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3세

 


[image]
'''이름'''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출생'''
1845년 3월 10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사망'''
1894년 11월 1일 (49세)
러시아 제국 타우리다 주
리바디야 말리 궁전
'''장례식'''
1894년 11월 1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재위'''
러시아 제국의 황제
1881년 3월 13일 ~ 1894년 11월 1일
'''배우자'''
덴마크의 다우마
(1866년 결혼)
'''자녀'''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게오르기
크세니아
미하일
올가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
'''어머니'''
헤센의 마리
'''형제'''
알렉산드라
니콜라이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마리아
세르게이
파벨
'''서명'''
[image]
1. 개요
2. 개인사
3. 재위 기간
4. 가족사
5. 일화
6. 평가
7. 창작물


1. 개요


알렉산드르 2세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인 니콜라이가 요절하자 그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다.
1881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해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3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독일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나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1]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철도를 놓게 되었다.
황후마리아 표도로브나(다그마르 공주)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로 본래 그의 형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니콜리아 황태자가 죽은 이후 그녀가 지속적으로 러시아 황실과 친하게 지냈고, 그녀와 결혼하라는 형의 유언을 의식한 알렉산드르 대공이 호감을 갖게 되어서 1866년 결혼을 하게 되었다.
자기 자신은 원래 차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주변 사람들 전부 "그는 차르가 될 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2] 주변 사람들이나 아버지가 생각한 인물은 맏형 니콜라이[3]였으며 알렉산드르 자신도 이를 받아들였고, 아예 똑똑한 형 덕에 자기가 정치를 하지 않고 좋아하는 군대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 황제들 중에서 표트르 1세 다음가는 거구로 키가 190cm에 달했다.[4] 유년기부터 그는 남다른 힘을 자랑했는데, 손가락으로 동전을 구부릴 정도였다. 운동도 잘했고 사격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솔로비요프는 그런 그를 ‘로마노프 가문의 헤라클레스’라고 부르며 놀라워했다. 그의 완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888년에 알렉산드르 3세는 가족과 함께 크림 반도를 방문했다가 기차를 타고 다시 수도로 가는 중이었는데, 과속으로 인해 기차가 전복되어 황제가 탄 객차가 완전히 부서졌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3세는 무너진 기차의 지붕을 들어올리는 괴력을 발휘해서 가족들을 탈출시켰다. 황실 일가는 황제의 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로 인해 알렉산드르 3세는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급성 신장염에도 걸리게 되면서 건강이 갈수록 악화된다. 그래서 그를 검진한 독일인 의사 에른스트 라이덴의 조언에 따라 1894년 크림 반도의 리바디야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요양생활 한달만에 사망했다.

2. 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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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초상화


원래 군인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다. 그러나 형 니콜라이가 결핵으로 죽어버리자, 졸지에 후계자가 되어 나중에 황제로 즉위한다. 사실 황족들이 대놓고 반대했고, 자기도 그다지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가 강행하여 그대로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실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형의 약혼녀였던 덴마크의 다그마르)와의 결혼도 처음에는 원하지 않았는데, 왜냐면 그 때 그는 어머니의 시녀 중 한 사람인 마리아 엘리모브나 메셰르스카야 공작 영애[5]와 연인 관계였기 때문.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차르 자리 따위 버릴 수 있다고 했다가 대노한 아버지에 의해 결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만 정략결혼이었던 덴마크의 마리아 표도로브나와의 결혼 생활도 행복한 편이었고, 서로 외도 없이 많은 자식을 낳아 끈끈한 금슬을 보여주었다. 이에는 숱하게 바람을 피운데다가, 모후가 사망한 지 1달 만에 정부와 재혼했던 부황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고 한다.
강제로 결별당한 메셰르스카야 공작 영애, 애칭 두셴카(Dusenka)는 러시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일기에 "안녕, 나의 두셴카"라는 말을 써서 슬픔을 삭혔다고 한다. 이후 두셴카는 빠리에서 만난 2대 산 도나토 공작 파블 파블로비치 데미도프와 결혼하여 아들이자 3대 산 도나토 공작 엘림을 낳고 나서 난산의 후유증으로 이틀 후에 죽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이후 재혼하여 이사하기 전까지 그녀의 옷들을 그대로 둔 방에서 오랫동안 지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자녀들에게 다정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체벌과 가정 폭력이 만연해 있었지만, 알렉산드르 3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녀들에게 체벌을 가하거나 가정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친근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몰래 뒤에서 아이를 잡아올린 다음에 물에 담가버리는 장난을 쳤다가 나중에 물 양동이를 뒤집어 쓰는 보복을 당하기도 했고,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알렉산드르 3세는 개인적으로 매우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대단히 검소했다. 즉위하면서 자신에게 할당된 식비와 의복에 드는 비용을 줄였고, 무도회를 주최하는 횟수도 줄였다. 그러나 사냥에 대한 예산은 줄이지 못했다. 부황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자신도 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낚시도 좋아했고 좋은 음식과 시가, 커피도 좋아했다. [6]
한편, 그는 아들 니콜라이 2세가 미신에 빠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본인은 미신을 전혀 믿지 않았다. 또한 자신에게 직언을 하였던 하급관리를 중용하는 도량의 소유자였다. 이 또한 라스푸틴, 베조브라조프 등 함량 미달의 사기꾼들에 둘러쌓였던 아들과 대조되는 면모다.

3. 재위 기간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에게 잔혹하게 폭탄으로 암살당하자, 그는 테러 주동자들과 관련자들을 모아 목을 매달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스도 부활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차르로 즉위해 자신의 아버지가 폈었던 정책들과는 전혀 반대로 나라를 돌린다.
상당히 전제주의적인 정치를 폈는데 자신의 아버지의 즉위 기간에 생겼었던 개혁들 중에 사실상 농노해방을 제외하고 모두 철회했고 더욱 더 강한 차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급진파에게서 잃고 나서 안 그래도 싫어하던 급진파를 증오까지 하게 되어 여러 급진파들을 잡아 대대적으로 주요 지도자들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알렉산드르에 의해 목이 달아난 사람들 중 하나가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레닌의 형'''이었다. 혁명가 형제들이라 불러도 되겠다.
러시아 역사상 명재상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세르게이 비테가 러시아의 공업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한 때가 알렉산드르 3세의 치세다. 알렉산드르 3세는 비테를 매우 신임하였고 비테 또한 알렉산드르 3세에게 충성을 다 하였다.[7]
비테의 주도아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이룬 이 시기,[8]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경험이 있던 알렉산드르 3세는 이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러시아 육, 해군의 전력증강에 나섰다.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 러시아 육군은 양적으로 예비군 동원 체제를 정비하여 30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규모에 이르렀고 질적으로도 소화기 면에선 그 유명한 모신나강이 예비 여단까지 보급되고 야포 국산화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해군 또한 대규모 건함 계획이 실시되어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의 육군과 세계 3위의 해군을 보유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규모의 군비증강과 전제주의적인 국내정치와는 반대로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철저한 평화주의였기에 전쟁을 피했으며, 독일 제국비스마르크를 개인적으로는 매우 싫어하면서도 삼제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나중에 독일에서 군국주의자인 빌헬름 2세가 집권한 이후에는 독일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는데 이 조약이 삼국 협상의 밑바탕이 된다. 그의 재위 중 러시아가 큰 전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명은 유럽의 피스메이커(Миротво́рец, Mirotvórets)였다.
반면 알렉산드르 3세 사후에 즉위한 장남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의 전제주의는 그대로 답습했지만 평화에 대한 헌신은 등한시하여, 재위 중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제위와 목숨까지 잃게 된다.
여담으로 알렉산드르 3세는 방계 황족들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황제의 적자 후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던 대공위[9]를 황제의 친손주까지로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 역시 위의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제주의적 통치의 일환이었다.

4.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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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화


부활절을 맞아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파베르제의 달걀을 주문해 제조했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알렉산드르 3세를 보고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발언 한 적이 있다.'''[12]

6. 평가


부왕이 암살된 이후 철저한 반동정치를 하여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의 원인이 된 황제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세르게이 비테 등을 포함한 유능한 관료들을 등용하고 그들을 신임하여 제정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려 했으며 국제적으로는 철저한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는 점이 부각되어 긍정적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7. 창작물


프랑스-러시아 합작 영화인 시베리아의 이발사(The Barber Of Siberia / Сибирский цирюльник. 한국에서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라는 제목으로 개봉)에서 러시아 육군 사관학교의 임관식 때 아들 미샤와 함께 말을 타고 참석한다. 이 때 알렉산드르가 먼저 '반갑다 제군!'라고 인사를 하고 생도들이 '황제 폐하의 건강을 축원합니다!'라고 화답한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갑자기 미샤가 아버지를 따라 '반갑다 제군!'이라고 말하고, 생도들은 다시 '황자 전하의 건강을 축원합니다!'라고 화답한다. 미샤가 한번 더 하려고 하자 아버지 알렉산드르가 황급히 입을 막아버리고 이를 본 생도들도 웃음을 간신히 참는게 포인트. 해당 장면
미샤라는 애칭을 볼 때 알렉산드르가 데리고 온 황자는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어 자막 중 일부에서는 이 때 미샤를 지칭할 때 '황태자'로 번역해서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이자 후대 계승자인 니콜라이 2세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러시아어인 해당 대사는 분명히 '황자 전하'라고 나와 있다. 영화에서 해당 장면은 1885년이고, 당시 황태자인 니콜라이 2세는 1868년생이므로 이 때는 이미 10대 후반이며 어린 소년이 아니다. 반면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1878년생이므로, 영화 속 모습과 나이가 얼추 맞다.

[1] 독일 측도 알렉산드르 3세의 혐독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1887년엔 알렉산드르 3세가 독일을 치기 위하여 비밀리에 250만에 달하는 병력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돌아 참모총장 몰트케가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러시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해야한다고 주장한적도 있다.[2] 그러나 세르게이 비테의 의견에 따르면 그는 제왕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3] 말 그대로 완벽한 군주감이었다. 연약했지만 배포가 크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똑똑했다. 이 무렵 유럽 왕실들 사이에서 문제가 된 여자 문제도 부모가 정해준 약혼녀에게만 충실했기 때문에 깨끗했다.[4] 이 때문인지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와 니콜라이 2세의 첫째 딸 올가, 둘째 딸 타티아나, 셋째 딸 마리야는 장신이다.[5] Princess, 러시아에서는 공작인 Kniaz가 영어로 Prince로 번역된다. 이상하게도 황족들은 Velikiy Kniaz지만 Grand Duke로 번역된다.[6] 그의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가 담배는 입에도 안 대고 간편식을 선호한 것을 생각하면 매우 묘한 일이었다.[7] 반면 아들 니콜라이 2세는 비테를 싫어했다. 그래서 비테는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한 후에는 바로 파면된다.[8] 러시아의 인구가 많아 1인당 산업화지수는 여전히 유럽에서 바닥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이때 러시아는 이미 철강 생산량을 포함하여 세계 4~5위를 넘나드는 산업규모를 보유하고 있었다.[9] 일괄적으로 Grand Duke of Russia로 번역되곤 하지만 러시아어로 공작을 의미하는 크냐지가 영어로 Prince로 번역되는 것을 감안하면 Grand Prince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이는 그들도 인지하고 있으나 이미 18세기, 19세기부터 Grand Duke라고 표기해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Grand Duke로 표기하고 있다.[10] 헤센 대공국의 공주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에 엘리자베트의 여동생 알릭스가 참석했다가 니콜라이 황태자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연애 끝에 결혼했다. 세르게이가 러일전쟁 중 혁명세력에게 피살된 후 아내 엘리자베트는 수녀가 되어 자선과 봉사로 살았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인 1918년 살해당했다.[11] 러시아 혁명 중 망명을 시도하다 피살.[12]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정치를 폈으며 경제 안정화에 힘썼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