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오 플로카리
1. 개요
이탈리아 국적의 축구선수로, 현 소속팀은 SPAL 2013. 어린 시절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하부 리그를 전전하다 2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세리에 A에 자리를 잡은 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빅리그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공격수이다.[1]
2. 클럽 커리어
열여섯살의 나이에 아베차노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한 플로카리는 2001년 3부리그팀 파엔차로 임대되고, 그곳에서 축구 인생의 은사인 카를로 레뇨 감독을 만나며 득점력을 발휘, 2부리그의 제노아 CFC로 이적하나 다시 자리를 잡지 못하고 3부리그의 리미니로 회귀한다. 2003/04 시즌 리미니에서 잠재력을 폭발시킨 플로카리는 단숨에 리그 최고의 선수로 떠올라 팀의 세리에 B 승격을 이끌고, 2006년 1월 강등권 탈출을 노리던 메시나에 영입되며 세리에 A에 데뷔한다. 05/06 후반기와 06/07 시즌 동안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인 그는 2007년 여름 강등당한 메시나를 떠나 187만 유로에 아탈란타 BC로 합류한다.[2]
아탈란타에서의 그는 스트라이커 시모네 인자기를 보좌하며 두시즌 동안 각각 34경기 8골과 33경기 12골을 기록했고, 명실상부한 팀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2009년 7월, 플로카리는 6년전 처참한 실패와 함께 떠나야했던 제노아 CFC와 1부리그에서 재회한다. 제노아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910만 유로를 지출했으며, 이는 당시 그들의 클럽 레코드였다. 그러나 플로카리는 라파엘 팔라디노, 쥐세페 스콜리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고, 2010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또다시 제노아를 떠나 SS 라치오로 이적한다. 당시 이적은 SS 라치오가 제노아의 플로카리를 임대 후 완전이적 형식으로 영입하고,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라치오의 고란 판데프를, 제노아 CFC가 인테르의 다비드 수아소를 영입하는 삼각 트레이드 형식으로 이뤄졌다.
라치오 이적 직후 플로카리는 리보르노와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집어넣으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골을 많이 넣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후반기 17경기에서 8골을 집어넣는 물오른 결정력을 선보인다. 2010/11 시즌에는 기존 스트라이커들인 리보르 코작, 토마소 로키가 끔찍한 부진을 보이자 플로카리가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되었으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그의 활약은 대단치 못했다. 결국 시즌 종료 뒤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영입되며 파르마 FC로 1년간 임대된다. 파르마에서의 플로카리는 당시 최고의 유망주들인 세바스티안 지오빈코, 조나탕 비아비아니와 삼각편대를 구축하며 28경기 8골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고, 12/13 시즌 당당하게 라치오로 복귀했으나 이번에는 미드필더 다섯명을 놓고 원톱 스트라이커 클로제를 기용하는 팀 전술 때문에 이후 3년간 로테이션 멤버로만 활용된다.
2014년 1월 30일, 전성기의 끝자락에 이른 플로카리는 2백만 유로에 사수올로로 이적한다. 도메니코 베라르디 - 시모네 자자 - 니콜라 산소네의 주전 쓰리톱을 가동하던 사수올로에서는 로테이션으로 훨씬 많은 기회를 부여받고, 2014/15시즌 27경기에 나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노쇠화가 진행되며 2016년 1월 볼로냐 FC로 이적한다. 볼로냐에서도 후보로 기용되었으며, 2017년 1월 세리에 B의 스팔 2013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플로카리는 노익장을 과시, '''16경기에서 7골을 박아넣는 대활약으로 약체 스팔의 기적적인 2부리그 우승과 승격을 이끈다.''' 데뷔 20년차인 베테랑이지만 2부리그쯤은 가뿐히 폭격하는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승격 뒤에도 간간히 출장해 괜찮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황혼기를 불태우고 있다.
3. 국가대표
라치오에서 활약하던 2010년 10월, 북아일랜드 - 세르비아와의 유로 2012 예선전을 앞두고 부상으로 빠진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를 대체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으나 경기 출전은 불발되어 벤치에만 앉아있다 돌아왔다.
후술할 산마리노 공화국 국적 부인과의 결혼으로 산마리노 시민권을 발급받아 산마리노 국가대표팀에도 뽑힐 수 있게 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4. 플레이 스타일
투톱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뛸 때 가장 빛나는 선수로, 넓은 시야와 패스 센스, 탁월한 연계로 공격 작업 및 스트라이커의 득점을 돕는 이타적인 공격수이다. 득점 감각도 나쁘지 않아 스트라이커 역할을 아예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 뭔가를 해결하거나 만들어내는 능력은 부족하다보니 전성기 시절에도 강팀을 상대로 득점력 하락을 감수한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가동하는게 아니라면 원톱으로 나서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득점력의 기복이 굉장히 심한 편이라 좋을 때는 몰아넣다가도 나쁠 때는 페널티킥조차 날려버린다. 즉 플로카리를 성공적으로 기용하려면 기본적으로 위치 선정에 능하고, 포스트 플레이가 탁월하거나 연계가 좋은 최전방 공격수가 한명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런 조건까지 충족시켜 가면서 그를 기용할 감독이나 구단은 많지 않다보니 데뷔 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빅클럽에서 주전으로 자리를 잡기는 어려웠다.
5. 여담
젊은 시절에는 수려한 외모로 상당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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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는 마리아 엘리사 칸티라는 이름의, 2001년 미스 산마리노 출신의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아직까지도 3류 인터넷 언론에서 '축구선수들의 유명하거나 아름다운 WAGs' 를 뽑을때 종종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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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승 기록
- AC 리미니 (2003 ~ 2006)
- 세리에 C: 2004/05
- 수페르코파 디 세리에 C: 2005
- SS 라치오 (2010~2014)
- 코파 이탈리아: 2012/13
- 스팔 2013 (2017~ )
- 세리에 B: 2016/17
7. 같이 보기
[1] 클래스 차이는 나더라도 플로카리와 유사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로 안토니오 디 나탈레를 떠올릴 수 있으나, 2부 리그에서 시작한 디 나탈레와 '''4부 리그'''에서 시작해 1부 리그까지 올라온 플로카리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2] 메시나는 2005/06 시즌에 이미 18위로 강등을 당할 뻔 했으나, 시기 적절하게 칼치오폴리 사건이 터져 유벤투스가 강등당하며 운좋게 살아남은(...) 바로 그 클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