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쿠틉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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سيد قطب
사이드 쿠틉(Sayyid Quṭb 1906년 10월 9일~1966년 8월 29일)
이집트 남부 출신의 무슬림이자 저술가이며 이슬람 원리주의자. 현대 이슬람 테러 단체들인 알 카에다, 탈레반, 다에시 등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며 이슬람권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과 지하드 알 니카의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
2. 생애
사이드 쿠틉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이집트 남부 태생이었으며, 이런 환경으로 인해서 엄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을 띄게 되었다. 42세가 되던 해인 1948년, 사이드 쿠틉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사이드 쿠틉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대하여 크게 나쁜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1950년까지 2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사이드 쿠틉은 미국과 서구에 대해 큰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일단 사이드 쿠틉은 성격이 내성적이고 체격이 왜소한데다가 외모도 흑인과 비슷하여 당시 미국 사회 분위기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안 맞는 사람이었다.[1]
비평가들은 사이드 쿠틉의 미국에 대한 증오심의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이집트 남부 출신 사이트 쿠틉의 미국인들의 성적 방탕함에 대한 경멸감이었다. 남녀간의 성적 접촉을 엄격히 제한하는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자란 사이드 쿠틉한테 섹스를 그저 하룻밤의 놀이 정도로 여기는 자유분방한 미국인들은 수치심이나 도덕심을 모르는 짐승 같은 저급한 족속으로 비추어졌다. 다만 사이드 쿠틉이 음란한 미국여성들이 자신에게 프리 섹스를 제안하며 접근했으나 자신은 도덕적이고 신앙심이 깊어 거절했다 같은 식의 주장은 본인 주장 외에 실제로 근거는 없다. 오히려 백인 여자에 접근했다가 대한 망상과 따돌림에 대한 분노로 허언증에 가까운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사이드 쿠틉이 방문한 미국 개신교 교회에서도 남녀 신도들끼리 서로 끌어안고 음악을 틀어놓은 상태로 춤을 추는 광경이 벌어졌는데[2] , 이 또한 사이드 쿠틉 입장에서는 좋은 선동거리이자, 자신의 유학 생활 실패를 합리화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사이드 쿠틉은 이집트의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미국인 남녀들은 오로지 서로의 육감적이고 강한 육체와 육체를 유혹하고 탐하는 동물적인 색욕의 노예들로써 그들의 도덕과 윤리 수준은 짐승보다 못하다."라고 혐오와 경멸의 어조로 말했다.
둘째는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잔존하고 있는데,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백인과 흑인의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3] 가 일상에서 태연하게 벌어질 만큼, 인종차별이 매우 심각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으로 건너 간 사이드 쿠틉은 그의 외모가 흑인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바람에 백인들로부터 흑인으로 간주되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등의 차별을 자주 받고, 미국에 큰 분노와 증오를 품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는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정책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반유대주의가 약해지고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국가들과 적대적인 이스라엘에 미국이 엄청난 지원을 하자, 사이드 쿠틉은 미국이 이슬람의 적과 손을 잡았으니 자연히 이슬람교도인 자신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단단히 굳혀 버렸다.
그리하여 1950년 이후 이집트로 돌아온 사이드 쿠틉은 자신이 미국 체류 중에 느낀 반미-반서구 감정을 ‘진실의 이정표’(1990년대 지칭법) 혹은‘진리를 향한 이정표’[4] 라는 책으로 정리해 출간했다.
이 책 <진리를 향한 이정표>의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과 유럽 등 서구의 백인 기독교 문명권은 모든 이슬람교도들의 적이다. 그들은 원시적인 욕망에만 집착하는 저질스러운 자들이고, 전혀 도덕이나 윤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다. 또한 그들은 아랍 이슬람권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 착취하였으니,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서구의 백인 기독교 문명권과 싸워 멸망시켜야 한다.”였다.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세속주의 이슬람 정책을 펴던 이집트 정부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은 <진리를 향한 이정표>를 정부의 감시를 피해 몰래 인쇄하여 자기들끼리 돌려보면서 그들의 반미-반서구 사상의 기반을 다지는데 이용했다.
그러자 이슬람 테러 집단들의 난립을 두려워한 이집트 정부는 1966년 사이드 쿠틉을 가말 압델 나세르를 암살하고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으나, 오히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중동 각지에서는 사이드 쿠틉을 성자로 추앙하며 그가 외친 반미-반서구 감정에 입각한 테러를 벌이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만 급격히 증가하고 말았다. [5]
3.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
사이드 쿠틉의 이슬람 극단주의는 그의 대표적인 길가의 이정표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현대 이슬람 또는 비이슬람국가의 사회, 정치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본적 통치개념은 비이슬람적인 것이다. 이슬람이 아닌 것은 죄악, 불의, 고토이고, 이슬람의 신성한 가르침에 대한 무지의 세계이다. 비이슬람과 이슬람 사이에 절충과 화해는 있을 수 없고, 오직 한 가지 개념을 제거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 진정한 이슬람은 전세계에 널리 전파될 것이다.
진정한 무슬림의 의무는 이슬람으로의 교화와 전향을 위한 선교와 지하드를 통해 비무슬림 사회를 일소하고 이슬람사회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행동과 근본주의 혁명으로 발생한다.
지하드는 오직 이슬람만이 전파되도록 전세계를 지속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해석은 전부 다 왜곡이며 배격되어야 한다.
당시 무슬림들이 다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이딴 주장이 인기를 끌었나 아연실색할 수도 있는데, 사이드 쿠틉이 활동하는 당시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중동전쟁에서의 대패, 4차 중동전쟁에서 통렬하게 이기는가 싶더니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으로 결국 목표 달성이 실패한 등등으로 아랍인들 사이에 정신적 공황이 생기던 상태였다. 사회가 혼란하면 사이비 종교가 부흥하기 마련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사이드 쿠틉의 사상은 인과관계와 논리성이 결여된, 감성만 자극하는 증오발언이 가득하다는 점에서 인기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 없었다.유대인과 기독교인은 거짓된 불신자들로 지옥의 백성들이다.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연구는 전부 배제되어야 하며 그저 잡다한 순수학문 분야에서만 참고할 수 있다.
사이드 쿠틉의 사이비 근본주의 신학은 60년대 당시에는 무슬림 국가들의 군부독재자들의 우민화 정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를테면 아불 알라 마우두디 같은 어용 신학자들이 사이드 쿠틉의 이론을 개량하여, 파키스탄의 군사 독재자들의 우민화 정책을 옹호하였다. '무슬림 인구가 다수라 하더라도 힌두교와 시크교, 기독교 신자가 공존해야 한다.'는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건국 이념은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는 미명을 내세우며 파키스탄 군부의 공교육 예산 비율 삭감을 미화하였다.[6] 문맹률이 50% 이하로 감소하는 시점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우려하던 파키스탄 군사독재자들 입장에서 아불 알라 마우두디만한 효자가 없었다. 사이드 쿠틉이 콥트교 박해를 주장하면서 근본주의자들에게 인기를 모았던 것을 모방하여 아불 알라 마우두디도 파키스탄 내 아흐마디야 수피 교단에 대한 박해를 주동하였다. 그가 이끌던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이슬람 소수종파 아흐마디야에 대한 강경 탄압을 주장한 것으로 악명 높은데[7] , 파키스탄의 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 아브두스 살람이 아흐마디야 신도라는 이유만으로 기록말살형을 주도했으며, 군부 독재 정권을 부추겨서 아흐마디야 신도는 여권을 일부러 다른 파키스탄 국민들과는 다르게 따로 발급받도록 만들었다.[8]
사이드 쿠틉이 상상했던 이상적인 지상낙원이 21세기 초반 출현한 적도 있다. 그의 사이비 사상은 바로 '''탈레반, 알카에다 그리고 다에시 형성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4. 여담
당대에 저명한 하디스 학자로 유명했던 셰이크 알 알바니는 사이드 쿠틉의 살아생전에는 그에 대해 별다른 코멘트를 하진 않았으나, 사이드 쿠틉 사후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를 순교자인냥 미화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사이드 쿠틉에 영향을 받아 21세기 초 등장한 희대의 막장 쓰레기 집단이 꾸란과 하디스를 내용도 씹어먹고 사이비 집단으로 전락한 것을 생각하면, 당시 하디스 전문가 알바니의 우려가 다 이유가 있었다 볼 수 있다.
5. 참고 문헌
- 악마와의 동침/ 로버트 베어[9] 저/ 곽인찬 역/ 중심/ 2004년 4월 19일
- 문명전쟁: 알 카에다에서 9·11까지/ 로렌스 라이트 저/ 하정임 역/ 다른/ 2009년 9월 11일
- 라이벌 국가들의 세계사/ 도현신 저/ 시대의창/ 2019년 8월 01일
- 이슬람/ 손주영 저/ 일조각/ 2005년 2월 28일
[1] 이집트 남부 출신들은 조상 중에 누비아인이 있는 경우도 많고, 농촌 사회 중심이다보니 이집트 내에서도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놀림을 좀 받는 편이긴 하다.[2] 아마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를 방문한 것 같은데, 사실 개신교 내에서도 남녀 신도들끼리의 접촉이나 성문제에 굉장히 엄격한 보수적인 교회들은 사이드 쿠틉이 목격했던 댄스 같은 일들을 허용하지 않는다.[3] 흔히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하면 남아공을 떠돌리는 사람들이 많으나, 사실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벌어지기 전의 미국도 사정은 비슷했다.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명목상 투표권이 보장되어있기는 하지만 노골적인 방해로 투표에 참여할수 없거나 참여하기 힘들었고, 북부의 흑인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으니 북부의 흑인들조차도 상당수는 차별과 가난에 찌들리는 등 사정은 좋지 못했다.[4] 다만 이 책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이드 쿠틉이 결코 인종이나 종교 간의 평등을 주장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이드 쿠틉은 어디까지나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이자, "'이슬람교야말로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라는 우월의식을 강하게 품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이드 쿠틉은 자신의 책인 <진리를 향한 이정표>에서 과거 이슬람 아랍 제국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부린 일을 두고 "이슬람교는 미개한 흑인들에게 문명을 전해 주었다."라고 정당화했다.[5] 실제로 조승희가 쓴 글과 사이드 쿠틉이 쓴 글은 어조, 서술 배경이 상당히 비슷하고, 조승희의 각본을 나름 잘 썼다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사이드 쿠틉의 글도 유체이탈 수준의 횡설수설하는 글은 아니다. 사고방식이 치졸해서 그렇지 나름 고등교육은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6] 당시 파키스탄 군사독재 정권은 미국에 공군기지를 임대하는 대가로 상당한 원조금을 받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 국가 예산 대부분을 발전소나 학교를 짓는 대신 국방비로 몰빵하였다. 그 결과로 파키스탄은 20세기 후반에도 문맹률이 80% 정도에 달했다.[7] 그래서 파키스탄의 아흐마디야 무슬림들에게는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다.[8] 사우디아라비아로 성지순례를 금지시킬 목적.[9] 미국 CIA 요원으로 사우디와 요르단 등 중동 지역에 20년 동안 파견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우디 왕가의 부패와 타락 및 이슬람 원리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