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비테
1. 개요
세르게이 비테 백작은 1905년부로 임명된 러시아 제국의 첫 번째 총리였다. 발트 독일인 귀족 출신이다. 총리로 임명되기 이전 1892년 러시아 제국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던 비테는 특별한 정치적 신념은 없었지만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2. 생애
비테는 오데사의 노보로시스크 대학의 물리학부와 수학부를 졸업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는 박사 학위를 따는 대신에 철도회사에 취직했는데 여기서 그는 출납계, 검사원, 감독관, 역장으로 근무했으며 새로운 차량연결 방법, 빠른 신호 방법, 통제 장치 등을 고안해냈다. 그는 재무성 철도사업국장, 교통장관 등 중앙정부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의 직책을 거쳤다.
평범한 지방의 철도관리였던 그가 일약 요직에 발탁될수 있었던 배경에는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있었다. 일개 지방관리였던 비테가 차르에게 직언을 하였고 이것이 알렉산드르 3세의 눈에 띈 것이다.[코레일 사보] 황제의 기차를 세운 세르게이 비테 <유라시아 철도 알아보기>
3. 재무장관 시절
비테는 43세에 재무장관이 되었다. 상업, 공업, 철도국 등이 그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주도로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당시 독일 경제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주장을 참고하여 과감한 국가주도 경제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밀어부쳤다. 1894년 러불동맹을 체결해서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을 철도 건설에 주로 투자했는데, 이는 향후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업 진흥 정책과 시베리아 개발에 밑바탕이 된다. 1897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개의치 않고 다른 서구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를 도입했는데, 이 덕분에 러시아 화폐의 교환성이 확립되면서 해외 자본 유입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비테의 재무장관 재임 기간 당시에 러시아 제국은 연평균 8~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같은 기간의 프랑스는 1,6%, 영국은 2.4%, 독일은 4.9%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을 보였었다. 철도의 총연장은 두 배로 늘었고 관련산업도 크게 촉진되어 선철, 철강, 석탄 생산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898년 한 해 동안만 해도 거의 3000베르스타의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가 재직하는 동안 러시아 제국 내 철도 길이는 2만 5000베르스타가 늘어났다. 티스푼 공사가 벌어지던 첼랴빈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노선도 비테가 팔을 걷어붙여 본격적으로 재개될 수 있었다 한다.[1]
대외정책에 있어선 실리적인 온건파로 평가받으며 당시 러시아 군부와 외무성이 주도하던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 확보에 회의적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각료들 사이의 다수의견인 신중론과 자신의 강경론을 모두 채택했다.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가진 지정학적 이점이 극동에서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 낼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무장관으로서 재임하던 기간 동안 육군과 해군의 긴축을 요구하며 상당수의 군비확장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는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전후, 당시 지상군 사령관이었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쿠로팟킨 전 육군장관과 문서상으로 책임공방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2] 대체로 (1880~90년대에) 그는 러시아가 영국 등 유럽열강과의 과도한 경쟁에 부족한 재원을 쏟는 대신 동방의 미개척지 개발에 집중하길 원했다.
3.1. 부작용
상공업상의 이러한 철도 개발과 중공업 육성은 공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농업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농촌에서는 과도한 세금과 토지상환금 문제로 기근이 만연했다. 특히 비테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기 전 해였던 1891년에는 우랄과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기근에 따른 질병으로 50만여 명이 사망했었다. 이런 와중에도 아랑곳 않고 비테가 주도하는 러시아 경제 정책은 철도 건설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농산물을 과도하게 수출하는 정책을 고수하면서,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농촌의 기근 문제가 만연하게 되었다.[3]
비테의 국가주도 경제 정책은 또 하나의 심각한 부작용도 낳았는데, 국가 주도의 경제 개혁, 개발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의 부르주아 상당수가 심각할 정도로 일방적인 친정부 성향이 된 것.
3.1.1. 반론
비테의 취임 이전 러시아는 높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금을 받고 해외로 곡물을 수출하는 대지주들에게는 유리했지만 환율이 지극히 불안정한 이유로 공업을 기반으로 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성장에는 무척 불리한 상황이었다. 비테의 금본위제 도입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농촌의 영양결핍 상태와 식량의 과도한 수출 현상은 더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또한 비테는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국민의 대다수인 농민들의 구매력 증대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비테는 먼저 농민들이 대출을 받을 때 연대보증을 받아야 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는농업에서 비효율적인 미르 중심의 공동체 토지소유를 가정당 토지소유로 교체함으로서 농민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방향을 연구했으며, 이는 후에 스톨리핀의 성공적인 농업 개혁의 밑바탕이 되었다.[4]
4. 각료평의회 의장 시절
러일전쟁 패전 직후 러시아 측 전권대사의 자격을 가지고 포츠머스 조약에 참여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의 전쟁수행력이 바닥났던 사실을 빌미로 러시아에 유리한 강화안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사실 러시아도 전쟁수행능력이 바닥난건 마찬가지였으며[5] 더불어 정치, 사회적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비테는 이를 절대 티내지 않았고[6] 탁월한 언플실력으로 미국을 상대로 러시아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였던것이[7] 성공요인이었다. 비테는 이후 백작 칭호를 수여받는다.
5. 러시아 제국 초대 총리
자신의 주도하에 대대적인 내정개혁을 추진하길 원했으나 비테의 권력강화를 경계하던 니콜라이 2세 및 보수적인 각료들의 견제를 받다 결국 일선에서 후퇴한다. 이후 재정 말기의 또다른 수완가로 평가받는 표트르 스톨리핀이 비테의 개혁작업을 이어받는다.
6. 같이보기
[1] 이런 비테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제국은 러일전쟁에서 더 심한 망신을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2] 쿠로팟킨은 전쟁책임이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 일당의 농간과 비테가 주도한 동청철도 사업 및 아시아 정책, 군비삭감에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주장은 러시아 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3] 러시아 제국 농촌 전반의 영양결핍 문제는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지 개혁 이전까지 계속되었다.[4] 후에 자신이 재무장관 대신 다른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 표트르 스톨리핀이 농업 개혁이 성공하자 비테는 스톨리핀이 자신의 정책을 표절했다며 욕하고 다녔다고 한다...[5] 비테가 포츠머스로 출국전 육군대신을 만나서 상황을 물어보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선 1년의 시간과 20만의 추가적인 인명 손실을 각오해야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연해주와 사할린을 점령당할지도 모른다는 답변을 들었다. 한편 해군의 경우 전력의 90퍼센트를 상실한터라 해군대신은 영토 할양정도는 어쩔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였다.[6] 지금의 시각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지만 영국조차도 극동에서 손을 뗀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7] 특히 일본이 배상금 문제를 거론하자 AP통신을 통해 일본이 돈을 받아내기 위해 평화를 짓밟고있다는 식의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게 미국 언론에 먹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