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왕국

 



'''로마 왕국'''
Roma (라틴어)
[image]
로물루스·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물리는 늑대
'''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
'''수도'''
로마
'''공용어'''
고대 라틴어
'''정부 형태'''
선거군주제
'''입법'''
원로원
'''역대 군주'''
로마 7왕
'''종교'''
고대 로마 다신교
'''종족'''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멸망 이후'''
로마 공화국
[image]
1. 개요
2. 건국 신화
3. 역사
4. 왕정의 붕괴와 공화정으로의 변화
5. 국력
6. 관련 문서


1. 개요


고대 로마 '''최초의 시대'''로, 로마 공화국 이전의 로마 7왕들이 통치하던 시대를 일컫는다.

2. 건국 신화


로마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건국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라고 한다.
형제의 외가는 알바 롱가의 왕가이며 아버지는 군신 마르스(또는 아레스)였고, 알바 롱가의 왕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트로이 측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고,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방은 라틴족과 트로이 출신들이 결합한 곳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훗날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조국을 '재건된 트로이'로 여겼다.[1]
리비우스에 따르면 트로이가 망한 뒤 살아남은 두 트로이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 두 왕자가 그리스에 우호적이었던 것을 기억했던 그리스인들은 이 두 왕자를 이탈리아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두 왕자 중 하나는 아이네이아스였는데 그는 중부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이때 알바 롱가라는 도시의 왕이었던 라티누스가 아이네이아스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사위로 삼은 뒤, 자신이 죽게 되자 왕좌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알바 롱가의 왕 라티누스는 라틴족이었는데 라틴이라는 명칭이 이 사람에게서 기원했다.
그 뒤 라티누스의 후손이 대대손손 왕위에 앉았다. 이후 프로카라는 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인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가 내분을 일으켰는데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내쫓은 뒤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를 결혼을 못 하는 여사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레아 실비아의 미모에 반한 마르스가 그녀를 취해 레아 실비아는 두 쌍둥이를 낳게 되었고 그녀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분노한 알바 롱가의 왕 아물리우스는 그 두 형제를 강가에 '노출'을 시켰다.[2]
카피톨리노의 늑대, 늑대(11~12세기), 쌍둥이(15세기)
그러던 중, 그곳을 지나가던 어미 늑대가 형제를 발견하고 젖을 물림으로써 그들은 목숨을 구한다. 이윽고 두 형제를 양치기가 발견하여 두 형제를 자식으로 삼아 키웠는데 그 둘을 각각 로물루스, 레무스라고 이름 짓는다.
쌍둥이 형제는 장성하여 양치기 집단의 두목이 된다. 어느 날 왕위에서 쫒겨난 누미토르가 정착한 땅을 약탈하러 온 레무스를 생포하게 되는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누미토르는 이들이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게 되었고[3] 누미토르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의 원수 아물리우스를 죽이기로 하고,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궁전에 침입하여 아물리우스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누미토르는 아물리우스의 뒤를 이어 알바 롱가의 왕이 되었으며,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이 정착할 도시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로마 시를 건설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753년이라고 한다.
로마(커다란 '''분홍색''')와 알바 롱가 유적(C-3 동남쪽의 '''붉은 글씨''')의 위치.

3. 역사


그러나 이러한 신화와는 달리 고고학적으로는 난민들이 모여 살다가 점점 유입되어 도시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땅을 파보니까 로마에는 소규모 촌락의 흔적이 기원전 80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것이 로마인들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때 로마인들은 초가집과 같이 과 밀짚을 엮은 집에서 살았는데, 당시에는 이것보다 못한 지역도 많았지만 이미 거대한 성을 짓고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중국의 도시들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거창한 신화와는 달리 부랑자, 난민들이 모인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가 보여준다.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마땅한 배필이 없자 로물루스가 꾀를 내어 사비니족의 가족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벌인 틈을 타 무방비가 된 사비니족 여자들을 보쌈해 배필로 삼아 버렸다는 신화다. 이것이 신화에 지나지 않으나 실제 역사에서도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은 각 도시에서 흘러나온 부랑아, 난민들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로마 시가 주변의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건국 시점이 늦은 점, 또한 시의 발전이 강력한 집단의 조직적인 도시 건설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유입된 인구 증가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시설을 건설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마는 7개 언덕이 있었는데 로마로 이주한 사람들은 언덕 꼭대기에서 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방어적인 측면에서 언덕 꼭대기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였고 로마인들도 그리한 것이었다. 게다가 로마 옆을 흐르는 테베레 강은 로마를 빙 둘러 지나가면서 물난리를 자주 일으켰기에 배수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는 이상 저지대에 거주하기란 어려웠다. 처음부터 7개 언덕에 이주한 것은 아니고 다른 부족을 통합하면서 그 부족에게 언덕을 하나씩 내 주게 된다.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 레무스 두 형제는 이후 로물루스가 경계를 침범한 레무스를 죽이고 나라를 통합하였다.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 야산 로마인으로 불리던 퀴리날레 로마인을 통합하였다. 이후 사비니족 등을 통합하였고 카피톨리노 언덕과 밸리안 언덕의 사이에 있던 늪지대의 물을 뺀 다음 땅을 다지고 그곳에 포룸 로마눔을 건설한다. 이 두 언덕은 로물루스, 레무스가 이주했다는 곳으로 이 두 언덕 사이에 있던 부족들이 가장 최고참이었으므로 이 두 언덕 사이의 땅에 이 포룸을 건설한 것이었다. 이 포룸 로마눔에선 모든 종류의 공직 활동이 이루어졌다.
로마는 정착 생활을 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집단이 그 시작이었기에 외부의 인재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고 그 때문에 그리스, 에트루리아인들의 많은 건축술과 정치 체계를 본뜬다. 특히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로마인들은 이름 - 씨족 - 가문 이름으로 나뉜 작명 방식도 카피하게 되고 또한 건축술, 종교, 정치제도의 모든 면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을 따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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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티움 도시들.
로마인들은 건국 이후 전쟁을 통해서 조금씩 주변 작은 마을들을 점령한 뒤 이들을 로마에 강제 이주 시키는 방식으로 인구를 불리게 된다. 그 결과 기원전 600년 즈음엔 인구가 3만 명 정도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에 맞춰 로마는 세르비우스 성벽이라는 7개 언덕 전체를 두르는 커다란 성벽을 축성한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철거할 때까지 로마의 성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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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우스 성벽('''파랑''').
로마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750년부터 500년의 250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하였다고 보는데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당시 왕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7명의 왕 중 첫 번째는 로물루스였다.
왕은 1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상의해 일을 처리하였는데 원로원은 100개의 로마의 유력 부족의 수장들이 한 데 모인 강력한 집단이었다. 이 원로원은 훗날 300명으로 구성된 로마 원로원의 모태가 된다.
5대 왕으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로마인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혼혈인 에트루리아의 유력자였다.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본국의 지위 획득은 힘들다고 평가한 그는 로마로 건너와서 선출 운동을 벌여서 왕에 이른다. 그런데 이후 7대까지의 왕이 모조리 에트루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에트루리아가 로마를 지배한 시기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로마를 특정 부족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족이 화합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보기도 한다.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의 정치제도를 확립시키고 앞서 언급한 세르비우스 성벽을 축성한다.
7대 왕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라고 하는데 왕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인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으로, 원로원을 무시하고 자신 멋대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가 군사 원정을 하는 동안 그 왕의 아들인 섹스투스가 루크레치아라는 명문가 귀족의 안주인을 강간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의 발단은 루크레치아의 남편과 섹스투스가 누구의 부인이 더 예쁜가 내기를 하였고 따라서 두 젊은이가 자신의 부인을 서로에게 보였는데, 이때 루크레치아의 모습을 본 섹스투스는 흑심을 품고 며칠 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집을 방문, 잘 대접받은 뒤 그날 밤 침실로 침입해 단도를 가지고 협박하여 강간한 것이었다. 섹스투스가 떠난 뒤 루크레치아는 하인을 시켜 전장에 나가있던 남편과 시아버지, 그녀 집안의 친척이자 왕의 사위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부른 뒤 복수를 맹세시키고 자결을 하였고, 이에 분노에 끓은 브루투스가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4. 왕정의 붕괴와 공화정으로의 변화


그렇지만 250년에 걸친 왕가가 앞에서 서술한 한 번의 사건으로 뒤엎어지고 공화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일반적으로는 그리스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왕정 붕괴 - 귀족에 의한 공동 통치 -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 수립의 수순으로 점차 민주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민주정화되는 것은 도시국가 형태를 가진 지역에서 발생할 여지가 크다고 보기도 하는데 도시국가의 사활이 달린 전쟁을 시민군이 수행하였고 때문에 시민들의 권력과 발언권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상당히 단정적인 논조로 중동과 다른 지역을 대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특정 국가의 시기에 따른 정치 체제가 이렇게 단순하게 정해지지는 않는다. 지역에 따라서 도시국가나 영토국가가 모두 나타나거나 애매한 형태가 나타나기도 쉽고 이것이 정치 체제와 직결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설명이라고 하기 어려운 내용도 많다.
중동은 넓게 퍼진 평야 지대를 기반으로 잡아 도시국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국가를 형성하여 이 넓은 일대를 통채로 관리하였고 이를 지배층이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명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세습 왕조가 등장해도 유지할 수 있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볼 수도 있다.[4] 하지만 그리스, 이탈리아와 같은 지역은 대규모 평야 지대보다는 하나의 도시가 그들만의 정부가 있는 도시국가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산과 분지들로 이루어져 합쳐지기 어려웠고 수많은 민족들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민족으로 합쳐지지 못하고 뒤섞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역의 도시국가에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도시의 농민들을 소집하여 시민군을 구성한 뒤 나가 싸웠고 전쟁이 끝난 뒤 병사들은 농민으로 탈바꿈하여 농사를 지었다. 로마도 마찬가지로 농민들이 곧 군인인 세계였고 이들은 무장을 자체 조달하였다.
어떤 국가든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쟁에 나서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국가의 흥망에 결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지배층에게 전리품의 분배와 같은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의 왕조가 농민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 체제를 불문하고 시민이 발언권을 얻는 상황은 당시에는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실질적으로 시민들의 대표에 가까웠던 많은 귀족들은 시민들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고 여기에 성공한 귀족들의 영향력은 왕의 세력을 능가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하는 브루투스도 여기에 해당했고 아테네에서도 솔론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는 왕의 존재감이 점차적으로 희미해지게 되었다.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정을 거쳐 시민들이 투표로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정이 나타났고 결국 기원전 500년쯤엔 왕정이 붕괴되고 만다.
그리스에서는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정을 형성했다가 귀족들도 권력을 잃게 되고 시민들이 주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로마는 귀족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였는데 로마 특유의 파트로누스(영어 patron(후원자)의 어원), 클리엔테스(영어 client(고객)의 어원)의 씨족 연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유력 귀족 집안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평민들의 뒤를 봐주면 그 평민들은 이러한 귀족 집안에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이 귀족을 파트로누스, 평민을 클리엔테스라고 부른다. 이 파트로누스는 최대한 많은 평민을 클리엔테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곧 그들의 영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민들은 최대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을 파트로누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다른 평민들과의 분쟁에서 어떤 파트로누스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에선 거의 모든 평민들은 뒤를 봐주는 파트로누스 집안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비록 공화정으로 바뀌어도 이 파트로누스 노릇을 하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던 그리스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런 면에서도 지역적 특성이 반드시 정치 체제를 결정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강력한 귀족의 존재 때문에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강력한 귀족 집단이 존재하였고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한 반목 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리품과 획득한 영토의 배분 문제였는데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사용하여 전리품 가운데 가장 값나가는 것과 기름진 땅은 자신들이 갖고 평민들에겐 나머지만 분배할 뿐이었다. 또한 귀족은 평민들에게 고이자로 돈을 꿔주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폐해진 농토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게 하고 돈을 못 갚으면 그들의 영토를 몰수한 뒤 노예로 삼는 짓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로마 평민들은 전쟁 수행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는 방법을 써서 그들의 권리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끝까지 로마의 문제가 되어 로마멸망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평민이 빠진 로마 군대는 켈트족에게 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후에는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과 평민 집회가 생겼으며, 이후 법적으로 평민귀족의 차이점을 없애버렸다. 평민도 호민관을 역임하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평민은 들어갈 수 없었다. 여성이나 외국인의 법적 지위는 낮았고 노예제가 있었으므로 평등 국가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평민과 귀족 사이의 계급 장벽이 일단 법적으로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노예는 상당히 많이 존재했고, 극히 일부의 경우는 해방 노예라는 신분을 거쳐서 시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가내 여노예의 자식이 대부분이고,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 등은 전혀 해당 없다. 귀족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명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일 뿐 직접적인 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 및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 그리고 정치적 유력자로서 주변에 모이는 사람 등을 활용해서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일문의 정치 집단이 된다. 이후 일부 평민 계층이 호민관 - 원로원 - 집정관 - 군단 사령관 테크를 타서 유력 가문이 돼버리는 이른바 '''평민 귀족'''이라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 평민 귀족은 '''(새로)함께하는 자 '''라는 의미의 노빌리스(Nobili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귀족을 의미하는 말인 '''노블'''의 어원이 되었다. 참고로 귀족은 파트리키, 평민은 블레브스, 기사계급에퀴테스라 불린다.[5]

5. 국력


건국 직후인 왕정 시대 때도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로마의 지리적인 특성에도 기인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도 비옥한 이탈리아 서부 평야 지역에 있었다. 여기에 테베레 강(라틴어: 티베레/Tiberis)까지 끼고 있어서 이탈리아를 가로지를 때 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 육지를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은 반드시 로마 근처를 거쳐야 했다. 로마를 우회하려면 이탈리아의 정중앙을 가르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Monti Appennini)을 거쳐 가야 해서 로마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로마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이나 동맹 제의에 노출되었고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왕정 시대의 로마는 건국 시기가 수백 년 앞선 에트루리아에 속해 있었던 것에 가까운데 로마의 7명의 역대 왕 중 마지막 세 명이 에트루리아계였고, 에트루리아계 왕이 더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로마는 건축 양식, 도시 건설, 작명, 점술관을 겸직하는 행정관 등 모든 문화 곳곳에서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를 군사적으로 직접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없었는데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북쪽에 위치하여 끊임없는 갈리아족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정복할 여유가 없던 것도 있고 실질적으로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의 왕정 시대에 등장하는 왕들은 한결같이 군사적으론 유능하였으며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서술이 나오지 않는다. 폭정을 해서 왕위에 쫓겨났다는 타르퀴니우스조차 주변의 수많은 도시들을 정복했다고 리비우스가 서술한다. 로마인들이 그들이 받은 패배를 고의로 누락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실제로 로마인들의 군사적인 능력이 주변국들을 압도한 것은 사실로 보이며 왕정이 무너진 해인 기원전 500년쯤엔 이미 라티움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이렇듯 로마의 급성장에는, 로마가 테베레 강을 낀 비옥한 라티움 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농사가 모든 것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비옥한 토지의 유리함을 갖추고 있었던 점, 그리고 외항 오스티아를 쉽게 확보하여 바다를 통한 무역이 용이했다는 점이 주요했다. 또한 로마인들이 외국인들 혹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도 이러한 성장에 한몫을 하였다. 로마에 인구가 적었던 초기엔 타 도시 죄수들의 피난처를 자처하기까지 한다(고대 사회에선 범죄자가 피난처로 지정된 도시로 가면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또한 로마인들은 왕정 시대의 7왕 중 세 명이 라틴족이 아닌 에트루리아인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로마인들은 그들의 왕, 또는 지도층이 그들의 일족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개방적인 모습은 로마가 그들이 점령한 도시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거나 완전 라틴 시민권을[6] 수여하여 그들과 동화시키는, 그 당시로선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로써 로마는 꽤 충성도가 높은 우방국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6. 관련 문서


[1] 물론 고증상으로는 별 의미가 없고, 자신들의 역사가 그만큼 유구하며 문명의 역사도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에 가깝다. 정복한 지역으로만 따지면 후대의 로마가 훨씬 더 거대했다. 다만 로마가 라틴인은커녕 그리스인도 아닌 트로이인의 후계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훗날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고, 슬라브인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고, 튀르크인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는 사태는 그 나름대로 로마의 유구한 전통(?)이라고는 할 수 있다.[2] 이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영아를 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지금의 낙태와 비슷한 개념으로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은 아이를 햇볕에 죽을 때까지 노출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식은 정부에서 묵인하였고 따라서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 인구를 늘리고자 한 아우구스투스가 법으로 금지하였고 훗날 기독교국교로 채택되면서 살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3] 실제 역사라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4] 다만 문명 초창기에는 중동도 도시국가 체제가 대세였던 적이 있다. 수메르 문명만 해도 초기에는 다수의 수메르계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서로 교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여러 지역이 합쳐지기 어렵다.[5] 이전 문서에서 설명된 "신참자"는 Novicius. 영어 Novice의 어원. nobilis는 함께하다(~with us)라는 뜻의 nosco 에서 나온 말로 아예 다른 단어다. #[6] 완전 라틴 시민권은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인의 권리를 부여하는 시민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