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크 알 알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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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셰이쿨 알바니(셰이크 알 알바니)라고도 불리는 무함마드 나시룻딘은 하디스 분류 학자 중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사람이다. 철저한 하디스 고증에 입각한 이슬람 법 해석으로 샤리아를 중시하는 보수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들어야 했다. 이를 테면 "부인을 때리는 데 이유를 묻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는 하디스가 신빙성이 낮은 사실상 가짜 하디스라고 해석한 것을 이유로 그는 '이맘들과 법학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의외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로는 이븐 타이미야와 이븐 카시르를 꼽을 수 있다.
2. 생애
무함마드 나시룻딘의 가족들은 그가 아직 어린 아이이던 시절 아흐메트 조구의 탄압을 피해 시리아로 망명왔으며, 그곳에서 시계를 만들거나 목수 일에 종사하는 일을 하면서 틈틈히 시리아 현지 이슬람 학생들과 어울려 공부를 했다 한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하디스를 공부하기 시작한 알바니는 당시 세속주의 성향이 강했던 시리아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하디스를 해석하고 토론할 수 있었으며, 이슬람 보수주의와 하디스 해석의 모순 사이의 괴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 대학에 유학을 가게 된 그는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는 와중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지배층들이 겉으로는 와하브파 율법을 강제하면서 갖가지 모순적인 생활을 즐기는 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니캅이 이슬람에서 강제된 것이 아니라는 상식적인 견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눈 밖에 났는데, 결국 이 일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교편을 내려놓고 1963년 시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1979년 알 알바니는 시리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이유로 잠시 감옥에 갇혔으나, 딱히 극단주의자도 아닌 그를 감옥에 오래 가두자니 수니파 무슬림들의 불만이 커질 것을 우려한 시리아 정부는 그를 석방하였고, 그는 이웃나라 요르단으로 이주하였다. 1999년 향년 85세로 눈을 감았다.
3. 의의
그가 활동하던 20세기 중반에는 살라피즘이 부흥하고 한창 와하브파 학자들이 점점 힘을 키우며 전통적인 마드하브 체계를 지지하던 학자들과 서로 날선 신경전을 벌이던 때였다. 셰이크 알 알바니는 철저히 고증학에 입각한 하디스 해석으로 한발리 와하프 학파와 하나피파를 중재했으며, 과학적인 방식의 하디스 분석과 해석으로 하디스 분류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아랍인이 아니었음에도 어지간한 아랍인 무슬림 학자들보다 아랍인들에게 더 존경받았다는 데서 그의 학문의 깊이와 명성을 알 수 있다. 알 알바니 본인도 살라프파였지만, 당시 이집트의 살라프파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사이드 쿠틉의 모순적인 증오 선동과는 선을 그었다. 특히 사이드 쿠틉이 죽은 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를 순교자인냥 미화하는 행태를 크게 비판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시리아 정부에 대해서도 항상 학문적 소신을 가지고 말하는 등 '당대의 양심이자 소신 있는 학자'라는 평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