 않는다. 종백(宗伯, 예조판서) 주홍모(周洪謨, 1420년-1492년)는 두 옷으로 겹쳐 입었고, 나이 어린 후(候), 백(伯), 부마(駙馬)들은 활시위를 옷자락에 꿰놓은 자가 있을 정도다. 대신들 중에 안 입는 자들은 여리(黎吏)와 시순(侍淳, 종)들뿐이다. 이 옷은 요사스러워, 홍치(弘治,1488년-1505년) 초기에 비로소 이를 금지하는 법례가 생겨났다.
숙원잡기(菽園雜記) 卷10
4. 둘러보기
[1] 혹은 10대 황제. 6대 정통제가 명나라의 8번째 황제 천순제로 복위된 적이 있기 때문인데, 천순제 시절을 따로 한 대수로 치면 10대 황제가 된다.[2] 14대 태창제도 자질 자체는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되나 재위 기간이 4주에 불과하고, 숭정제도 암군은 아니었지만 명 제국이 이미 기울 대로 기운 마당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3] 중국 최후의 이민족 명군이자 중국 역사 전체의 마지막 명군의 경우 과거에는 청나라의 건륭제라는 평이 압도적이었으나, 건륭제의 각종 실책이 재조명되면서 현재는 그의 아버지인 옹정제가 중국 최후의 이민족 명군이자 중국 최후의 명군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4] 홍치제의 즉위 초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최부의 표해록을 보면 홍치제는 지방의 관리들을 죄다 감찰해서 문제가 있는 경우 모두 사임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홍치제는 이들 관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관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너네 다시는 관직 생활 할 생각 마라'는 의미였다고 한다.[5] 어쩌면 황후를 등한시하며 후궁인 만귀비를 총애하느라 내명부를 엉망으로 만든 아버지 성화제를 반면교사 삼아서 황후에게만 충실했을 수도 있다.[6] 태조 이성계는 남아 있는 어진을 통해서 얼굴과 체형을 알 수 있다. 태조의 3남인 익안대군의 초상, 손자인 효령대군의 초상, 증손자인 수양대군의 초상을 보면 얼굴이 네모형이고 기골이 장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종의 경우에는 세종을 닮았다는 평이 있고 폐비 윤씨가 "전하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아 이성계의 무장 체격을 물려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의 외모에 대해서는 인조 대의 대신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이 임진왜란 당시 피난 중 97세의 노인을 만났는데, 그때 노인이 연산군 시절에 향군으로 서울에 가서 연산군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노인의 기억으로 연산군은 살결이 희고 얼굴과 허리가 가늘었으며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