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2세
[clearfix]
1. 개요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14대 황제이자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수난자 성 니콜라이(Святой страстотерпец Николай)로 시성된 인물이며 축일은 7월 17일이다.
2. 설명
1868년 당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태자(Его Императорское Высочество Государь Наследник Цесаревич и Великий Князь, '후계 황태자 및 대공 전하')였던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1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으로 평가된다. 사적으로는 교양 있고 예의바른 신사였지만, 황제로서는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다 러시아 혁명 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적으로 그는 매우 교양있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4] 그는 당대 러시아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프랑스어를 비롯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발레 애호가였다. 문학가 중에서는 니콜라이 고골을 높게 평가했으며 말할 때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 속 내용을 곧잘 인용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시대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선량한 인품과 교양, 사교술 등 입헌군주제 국가의 이상적인 군주의 자질을 모두 갖추었던 셈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다. 그는 성격이 유약하고 리더십도 부재했다. 자신도 그걸 알았는지, 즉위식 때 자신의 매제[5]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드로(Сандро),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네. 신하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네." 능력 있는 신하들의 말을 잘 듣거나 국정을 맡겼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허나 애석하게도 니콜라이 2세는 '''유약하고 무능하면서도 독선적인데다 심한 반유대주의자에 정치적으로 보수반동으로''' 전제정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유약하기만 해서 주변 말 잘듣는 예스맨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유약함과 독선이라는 상반된 성향이 교대로 튀어나와 강단있게 결단을 내려야 할때는 우물쭈물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의 수용해야 할때는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처리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리더로선 정말 짜증나는 유형이었다. 전형적인 능력 없으면서 부지런하기만한 지도자상으로 잘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 말 안듣고 자기 독단으로 밀어붙이다 모두 말아먹었다.
당대 러시아 정계에는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 표트르 스톨리핀처럼 유능한 관료들이 존재했으며 니콜라이 2세 또한 스톨리핀에게 나름대로 힘을 실어주었지만,[6] '나름대로 밀어주는 수준'으로 러시아를 되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스톨리핀의 암살 이후로는 황제의 독선을 제지하면서 개혁을 밀어붙일 만한 인사들이 없었다.
러일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경제난과 피의 일요일 사건 에서의 잘못된 대처로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지지를 잃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진퇴양난에 처한다.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국내 정치는 독일인이며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 누이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맡았는데, 그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 때문에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신임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각종 괴상한 정책들을 제안하여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모두 라스푸틴을 싫어했고, 황제의 여동생 올가 여대공, 황후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 같은 황족들까지 오빠와 여동생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듣지 않았다. 당연히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다. 니콜라이 2세 본인은 권력을 휘두르는 라스푸틴을 황후처럼 맹신하진 않았지만 아내와의 충돌이 두려워 막지 않았다. 또한 농민 출신인 라스푸틴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방탕한 행동 또한 백성들의 한 단면이라 생각하고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자녀들과 지나치게 접촉하고 강간 의혹까지 터지며 라스푸틴을 잠시 유배보내긴 했지만 상황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7]
소련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니콜라이 2세 재위 기간의 말기 러시아 제국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니콜라이 2세에 대해 동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선량한 암군' 혹은 '죄 없던 자녀들까지 묶어서 잔혹하게 죽인 것은 잘못된 일이나, 제정의 몰락 자체는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고 본다.
3. 통치
3.1. 즉위식과 젬스트보 청원 운동
1894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황제에 즉위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49세였고 평소 강건한 신체를 자랑했으나, 1888년 기차 사고를 당한 이후에 생긴 허리 통증을 황제 본인이 계속 무시해서 스스로 병을 키워버렸던 것이 급사의 원인이었다. 문제는, 알렉산드르 3세가 자신의 건강을 과신한 나머지 '아들이 30세가 되면 후계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전에 사망해 버렸다는 것.[8]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차기 황제로서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즉위하던 날부터''' 무능함과 유약함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2세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수도의 인민들에게 기념품과 선물을 나눠 주는 행사를 계획했다. 선물은 소시지와 빵, 케이크, 사탕과 땅콩, 머그잔이 든 자루 40만 개였고, 그 외에도 맥주 3만 통과 벌꿀술 1만 통을 준비했다. 그런데 선물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무려 1백만 명이 넘었던 것. 아침에 행사를 시작하자마자 행사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압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2천 명의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백만 인파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황제는 10시 30분에 사태를 보고받았는데, 사람들은 황제가 곧바로 현장에 나가서 사태를 진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는 현장에 가지 않았다.
황제는 현장에 나가 사태를 진정시키는 대신에 아내와 함께 3시간 30분 동안 기도를 하다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현장에 나갔는데, 현장에서는 이미 1,389명이 죽고 1,300여 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난 뒤였다. 이 정도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니콜라이 2세에게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하필이면 그날 저녁에 프랑스 대사관에서 즉위 축하 무도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 황제는 무도회에 나가는 대신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어했지만, 황족들이 '황제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고 조언했기 때문에 무도회에 참석했다.
황제는 10분 남짓 머물렀다가 대사관을 떠났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황제가 파티에 나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황제의 행보를 전해들은 대중들은 '황제가 신민들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해 분노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은 황제의 치세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리는 징조'라고 말했는데, 이들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자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사망과 젊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즉위는 1856년에 보수적인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고 개혁적이고 젊은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해 러시아 제국 전체를 뒤흔든 대개혁을 시작했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사교계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젊은 황제가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더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이에 영향을 받은 젬스트보의 자유주의자와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한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차르에게 입헌과 개혁에 대한 청원서를 올릴 것을 계획했다.
트베리, 체르니고프를 위시한 9개 주 젬스트보가 청원서를 작성해 차르에게 바쳤다. 이 청원서는 보수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주 온건한 논조를 띠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요구 사항 중 최소한의 것만 담은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차르가 인민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통해 러시아에서 점진적인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차르는 즉위한 이후, 공식석상에서 이렇게 답했다.
차르는 젬스트보 자유주의자들의 요청을 허황된 꿈으로 일축했고 전제정의 수호를 외쳤다. 차르의 이 선언에 보수파는 환호했지만 자유주의 세력은 경악했다. 그들은 황제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으나, 이는 예정된 결말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부친 알렉산드르 3세를 가르쳤던 극우파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사상에 물든 사람이었다. 니콜라이는 러시아 정교회와 차리즘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주변의 황족들은 젬스트보 의원들이 입헌과 개혁을 요청하는 것을 반역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9개 주 젬스트보의 청원서 운동은 지나치게 순진했으며 지나치게 무계획적이었다.'''나는 국가의 통치에 젬스트보의 대표들을 참여시켜 달라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젬스트보 회의에서 자신들의 망상을 이야기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민의 복지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나는 영면해 계신 나의 선친이 그랬던 것처럼 전제정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 흔들림 없이 수호할 것임을 모두에게 선언합니다.'''
차르는 '젬스트보의 반란'을 진압했으니 더 이상 개혁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선언은 심각한 실수였다. 차르가 젬스트보의 요청을 '허황된 꿈'으로 치부한 지 이틀 뒤인 1895년 1월 19일에 익명으로 쓰인 편지가 공개되었다. 편지는 차르의 선언이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을 박살내고 러시아 사회의 발전을 저지했다고 평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글쓴이는 편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차르는 자신의 가장 큰 우군이 될 수 있는 지방 의회의 자유주의 세력을 적으로 돌렸다. 원래 청원서 운동을 시작한 젬스트보 의원들은 체제 자체를 변화시킬 생각은 없었으며 대신 러시아 전제정을 인정하고 체제 내부의 변화를 추구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비밀 경찰이 활동하고 관료들이 모든 권력을 갖는 관료제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가 인정받고 관료들의 전횡이 없는 법치 국가로 변화하기를 소망했다.'''당신이 먼저 싸움을 시작했고, 싸움은 스스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젬스트보에는 서유럽식 입헌제를 원한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지만, 이들도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지 군주의 권력을 강력히 제한하는 급진적 개혁을 할 생각은 없었다. 또한 젬스트보 자유주의 세력의 거물인 드미트리 시포프와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여러 의원들, 청원 운동에 참여한 보수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서유럽식 입헌과 자유주의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황제와 인민 사이의 원활한 의사 소통이 이뤄지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지켜지며 마지막으로 젬스키 나찰니크를 비롯한 관료들의 전횡이 사라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즉, 차르는 아주 작은 양보를 하는 것으로도 지지 세력을 확대하고 정권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으나, 첫번째 공식석상부터 그러한 행운을 스스로의 손으로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젬스트보 자유주의 세력은 전제정에 맞서 싸울 것임을 선언했으며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제정 러시아의 실태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의 투쟁은 혁명이 일어나던 1905년까지 이어졌으며 혁명 이후 두마가 설립되고 나서부터는 10월당과 러시아 입헌 민주당에 입당해 개혁을 추진했다.
3.2. 피의 일요일 사건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차르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쳤던 사건. 이 사건을 기점으로 니콜라이 2세의 평판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3.3. 10월 테제와 블리긴[9] 두마
3.4. 최후
1917년 2월[10]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퇴위하여, 우랄 산맥 근처의 토볼스크에 연금되었다. 사실 처음에 그는 제위를 막내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넘기려 하였으나, 이미 차르 일가에 대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론은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는 것 정도로 돌아올 리가 없었고, 결국 미하일 대공이 제위 계승을 거부하고(어디서 똥을 뿌려...) 제정 폐지 요구를 수락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외가인 영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했다. 물론 사촌형이자 니콜라이 2세와 친밀한 사이였던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사촌동생 일가를 모두 구하고 싶었고, 당시 수상이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망명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영국 정부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왕실 비서실장이었던 스탬포덤 경(Lord Stamfordam)이 이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 제국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감정이 굉장히 나빠지면서 왕실에 대한 반감도 함께 커졌기 때문이었다. 하노버 왕조 이래 영국 왕실은 독일계였으며, 특히 왕실의 배우자들은 대체로 독일 또는 북유럽 출신이었다.[11] 당시 왕가의 성도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독일인)의 성을 따서 작센코부르크고타 또는 영어식으로 색스코버그고타(Saxe-Coburg and Gotha)를 썼고[12] , 왕가 인사들은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에도 익숙했다. 조지 5세의 왕비였던 테크의 메리도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는 독일인이었고, 자신도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던[13]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폐위된 러시아 황제를 입국시키는 것은, 군주정 폐지 여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14]
스탬포덤은 광범위한 정보수집 끝에 "전쟁의 시발점이[15] 된 차르를 데려오는 것은 영국에서도 군주제 폐지 운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했고, 결국 조지 5세는 망명 허가를 취소했다.[16]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이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자,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된다.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자(러시아 내전), 볼셰비키는 차르 일가가 반혁명군에 구출될 것을 우려해 여기저기로 옮긴다. 1918년 5월 최후로 도착한 곳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였다. 이때 반혁명군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위협하자, 볼셰비키는 일가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17] 본래 볼셰비키는 차르를 처형하더라도 제대로 재판을 한 뒤 처형시키려 했지만[18] ,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결국 즉결 처형을 택했다.
[image]
처형 직후 찍은 처형 장소
1918년 7월 16일 새벽 2시, 볼셰비키의 보안 조직인 체카 요원들은 취침 중인 이들을 깨우며 "곧 이동할 테니 모두 행장을 갖추고 지하실로 내려오라"고 통보했다. 가족과 시종들이 지하실로 모두 내려오고, 체카 요원들은 니콜라이 2세가 몸이 불편한 부인과 아들을 위해 요청한 의자를 가져다 주었으며 알렉산드라와 알렉세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 직후 체카 책임자인 유롭스키와 그의 부하들은 "니콜라이 로마노프 씨. 반혁명 세력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했소. 그리고 우랄 노동자 소비에트는 당신 일가에게 사형을 선고했소."라고 통보하고는 바로 총을 꺼내들어 난사했다. 니콜라이 2세가 마지막에 남긴 유언은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였다.[19][20] 이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고 한다. 이때 차르와 함께 황후, 공주들, 황태자, 주치의 예브게니 세르게예비치 보트킨, 황후의 시녀 안나 스테파노브나 데미도바, 요리사 이반 미하일로비치 카리토노프, 하인 알렉세이 트루프, 그리고 다른 하인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이렇게 차르 일가를 다급하게 죽인 것은, 당시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이 이들을 구하러 온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별별 이야기들이 많았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공주들은 총에 맞아도 한동안 안 죽었다거나, 보석과 장신구들을 몸에 숨겨서 총알이 튕겨졌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 한동안 살아 있어서 개머리판과 삽자루로 머리를 때려 확실히 죽였다[21] 는 등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졌다. 당시 몇몇 처형인들은 "황제 일가는 전재산을 압류당한 상황이라 몸에 걸친 비싼 보석은 전혀 없었기에, 헛소문이다."라고 일축했으나, 처형 후 시신을 살펴본 유롭스키는 공주들의 속옷(코르셋)에 대량의 보석이 꿰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나중에 찾아낸 보석 전부를 모스크바 크렘린궁 관리자에게 전달했다.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에 가담했다가 1935년에 사망한 에루마코프는 죽기 직전에 "시체를 묻기 위해 군홧발로 걷어차 시체를 굴리자,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던 공주 1명이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였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시체들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기름을 붓고 불태워 대충 파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1개월 후에는 니콜라이 2세로부터 양위받았던 동생 미하일 대공마저 붙잡혀서 역시 처형당했다.
처형 후 볼셰비키 측은 차르는 백군과 내통한 반혁명죄로 처형했다고 공표하였으나 차르 가족들까지 함께 처형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처형 직후에는 차르 가족들은 안전한 곳에 보내졌다고 발표를 했고, 이후에도 멘셰비키가 황제 일가를 죽였다는 되도 않은 거짓말을 하거나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에 그냥 모르쇠로 일관할 정도였다. 이처럼 볼셰비키 측이 차르 일가를 죽여놓고 오리발을 내민 건 무엇보다 '''재판도 없이 차르를 처형하고 일가까지 모조리 죽인 건 볼셰비키 기준으로 봐도 비합법적이고 야만적인 학살 행위였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측이 황제 일가를 처형한 즉시 시신을 불에 태워 유기한 걸 보면[22] 차르 일가 처형에 대한 진상이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히길 바란 모양이나, 차르 처형 일주일 뒤 백군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점령하면서 차르 일가의 처형 사실은 빠르게 알려지게 되었다. 백군 점령 당시 황제 일가의 유해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나 처형 장소가 발견되고 관련 증언까지 나오면서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게 된 것. 게다가 재판했다고 공표했으나 실제로는 재판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그냥 사법살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23] 그러나 실행범들은 모두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했다.[24] 다만 책임자인 유롭스키는 숙청당하지는 않았고[25] , 1938년에 60세를 일기로 죽었다. 유롭스키는 자신이 로마노프 일가를 처형한 것을 평생 후회했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죽었다고 한다. 유롭스키는 황제 일가를 처형하기 2주 전부터 황제 일가와 같이 지냈는데, 니콜라이 2세를 "평범한 신사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고하는 등,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를 제외한 황제 일가를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image]
총살당한 후 그냥 암매장됐던 유해는 나중에 발견되긴 하였으나 황제 일가의 유해인지는 1998년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DNA 검사를 통해 신원 확인이 가능해지자 1998년 검사를 실시하여 황제 일가가 불법처형을 당한 것이 확인되었고, 사후 80년만인 1998년 7월 17일 선대 차르들이 안장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성당에 일가족 모두가 안장되었다. 옐친의 추모사 장면 2015년 9월 23일, 러시아 정교회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가 2007년에 발견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담이지만 니콜라이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니콜라오스(Νικόλαος, Nikolaos)라고 하는데 이 원래 뜻은 '''인민의 승리'''이다. 정말 이름 따라서 인민들이 승리한 셈.
3.5. 사후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에서 황제와 그의 가족들을 순교자로써 시성하였고, 러시아 본토 내에서는 한동안 러시아 제국을 몰락시킨 암군으로 여겨졌지만 소련 해체 이후 동정 여론이 일었고 200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수난자로 인정받아 성인#s-2으로 시성되었다. 국민들의 여론은 일단 희생자라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시성여론까지 일자 '''"나라 말아먹은 인물인데 뭐하러 시성하느냐?"''', '''"무능한 게 성스러운 거냐?"'''면서 냉소적인 입장을 보인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 정교회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7월 17일이다.
2008년 10월 1일 러시아 대법원은 "황제와 그 가족이 부당한 정치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려 정치적으로도 복권되었다.[26] 성인 시성과는 별개로 러시아 내에서도 그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4. 재위 기간 러시아의 경제 상황
5. 가족관계
황태자 시절,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4세#s-4의 4녀인 알릭스와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알릭스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의 장남이 독일 제국 빌헬름 2세이니, 알릭스와 빌헬름 2세는 서로 이종사촌이 된다.
알릭스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가 먼저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왔다. 상대는 알렉산드르 3세의 남동생, 즉 니콜라이 2세(당시 황태자)의 작은아버지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 16살의 니콜라이 황태자와 12살의 알릭스는 이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10년 후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연애결혼이었다. 이 결혼을 위해 알릭스는 이름도 러시아식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 바꾸었고, 러시아어를 공부했으며, 종교도 루터회에서 정교회로 개종했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당시 문란하기로 유명했던 러시아 황실의 풍속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한눈팔지 않고 서로에게만 충실했다. 6년간 딸을 4명이나 낳을 정도로 부부 금슬이 좋았다.
다만 총각 시절에 연애를 했던 적은 있다. 상대는 폴란드 출신 발레리나인 마틸다 크셰신스카인데, 황립 극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야심이 대단한 여성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이가 알릭스에게 반하게 되면서 관계를 정리했지만 마틸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황제의 사촌들과 염문설을 뿌렸고 그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의 자식 블라디미르를 낳기까지도 했다. 마틸다는 결국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21년 오랜 연인인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결혼하여 비록 이름뿐인 황실일지라도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5.1. 형제자매
5.2. 배우자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image]
독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4세#s-4와 영국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의 2남 5녀 중 4녀. 6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이것을 안타까워한 외할머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 등 가깝게 지내 외가인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연애결혼이었고, 남편 니콜라이 2세의 성품 덕에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러나 출중한 외모와 좋은 성격에도 불구하고도 대중에 노출되기를 꺼렸으며, 평생을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았다. 시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고부갈등도 있었고, 딸만 4명을 낳으며 후계자 생산에 대해 압박을 받는 등 마음고생이 많았다.[30] 또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인 혈우병 때문에 어렵게 얻은 막내이자 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는데, 이는 후일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득세하여 러시아 제국을 망치는 배경이 된다.
5.3. OTMAA로 불렸던 자녀들
당대로서는 특이하게 4명의 황녀 모두 성인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았는데, 이는 본인들이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제1차 세계대전 탓에 모든 혼담이 중단되고 웬만한 남성 귀족들이 죄다 전쟁에 나가 죽어버린 탓이 크다. 게다가 3녀 마리야 공주와 4녀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경우는,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러시아 혁명'''이 터져버렸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또한 자녀들이 자신들처럼 연애결혼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정략결혼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동아시아 및 영미권에서는 뛰어난 미모와 비극적인 인생 덕에 팬픽이나 팬아트까지 있을 정도로 나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 반해, 정작 모국인 러시아에서의 인지도는 '''거의 없다.''' 일례로 영, 한 위키백과에서는 OTMA 항목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러시아어 위키백과에서는 니콜라이 2세의 하위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되며, OTMA 관련 정보나 이미지를 러시아어로 검색해서 찾으면 나오는 게 얼마 없고, 영어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국어로 된 정보가 러시아어로 된 정보보다 훨씬 많을 정도.
-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OTMA의 O, 1895년 11월 15일 ~ 1918년 7월 16일)
- 차녀: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OTMA의 T, 1897년 6월 10일 ~ 1918년 7월 16일)
- 3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OTMA의 M, 1899년 6월 26일 ~ 1918년 7월 16일)
- 4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OTMA의 A, 1901년 6월 18일 ~ 1918년 7월 16일)
- 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1904년 8월 12일 ~ 1918년 7월 16일)
6. 기타
젊은 시절 외모가 제프리 다머와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 나오는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설정상 니콜라이 2세의 후손으로 나온다.
베르사유의 장미로 유명한 이케다 리요코의 다른 작품인 오르페우스의 창에서 니콜라이 2세와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황태자 시절인 1891년, 일본 제국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경호를 맡은 일본인 경관 쓰다 산조에게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는데, 먼 훗날 니콜라이 2세의 유해를 확인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입고 있던 셔츠는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는데, 셔츠에는 당시 흘렸던 혈흔이 남아 있다. 이 혈흔에서 채취한 Y염색체로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황족들 등 친척들도 남아 있었지만, 이 셔츠에서 나온 니콜라이 본인의 유전자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부모를 닮아 장신이다. 그리고 딸들도 장신인데, 첫째 딸 올가, 둘째 딸 타티아나, 셋째 딸 마리야가 본인 처럼 장신이다. 다만, 니콜라이의 키는 170대로 친가의 선조들에 비하면 키가 매우 작은 편인데, 증조부 니콜라이 1세나 조부 알렉산드르 2세는 180대 후반의 장신이었고 한술 더 떠서 부친 알렉산드르 3세는 키가 190이 넘는 거한에다가 50이 넘은 나이에 기차 지붕까지 들어올리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같은 망국의 군주라는 점에 있어서 일가와 함께 대한제국의 고종, 순종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삶에는 망국의 군주라는 점 외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고종은 일제에 의한 독살 의혹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한 삶을 살다 갔으며, 순종의 경우 일본 제국의 천황보다는 낮지만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이왕으로 예우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심지어는 메이지 덴노의 배려로 군함을 타고 유럽 여행을 간 적도 있다.
사실 니콜라이 2세는 당시 열강의 군주치고는 꽤나 대한제국에 우호적인 군주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공사였던 베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아관파천 때 고종을 받아줬던 점이나 의화단 운동 때 대한제국에 출병을 권유하는 등 정치적 도움뿐만 아니라 총과 같은 물자적 지원을 제법 해줬다고 한다.
이는 니콜라이 2세가 한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혁명으로 인해서 목숨까지 잃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와도 비교된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인간적인 면모는 굉장히 좋았지만 군주로서는 낙제점에 가까웠다는 점, 아내와 자식들까지 혁명에 휘말려 그 끝이 좋지 못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또 왕비가 외국인이었고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실패했다는 점도 같다."짐은 우리가 조선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프린세스 메이커 5의 오프닝 영상에 나오는 가족 사진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 사진을 패러디했으며, 혁명이 일어나 왕가가 몰살당하고 프린세스 후보인 딸이 게임상의 인간계로 피신했다는 설정이있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 라스푸틴, 그리고 러시아 제국 말기의 모습을 더 알아보고 싶다면 넷플릭스에서 '마지막 차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추천한다. 위에 서술된 내용들을 드라마 형식으로 만들어서 진부하지 않아 쉽게 접근할수있다.
6.1. 도플갱어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종사촌 형인[32] 영국 왕 조지 5세와 쌍둥이라 착각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사실 당대에도 서로를 착각하는 일이 꽤나 잦았다고 한다. 예로 조지 5세의 결혼식에 참석한 니콜라이 2세는 피로연에서 자신을 신랑 조지 5세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느라 고생했다고 하며, 심지어는 러시아 혁명 이후 친정인 덴마크로 망명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고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닮은 이유는 일단 조지 5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다그마르(마리아 표도로브나)가 자매지간인데, 이 자매부터 서로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았고, 둘의 자식인 니콜라이와 조지도 둘 다 어머니를 빼닮은 덕에 이리 비슷한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다만 알렉산드라는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하고 큼직해서 인상이 강했고, 다그마르는 이목구비와 체구가 아담하고 작아서 청순가련한 인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자식들인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를 비교해 봐도 알렉산드라의 아들 조지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다그마르의 아들 니콜라이는 조지에 비해 유순한 인상이다.
물론 외모만 비슷하고 실제 성격은 매우 달랐다. 조지 5세는 군인처럼 엄격하고 괄괄한 성품인데 반해 니콜라이는 비교적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가정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 조지 5세는 자녀들, 특히 장남인 에드워드 8세와의 관계가 개판이었지만 니콜라이는 자식들에겐 매우 인자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군주로서는 조지 5세가 훨씬 훌륭했다. 니콜라이가 러시아를 말아먹고 본인도 가족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은 반면 조지 5세는 대내외 상황이 위태로운 영국을 잘 이끌어가며 천수를 누렸고 그의 손녀는 현재 영국의 여왕이다.
6.2. 음모론
황실 일부 인사들이 생존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33] 그중 유명한 케이스가 아나스타샤 공주(사진 맨 오른쪽). 아나스타샤 공주는 꽤 오랫동안('''자그마치 70년 동안!''') 음모론[34] 의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영화도 있고,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있다!)
게다가 혈우병으로 항상 오늘내일 하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사진 중간,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 또한 적군의 총격을 피해 1977년까지 생존해 있다는 음모론이 있는 등, 아무래도 마지막 황가라는 매력(?)이 원인인 듯하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도 3녀 마리아 공주가 생존하여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설정이 깔려 있다. 이 극장판이 개봉된 1999년만 해도 마리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작내에서 '아나스타샤 공주보다 마리아 공주 생존설이 더 말이 된다'는 발언이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아들 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평생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리아 황태후는 아들, 며느리, 손녀들, 손자가 생존하여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이후 아나스타샤인 척 하는 사기꾼 안나 앤더슨이 접근했으나, 표도로브나는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앤더슨을 만나지 않고 손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1989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나, 마리아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아 음모론을 뒷받침했는데, 결국 2007년 마리아와 알렉세이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가 발견되고 DNA 검사까지 끝나면서 이 음모론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35]
이때 DNA 검사를 위해 샘플로 제출된 DNA는, 다름아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든버러 공 필립 마운트배튼의 것이었다. 꽤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그가 당시 생존해 있는 사람 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 알렉산드라 황후의 첫째 언니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이 필립 공의 외할머니인데, 자매지간인 두 사람이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므로,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타티아나&마리아&아나스타샤&알렉세이와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 공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촌수로 따지면 필립은 알렉산드라의 이종조카손자에 해당한다.
[1] 소련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는데, 유해의 행방을 찾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1990년에 소련이 무너지고 그가 죽은 지 80년이 지난 1998년에야 유해를 수습하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다.[2] 하필 4일 뒤인 30일 있었던 축제에서 1,389명이 죽는 압사사고가 일어났다.[3] 발음으로는 '블릐긴'에 가깝지만 현행 러시아어 표기법은 'ㅢ' 발음을 허용하지 않는다.[4] 1896년 조선을 대표하여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민영익이 직접 니콜라이 2세를 예방하고 남긴 기록에도, 니콜라이 2세는 '매우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5] 두 여동생의 남편중 크세니아 공주의 남편.[6] 스톨리핀이 라스푸틴과 정쟁을 벌인 끝에 그를 수도에서 쫓아내버리자, 니콜라이 2세 본인이 직접 스톨리핀에게 라스푸틴을 도로 불러들이라 요구했지만, 스톨리핀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니콜라이 2세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스톨리핀의 자리와 권력은 그대로 유지시켜 주었고, 결국 라스푸틴은 스톨리핀이 사망한 뒤에야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스톨리핀 사후 라스푸틴이 벌인 비상식적인 권력 행사를 감안하면, 니콜라이 2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톨리핀은 꽤 신뢰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다만 스톨리핀 사후에 니콜라이 2세가 황후와 함께 내심 기뻐했다는 기록(이제 더 이상 개혁을 외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도 남아있다.[7] 이마저도 니콜라이 2세가 주도하여 라스푸틴을 쳐낸 게 아니라 스톨리핀이 주도하여 쳐냈다.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을 쫓아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스톨리핀이 강경하게 라스푸틴 추방을 요구했기에 하는 수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스톨리핀은 테러로 부상을 입은 자신의 딸을 라스푸틴이 강간하려 했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고 라스푸틴 같은 근본 없는 자가 러시아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좌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는 스톨리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스톨리핀의 뜻을 꺾지 못했다. 대신 라스푸틴을 시베리아 구석으로 쫓아내지 않고 라스푸틴의 옛 거주지에 머무르게 해 주고 황실에 자유로이 편지를 보낼 수 있게 해 줄 만큼 편의를 봐 주었다.[8] 출처 :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1차 세계대전>[9] 발음으로는 '블릐긴'에 가깝지만 현행 러시아어 표기법은 'ㅢ' 발음을 허용하지 않는다.[10] 당시 러시아의 구력(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11] 이는 다른 유럽 왕가들은 대체로 가톨릭계라서 개신교인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도 원래 성은 글뤽스부르크라는 독일계이며, 이 왕가는 독일에서 발원해서 덴마크 및 북유럽 여러 곳을 다스렸다.[12] 이후 영국 왕실은 독일계 성을 버리고 윈저를 공식 가문명으로 삼는다.[13]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을 보면 묘사된다.[14]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밖에서도 피의 일요일 사건 등으로 무능하고 잔혹한 군주라는 악평을 받던 것도 한 몫했다.[15] 독일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러시아 제국이 후견국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발동하자, 이를 자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 독일 제국이 러시아 및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프랑스에 모두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대전이 발발했다.[16] 훗날 공개된 왕실 문서로 내각에서 내린 결정이 아닌 조지 5세 본인의 결정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잘못하면 자신의 왕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던 상황이니... 영국 왕실은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여론에 상당히 민감하다. 물론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가 봐도 사형을 적용할 만한 죄가 없어서 처형까지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상황은 악화되고 애초에 볼셰비키 자체가 적군 내에서도 비타협 초과격파였기 때문에 결국 차르 일가는 총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고, 그나마 방계 황족들, 특히 여성 황족들은 추적이 좀 덜해서 니콜라이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사촌 여동생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공주,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공주 등 차르의 직계가 아닌 여성 황족들은 상당수를 망명시킬 수 있었다. 훗날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되자, 조지 5세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던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 일가를 영국 군함에 승선시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훗날 앨리스의 아들 필립은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 되는데, 필립 공도 소련이 싫냐는 질문에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들이 내 가족의 절반을 죽였으니 당연하다’고 답했다. 물론 차르 일가 처형을 지시한 걸로 추정되는 자들은 인터뷰를 할 시점에는 본인들도 날조된 혐의로 차르 일가처럼 비참하게 처형당한 뒤였기는 하다.[17] 레프 트로츠키 등 당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차르 가족. 적어도 암군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집중되어 있던 니콜라이 2세를 언젠가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여 사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고 이런 의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이는 혁명과 내전 당시 러시아 민심 다수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황제 본인이 아닌 황후와 자녀들에 대해서까지 모두 죽이기로 결론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차르를 처형한다고 해도 정식재판을 거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지, 닥치고 총살은 애초에 계획에 없었다. 전쟁 중 급박한 상황에서 내려진 처형 명령은 누구 소행인지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18] 일설에 따르면 레프 트로츠키가 차르 재판에서 검사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한다.[19] 유롭스키가 타고 온 자동차 엔진 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꺼낸 질문이었다.[20] 다른 의견: 빅토르 세르주가 "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라는 기록을 남겼다.[21] 또는 머리를 쏴서 확인사살.[22] 무능한 통치로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니콜라이 2세 본인에 대해서는 처형이 당연시되었으나, 가족들에 대한 처형은 동정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볼셰비키 내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죽이는 게 아니라 추방하거나 어디 연금해두는 게 더 나았다. 당시 황태자 알렉세이는 혈우병이 도져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었고, 딸들은 제위계승권이 아예 없고 망명하더라도 서방에서도 그냥 자국 국민으로 받아줄 뿐 왕족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이미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살려둔다고 쳐도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 전부 처형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면 굳이 공표하지 않고 숨기고, 백군이 망한 뒤에도 입다물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나스타샤나 알렉세이의 생존 루머도 소련 정부가 차르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23] 트로츠키가 의심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지시한 게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고 한다. 또한 처형 명령을 내렸을 법한 고위 인사들 중에 이 사실을 인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24] 스탈린이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차르에 대한 동정심 때문은 물론 아니고, 트로츠키파로 간주한 자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실행범들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25] 대신 딸이 수용소로 끌려갔다.[26]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거세당한 뒤 조용히 살던 황제 일가를 학살한 것의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 정 인민의 적으로 몰아 제거한다고 쳐도 소련은 연좌제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니콜라이 2세 본인이 아닌 가족들은 처형이 아니라 스탈린 시절이라 해도 시베리아 추방대상이었다. 그래서 소련 시절에도 처형을 지시했다고 지목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27] 요절[28] 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아들[29] 당숙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28] 와 결혼해 자녀 7명을 두었다. 이들 중에 큰딸 이리나(1895년 ~ 1970년)는 펠릭스 유스포프(1887년 ~ 1967년) 대공의 아내가 되었다.[30] 알렉산드라 황후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 계승을 외가인 영국의 계승 방식과 혼동했는지, 첫째 올가 공주가 계승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주변으로부터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독촉을 받고서야 비로소 차르 계승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31]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32] 니콜라이가 3살 아래였다.[정답] 세 사진 모두 왼쪽이 니콜라이 2세다. 엄청 닮았지만 그나마 눈이 좀 차이가 있는데, 조지 5세의 눈이 좀 더 부리부리하다.[33] 역사소설가 로버트 매시에 의하면, '''황제 자신이''' 백발 노인으로 런던 거리를 지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34] 사살 직전 도망가서 유럽 어딘가에 살아남았다는 음모론.[35] 한 때 말이 많았지만 관련이 전혀 없었던 마리아 공주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와 달리,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와 가장 유력했던 사람으로 바실리 필라토프가 있다. 이 사람은 확실히 알렉세이는 아니었지만, 현재 상황에서도 최소한 니콜라이 2세의 친족, 즉 황가의 일족인 것까지는 유전자적으로도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