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

 

'''이름'''
임용한 (林容漢)
'''출생'''
1961년 12월 9일 (62세)
'''별명'''
삼국지 아저씨
'''학력'''
마포고등학교(졸업)
연세대학교 신학과, 사학과(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석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박사)
'''링크'''
[1] [2]
1. 개요
2. 전쟁사 관련 연구 행적
3. 저서
4. 출연 및 강의
4.1. 과거 출연
5. 논쟁거리
6. 기타
7. 어록
8. 출연 프로그램
8.1. 방송
8.2.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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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역사학자. 1980년에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해[3] 졸업하고, 이후 사학을 다시 전공하여[4] 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거쳐,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 공군사관학교 강사, 한국 군사사학회 이사와 한국 경영사학회 기업사 연구회 부회장을 겸임하면서, KJ인문경영연구원(한국역사고전연구소)의 대표를 맡아 운영하며 각종 오프라인 강연과 국내 및 해외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인문채널휴 유튜브 채널에서 '임용한의 전쟁사', '유튜브 한국사', '인문학 특강' 등의 컨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국방TV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 8시에 방영하는 토크멘터리 전쟁사[5]에 고정 출연 중이고, 최근에는 순삭밀톡, 삼국지뒤집기에서 단독진행을 맡고 있다. 2018년 7월부터 팟빵에서 임용한 이세환의 비디오가게라는 전쟁영화[6]를 리뷰하는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다가 2019년 2월에 유튜브[7]로 플랫폼을 옮겼다.
그 외에도 SERICEO에서 <전쟁과 경영>,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강연을 하였고, 동아 비즈니스 리뷰(DBR)에서 <전쟁과 경영> 칼럼, 이코노미 조선에서 <WAR&STRATEGY> 칼럼, 동아일보에서 <임용한의 전쟁사>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각종 지상파 및 종편에도 출연하면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2. 전쟁사 관련 연구 행적


전쟁사 저작이 히트를 치면서 대중적으로는 전쟁사, 그것도 한국전쟁사 쪽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 알려진 계기도 《전쟁과 역사》라는 한국 전쟁사 관련 서적 때문이다.[8] 현실적인 통찰력과 예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그 누구보다 본질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색다른 시각이 신선한 충격을 준다.
신라의 화랑은 우리가 흔히 배우듯 전체주의적으로 창설된 무사 집단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화랑이라는 정체가 다소 불분명한 집단은, 진골로 대표되는 특권/지배계층은 매우 협소하고 계급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고대신라의 고착된 신분제 하에서 차상위계층이 신분상승을 위해 전쟁에 투신할 수 있는 창구의 역할을 하였고, 이것이 작고 약하며 가장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대당강경파로 유명한 연개소문은 실제로는 당과의 평화를 추진하면서 일가의 직할지를 확보하기 위해 신라 침공을 주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9]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독재정권에서 수반되는 내부적 갈등과 분열의 정황으로 보았다. 연개소문의 집권이 당 침공의 명분이 된 것 뿐 아니라 고구려의 국방 약화로 이어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궁예는 단순히 미치광이가 되어 폭정을 저지르다가 쫓겨난 것이 아니라, 도적떼 두목에서 영역국가의 왕으로 발전해 나감에 따라 통치방법도 그에 맞춰 진화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타락(?)의 원인을 지적했다. 그 때문에 체계적인 국가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국정이 한계에 달하고 민심이 이반되자 의심이 늘어 왕건과 같은 최고위 장수를 조폭 충성 서약을 받듯 유치하고 험악하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처인 강비와 아들까지 죽이기에 이르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륵을 자처하며 종교적 권위와 관심법과 같은 초능력(!)에 의지하는 등의 폭정으로 치달았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인구는 몰리는데 강이 없어서 물류 운송이 불편하여 쌀값이 안정되지 못하고 천정부지로 뛰는 철원을 도읍지로 정한 것부터가 궁예가 도적떼 두목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증거이며, 궁예가 민심을 잃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서희의 진정한 공은, 거란 1차 침입 때 소손녕을 세 치 혀로 정통성과 명분 싸움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10], 거란의 침공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는 명분과 실리를 주어 소손녕을 철군시킨 것[11], 그리고 동시에 고려가 청천강 이북 평안북도 지방을 확보하고 강동 6주라는 강력한 북방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후 지속되는 전쟁에서 고려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12], 거란의 3차에 걸친 침입을 물리친 최고 공로자는 서희라고 평가하였다.[13]

 서희의 전기들을 보면 세 치 혀로 나라를 구했다는 식의 표현이 많은데, 그것이 오히려 서희의 공과 노력을 폄하하는 역할을 한다. 강동6주를 확보하고, 이 2년 동안 평북지역 개척과 축성작업에 바친 서희의 노력이야말로 선구자적인 업적이었고, 역사적 값어치도 높았다.

 만약 이 방어선이 없었더라면, 거란군이 이 난코스를 그냥 통과하고 청천강이나 서경 앞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더라면, 거란군은 몇 번이고 개경을 함락했을 것이고, 중부 이남지역까지도 손쉽게 진출했을 것이다.

 보통 역사책에서 서희는 거란의 1차 침공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건 잘못되었다. 거란전쟁을 통털어 최고 수훈자는 서희다. 서희가 확보하고 개척한 강동6주가 여섯 번에 걸친 거란의 침공에서 고려를 구했다. 이 완고한 방어선과 험로가 없었다면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있을 수 없었다. 그의 통찰력과 안목이 고려와 그의 후손을 구한 것이다. 더욱이 그의 외교적 승리는 국가적 외교정책이란 것이 없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더욱 값진 것이었다.[14]

윤관과 오연총의 여진정벌이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도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해설을 내놓았다. 별무반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군은 강해서 얼마 후에 금을 건국하고 거란과 북송을 멸망시키는 여진을 두렵게 할 정도로 잘 싸웠으나, 애초에 지형정보가 잘못되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동북 9성은 동서 방향으로 일자처럼 늘어서 있는데, 가장 먼 길주성의 출구쪽이 병목 지역이라 그곳만 막으면 동북 9성이 깊은 종심을 형성하는 방어선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막상 점령하고 보니 동북 9성 모두가 북쪽으로부터 여진의 공격에 노출되어 모든 성이 고립되었으며, 서로 구원하거나 후방 지원을 받기가 불가능하였다. 결국 고려는 수많은 위기상황을 간신히 버티다가 동북 9성을 반환하였는데, 여진도 고려군의 용맹함에 탄복하여 남은 고려인들을 해치지 않고 되돌려 보냈으며, 금이 건국된 후에도 고려를 침공하지 않고 중원으로 진출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진정벌 과정에서 소드마스터 척준경의 일화들을 자세히 소개하여 그가 재조명받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연개소문, 왕건, 공민왕, 세조에 대한 비판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였다(연개소문에 관한 내용은 상술한 내용 참조). 왕건은 궁예와 견훤보다는 통치자로서 비교우위에 설 수 있었기에 후삼국의 최종승자가 되었으나, 후대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혼인정책과 후계대책으로 본인 사후 혜종-정종-광종-경종으로 이어지는 왕실의 분열과 내홍을 낳았고, 그로 말미암아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행정망 및 동원체제를 갖추는 것이 매우 지연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게다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에 후방의 여진과 고려를 손볼 것이 뻔한 북방의 라이징스타 거란에 대해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기는커녕 만부교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불태우고 이를 국시로 삼았다. 결국 전국행정망이 정비되지도 않고 전쟁 준비도 안 된 상태로 개성과 황해도의 직할 및 중앙세력만으로 힘겹게 싸우다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며, 최종적으로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상처뿐인 승리에 그치게 된 거란전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왕건을 지목하였다(경종 다음 왕인 성종이 처음으로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거란전쟁은 바로 이 성종 대에 시작되었다).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와 북로남왜라는 격변기에 반원정책과 왕권강화라는 기조는 제대로 잡았으나 너무 음험한 숙청과 배신의 정치를 반복하다(흥왕사의 변도 공민왕이 김용을 이용해 벌인 자작극으로 봤다) 정치는 나락으로 빠지고 본인도 살해되었다고 보았으며, 공민왕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부국강병보다는 중국 황제와 같은 전제왕권이었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선국왕이야기》에서는 세종이 진정으로 위대한 군주였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런 세종의 노력과 장점은 정작 -그토록 세종을 치켜세우며 존경해 마지않는- 우리들의 뇌리 속에서 실종되어 있다고 꼬집었다. 그리고 세조는 문무겸비라고 자뻑이 강했는데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의 자질은 문종보다 훨씬 못했으며,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사고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왕권의 강화라는 것도 계유정난 공신들에게 과도한 권력과 특권을 몰아주고 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구조였고, 이것이 바람직한 구도도 아니었을 뿐더러 훈구파를 대두시키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고려현종을 재조명하였다. 그는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의 피를 동시에 가진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아이일 때부터 암살의 위험을 수 차례 겪으며 강조의 반란으로 우연히 왕이 되고 나서 거란의 침공을 피해 나주로 파천을 하기까지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으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과 왕국의 주인이 되어 결국 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었던 이 근성의 인생역경은 신하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다며 최충과 이제현의 평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너무 큰 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현종은 1031년 5월에 사망하였는데, 왕위에 있은 지 22년째 되는 해였지만 그 때 나이가 겨우 40세였다. 현종의 삶과 승리는 그를 따르던 신하들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현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던 문헌공도 최충은 현종의 죽음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국사를 바로잡은 뒤에는 거란과 화친을 맺어 군사들을 쉬게 하고 문학에 힘쓰며 부세와 요역을 경감하며 재주 있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사를 공평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안팎이 무사하였으며 해마다 농사가 잘 되었으니 그(현종)를 주나라의 성왕, 강왕과 한나라의 문제, 경제에 비기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후세의 대유학자 이제현은 최충의 글에 뒤이어서 보다 간결하게 자신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노라." [15]

그가 처음 《전쟁과 역사》 시리즈를 냈을 시기[16]는 한국 대중역사서 시장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때였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저서는 그의 《전쟁과 역사》 시리즈가 거의 유일하다시피했을 정도. 2012년 12월에 기존 《전쟁과 역사》 1권 삼국편의 개정증보판인 《한국고대전쟁사》 3권을 완간했다.
전투를 복기하여 서술하는 능력이 정말 탁월하다. 다른 책들은 그냥 1차 사료에 나와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다 읊는 수준이고, 1차 사료도 두루뭉실하게 기록되어 있어[17] 전투의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반면, 그는 사서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단서나 현장답사에서 얻은 지형 정보를 토대로, 그리고 합리적인 전술적 추정을 더해 입체적으로 전개 상황을 서술하기 때문에 이해가 쉽고 재미있다. 《조선국왕이야기》 1권에서 나하추의 고려 침공 때 이성계가 맞서 싸웠던 함관령 전투나 왜구와의 황산대첩, 《전쟁과 역사》 2권에서 거란 2차 침입의 통주성 전투와 평양성 전투, 거란 3차 침입의 귀주대첩, 《전쟁과 역사》 3권에서 묘청의 난의 평양성 전투, 몽골군과의 귀주성 전투, 그리고 충주성 전투는 그야말로 압권.[18]
전쟁사 뿐 아니라 정치 및 권력구도, 제도 등 일반적인 역사 전반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서도 남다르다. 피상적인 현상에 주목하기보다 항상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물음을 던지고 그 원인을 분석해서 교훈을 준다. 《한국고대전쟁사》에서 통일전쟁기 신라의 복잡한 권력구도와 그 한계, 그리고 거기서 찾을 수 있는 화랑의 의의와 역할에 대한 설명, 《전쟁과 역사》에서 고려 최씨 정권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몽골 항쟁의 추악한 민낯에 대한 고발, 《조선국왕이야기》에서 여말선초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과 각 국왕들의 개성 및 각종 제도에 대한 분석, 《시대의 개혁가들》에서 수많은 개혁가들이 부딪쳤던 현실과 시대적 한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위에 서술된 연개소문, 궁예, 서희, 왕건, 공민왕, 혜종, 세조, 중종 등에 대한 비평 등등. 그의 진가는 그의 저서를 읽어야 알 수 있다.
《시대의 개혁가들》에서 서술했던 박제가에 대한 평전을 아예 새로 쓴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도 출간하였는데, 불만투성이 서얼 실학자로만 알려져 있던 박제가의 불우함 속에 빛나는 남다른 비범함,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조선 사회의 고리타분함과 답답함, 가난함을 매우 인상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에서는 에파미논다스와 알렉산드로스에서부터 한니발과 스키피오, 벨리사리우스, 칭기스칸과 척계광을 거쳐 롬멜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 명장들의 전쟁과 전투를 집필하면서 우리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교훈들을 함께 서술했다.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와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에서는 유명했던 전쟁과 전투에서 얻을 수 있는 인문학적 교훈과 경영, 리더십을 접목시키는 내용을 담았다.
2016년 6월 8일부터 국방TV에서 제작하여 유튜브에서 방영하는 콘텐츠인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이세환 기자와 함께 고정패널로 출연 중이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1부

3. 저서


  • 서울을 읽자: 한성판윤에서 서울시장까지 (1996년.고려원)[19]
  • 조선국왕이야기 (1998년.혜안)[20]
  • 조선국왕이야기2 (1999년.혜안)[21]
  •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1999년.푸른역사)[22]
  • 전쟁과 역사1 : 삼국편 (2001년.혜안)
  •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2002년.혜안)
  • 전쟁과 역사2 : 거란·여진과의 전쟁 (2004년.혜안)
  • 배낭 메고 돌아본 일본 역사 (2006년.혜안)
  • 경제육전과 육전체제의 성립 (2007년.혜안)[23]
  • 전쟁과 역사3 : 전란의 시대 (2008년.혜안)
  •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2008년.혜안)
  • 난세에 길을 찾다 (2009년.시공사)
  • 역사를 속인 위대한 거짓말 (2010년.타임북스)[24]
  •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고려시대 (2011년.웅진지식하우스)[25]
  • 한국고대전쟁사1 : 전쟁의 파도 (2011년.혜안)
  • 한국군사사 (2012년.경인문화사)[26]
  •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2012년.교보문고)
  • 한국고대전쟁사2 : 사상 최대의 전쟁 (2012년.혜안)
  • 시대의 개혁가들 : 역사의 변화를 선택한 사람들 (2012년.시공사)[27]
  • 한국고대전쟁사3 : 부흥운동과 후삼국 (2012년.혜안)
  •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2012년.역사의아침)
  •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 (2014년.위즈덤하우스)
  •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2014년.교보문고)[28]
  • 인도, 신도 인간이 되어 사는 세상 (2014년.혜안)[29]
  • 뇌물의 역사 (2015년.이야기가있는집)[30]
  • 개성부원록 (2015년.혜안)[31]
  • 손자병법 (2015년.올재)
  • 오자병법 (2015년.올재)[32]

4. 출연 및 강의


원래 '임용한의 히스토리아'였는데 오랜 동료 학자인 김인호, 노혜경, 윤훈표 교수와 4인체제로 개편되면서 '인문채널휴'로 개명되었다.

4.1. 과거 출연


  • Red Pig Academy: 영퀴방의 추억 비디오카페[33]
  • 국방TV - 토크멘터리 전쟁사, 순삭밀톡 삼국지 뒤집기, 순삭밀톡 사기 뒤집기, 캐슬 어택
  • 팟빵 - 임용한 이세환의 비디오가게
  • Seripro - 전쟁에서 배우는 경영학
  • EBS - 다큐 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나라 살림살이

5. 논쟁거리


  • 《전쟁과 역사》 1권에서 신라의 정치 상황을 다루면서 주류사학계에서는 위서#s-1(僞書)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주요 자료로 사용하여 비판을 받았다. 개정증보판인 '한국고대전쟁사'에서도 화랑세기를 그대로 인용하였고, 별도의 항목을 만들어 《화랑세기》가 위서일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신라의 정치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이나 고대 사회의 인간 관계 등을 묘사한 것을 보면 화랑세기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 인문채널 휴에서 위서라고 보는 쪽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점은 밝힌 바 있다. 다만 주로 다루는 연구분야가 아니라서 크게 돋보이는 점은 아니고, 위서논쟁을 의식하는지 삼국시대 중후반기관련 토크에서도 굳이 화랑세기나 그 내용을 언급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거의 삼국사기 등 기성 사서에 기반한 이야기로 진행하는 편이다.
  • 2011년에 쓴 타라와 전투에 대한 기사를 보면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사실 그의 본업은 전쟁사가 아니고 조선전기 정치제도다.
> 일본군 시각에서 타라와 전투의 실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방어선의 위치 선정이다. 요새화한 진지 구축을 통한 방어전은 상륙작전을 감행한 적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라와가 4일밖에 버티지 못한 이유는 방어선을 해안에 포진시켰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방어를 원했다면, 해변이 아닌 내륙 산지에 방어선을 둘러쳐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34]
>
> 둘째, 급박하게 바뀌는 위기 상황에 적절히 대응치 못하게 한 경직성이 문제였다. 만약 전투 첫날 미군 상륙부대 1진을 향해 일본군이 과감하게 공격했더라면 미군은 타라와 상륙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일본군들은 매뉴얼에만 집착해 기선을 제압할 기회를 놓쳤다. 타라와 전투 첫날 전세는 일본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미군 스스로도 전멸을 각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뉴얼에 집착해 당시 그들의 전매특허인 만세돌격을 하지 않았다. 도미나리 소장과 시바자키 소장 모두 일본군에서는 드물게 무모한 공격을 싫어하는 장군이었던 탓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35]
>
> 어쨌든 타라와 사건으로 가뜩이나 공격적인 일본군은 이런 태도를 크게 비난하게 된다. 이후 상륙작전에서 일본군은 더더욱 무모한 돌격전술을 선호하게 됐고, 덕분에 일본군은 미군 대비 거의 10대 1의 희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 " '정설'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한다는 본인의 취지와 달리 '정설'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면 자기는 '정설'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라는 반응이 있었고, 이에 대해 아래 링크처럼 직접 답변하기도 했다.
블로그에서 서술한 글의 내용은, '정설'의 권위에 기대어 기존의 정설과 반대되거나 다른 내용의 학설을 주장하는 것을 억압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고민과 뒷이야기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것이 '정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는 학술적으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상대로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고, 본인이 모든 주제에 대해 연구를 해서 정설과는 다른 학설을 제시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어서 기존의 연구 결과에 바탕한 정설에 기반하여 진행하므로, 특별한 이견이나 이상이 없는 이상 '정설'이라고 소개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고, 본인의 평소 신념이나 자세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정설의 가치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이미 남들이 해 놓았을 경우 그것을 먼저 확인하고 흡수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정설이라는 딱지의 유무에 따라 내용물과는 무관하게 계급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정설이라는 것을 권위로 삼아 새로운 판단이 합리적인지 알아볼 여지조차 없애버린다면 그것이 곧 폐해인 것이고, 흔한 이론을 훔쳐다가 개혁인 것처럼 문외한들을 속인다면 그 또한 정설의 악용에 속한다는 이야기다.
  • 토크멘터리 전쟁사 72부를 보면 고려와 몽골제국의 관계에 대해 부마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최강의 동맹관계일 뿐이라 말했으며, 두 나라의 관계가 서로 대등한 사돈의 나라라는 허준 MC의 발언에도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36] 그러나 왕실혼인을 통해 고려의 위상을 밝히려는 연구들을 살펴보면, 고려를 몽골제국의 부마에게 수여된 투하령(投下領)으로 보는 견해(모리히나 마사히코, 2008), ‘부마와 국왕의 이중적 지위’로부터 고려를 외국왕이 통치하는 속국이자 부마의 속령으로 보는 견해(김호동, 2007) 등이 제시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부마를 겸하고 있는 고려국의 왕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이익주(서울시립대 국사학과)의 비판[37]을 감안해도 두 나라의 관계는 결코 대등하고 최강의 사돈동맹관계는 아니었다. 몽골 중세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시잠츠는 고려가 독립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형태로라도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38][39]
  • 국방TV에서 삼국지를 다루고 있는데, 이게 비판의 여지가 간혹 있다. 평소의 지론을 그대로 삼국지에 대입하는데, 그러다 보니 사실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너무 과격한 형태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는 본업이 중국사가 아닌 여말선초 정치제도사라 생기는 문제로 보인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중 앞에 전문가로 이야기하는 자리라면 팩트체크는 좀 더 철저히 하는 것이 학자로서 옳은 일이기는 하다. 아무래도 모르는 것과 잘못 말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학자에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니...
업적 부분만 해도 둔전은 그 기원이 한무제로 거슬러 올라가고, 공손찬도 둔전을 실시했다고 나오며, 둔전(삼국지)문서만 해도 둔전이 조조의 고유 아이디어가 아니라 모개, 한호, 조지, 임준, 창자 등 조조 휘하의 재사들이 시작부터 디테일까지 계속 언급하는 것이 언급되지만, 조조를 띄워주기 위해서인지 제갈량이 조조의 둔전제를 따라했다는 식으로 언급했다.
구품중정제는 더 하다. 구품중정제라는 명칭부터 구품관인법이라는 정식 명칭의 멸칭에 가까운 것일 정도로 구품중정제가 문제가 많은 제도였다는 것은 차처해도, 구품중정제가 조조가 죽은 다음에 나온 제도라는 문제를 뛰어넘을 수 없다. 조조를 높이 평가한다면 당연히 구현령을 언급할 일이지, 이걸 건너뛰고 조조 사후에 나온 구품중정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쉴드 부분만 해도 여백사를 죽인 다음에 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기억도 안 나는 말이라고 하면서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배송지가 주로 인용한 손성의 잡기에 언급된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의 자구 정도의 변형이다. 간웅이라는 표현도 평화로울 때는 평범한 신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라는 말을 뒤틀은 것으로 언급하는데, 정사인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언급이 그대로 나온다. 난세의 영웅이라는 표현은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 등장하는데, 이 경우 풀 내용은 '치세의 간적 난세의 영웅'이다. 있는 표현을 없다고 했고, 인용한 표현은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무제기의 짜깁기다.
>그때는 조조가 그렇게 쎄지 않았어요. 그래도 도겸과 붙을때 조조는 가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나 이번에 죽을지도 몰라 이러고 나가는데 싸우다가 안되니깐 도겸이 여포까지 끌어들이면서 수성전으로 가요. 그러니 조조가 이렇게 싸우다가는 체력 떨어지는 사람이 지고 이렇게 병력을 많이 소비하다보면 나중에 양패부상하거든 그래서 서주에서 초토화 작전을 합니다. 도겸이 성에서 안나오니깐 주변 5개 군현을 싹쓸이해버려요 뭐 만명이 넘게 죽고 강이 시체로 쌓이고 이렇게 되는데 조조는 이거를 학살 행위가 아니라 전술적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적의 전쟁 능력을 없애는 초토화 작전이다. 제가 조조를 도덕적으로 변호하는건 아닌데 현대 사회에서는 50년 전까지 월남전에서도 이걸 썼어요. 요즘 욕먹는 민간인 폭격이 사람 죽일려고 한게 아니라 전쟁 능력을 없앤다는 거잖아요. 조조는 후퇴하면서 그걸 없애서 다음번에 내가 올때 너가 또 박혀있지 못하게 하고 나와 싸우게 하겠다. 그렇게 해서 서주를 점령하고 강적이던 여포까지 무찌르던 자기의 초토화 작전의 결과였다. 적을 치기 전에 적의 전쟁 능력을 없애라. 그래도 이건 도덕적으로 옹호할 순 없지만 당시 전쟁에서는 늘 있던 일이였다.
  • 임용한의 도겸이 여포까지 끌어들였다는 발언의 출처는 제시되지 않았다. 실제 역사 전문가들에 의한 언급과 자료 출처가 있으면 추가할 것.
서주 대학살은 조조의 전략적 선택이었냐, 감정적인 선택이었냐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 전략적 선택이란 해석 자체가 잘못이라고 보는 측은 서주대학살 항목을 참조할 것.
임용한은 서주 대학살에 대해 임용한은 도덕적으로 변호할순 없다라고 하면서도, 전근대 이전엔 종종 있었던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물론 반대로 말하면 그래도 결론은 권력을 위해 학살한 자행한 학살자란 소리라는 반발이 있다.
임용한의 말을 옹호하는 측에선 그는 단지 서주대학살이 적의 전쟁수행능력을 제거하는 '초토화작전'이란 전략적 판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그 판단까지 잘했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선 임용한 본인도 대학살이 전략적으로도 후폭풍이 강했으며 결국 조조가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초토화작전 또한 절대 좋은 작전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물론 서주대학살을 흔한 사건 정도로 치부한 점 등은 논란은 있겠으나 그의 주장이 전반적으로 서주대학살 자체를 옹호하는 입장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들의 의견. 이들에 의하면 임용한 박사가 말하는 '전근대 시대에 학살이 종종 있었다' 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 시대에 그런 사건이 존재했다는 발생여부' 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조가 학살을 한 것은 이런 판단 때문이다' 라는 말은 '조조는 이러한 이유들로 자신의 행동에 근거를 삼았다고 분석된다' 라는 분석이지, '그 때는 그래도 되는 시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거나 '조조의 그 판단이 나은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 아니라는 것이다.
추가로 임용한에 대해 옹호하는 측은, 비판 측에서 베트남 전쟁 등 과거 전쟁들의 학살사례를 제시하는 것이 감정에 호소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시대에 학살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다른 시대에 학살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듯이, 어느 시대에 발생한 학살이 '나쁘다' 라는 것이 어느 시대에 학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하면 나쁘다' 라고 제약할 수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임용한은 학살을 직접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용한의 강의에 대해 오독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 역사적 인물의 선택을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선택한다고 간주하고 있어, 감정적 요소에 의한 선택을 전면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주대학살에 대한 해석이다. 서주 침공이 전략적 판단이라는 주장의 기저에는 조조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며 그러한 판단력에 근거해 서주 침공을 단행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물론 조조는 삼국시대의 대전략가이고 정치가로서 날카로운 판단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사실이나 그에 못지않게 그 예민한 예술가적 감수성 덕분에 일을 그르친 사례도 수두룩했다. 당장 연주목을 칭하자마자 원충 환소 등을 과거에 거슬렸다는 이유로 당시 세상의 끝이나 마찬가지였던 교주까지 쫓아가 죽였고, 좀 더 뒤에는 장제의 처를 취하려 들다가 조앙과 조안민을 잃고 정부인이 등을 돌리기도 했다. 거기에 관도대전에서는 전황이 밀리자 멘탈이 털려 순욱에게 징징거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문제는 후세 사람들이 그런 조조를 매우 이성적인 판단의 인간으로 변모시켰기에 서주대학살 전략설이 등장하게 된다.
  • 국방 TV에서 토크멘터리 전쟁서 일본 전국시대 시리즈도 사실관계가 틀린 얘기를 한 적이 종종 있다.
  • 군사 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올재에서 출간한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번역서에서는 해설을 통해 다소 편향된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역사를 논하면서 평화주의와 군축 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다분히 군사주의적 논리 전개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외에도 독소전쟁을 논하면서 독일 편향적 서술을 하기도 하였다.
  • 역사의 해석에 있어서 결과론적인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어 임용한은 조선시대 태안반도 운하 건설이 실패한 이유가 그 목적이 중국 대운하와 달리 경제성이 아니라 조세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중국 대운하의 목적은 조선 태안반도 운하건설과 같이 조세나 통제와 같은 정치적 목적이었다. 실제로 대운하가 북중국과 남중국을 통일하는 맥으로 활약한 것은 건설 후 수십년이 지난 당 고종시기였다. [40] 또한 태안반도, 판목운하가 건설되었다면 부유한 전남과 경성이 직통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그 물류가 많아졌으며 대동법도 더 빠른 시기에 시행되었을 것이다. 대동법이 시행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대량의 물자가 안전하게 운송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태안반도에 운하가 건설되었다면 조선의 경제발전은 상당히 빨랐을 것이다. 실제로 대동법의 주창자였던 김육은 안면곶에 운하를 건설하였다.[41]


6. 기타


  • '버티는'을 '뻐티는', '지금'을 '직금' 이라고 하는 등 된발음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
  • 함께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출연하는 이세환 기자 만큼은 아니라도 어릴 적에 밀덕끼가 다소 있었던 듯하다. 토전사 중동전쟁편에서 어릴 적에 돈이 없어 F-4 팬텀이 아닌 A-4 스카이호크[42]를 사야 했던 경험담, 그리고 4차 중동전에서 이집트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된 수많은 이스라엘 A-4 뉴스를 접하고 장식장에 놓여있던 A-4 프라모델을 어루만지며 얘가 이렇게 많이 떨어졌구나라고 하며 안타까워 하셨다고...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를 즐겼다라, 이세환 기자와의 팟캐스트 방송 중 총기류에 대한 언급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팟캐스트를 들으면 두 사람이 죽이 잘 맞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토전사 방송 중에는 진중하면서 연배가 낮은 세 진행자의 재롱잔치(...)에 너털웃음을 지으시는 이미지지만 의외로 개구진 면이 있는 듯 보인다. 팟캐스트 때는 이세환에게 갖은 츳코미를 날리며 깨알 같은 재미를 주었다. 이세환도 이에 질세라 렌터카를 운전하는데 난폭운전을 한다고 폭로했다. 그 외에도 팟캐스트 진행 때는 당시 해당 영화를 볼 때 주변 상황을 얘기하시는 이른바 '증언'을 하며 나이를 먹은 게 느껴져서 싫다는 한탄을 하시기도.
  • 토전사 진행자 4명 중 가장 비주얼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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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토전사 초창기 편과 지금의 모습을 보면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변하셨다.
2등은 결혼하면서 헤어스타일을 바꾼 윤지연.
  • 《조선국왕이야기》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영감을 주게 된 책이다. 특히 중종에 대한 해석은 그냥 《조선국왕이야기》의 중종편(곰의 인내와 늑대의 지혜)을 가져다 옮겼다.
  • 2018년 9월 29일에 있던 개인 방송에서 토전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나무위키를 언급한 적이 있다. 다만 나무위키에는 해석은 틀린 게 많아서 안 보고, 대신 사실만 볼 수 있는 정보(이름, 생일 등)만 본다고.
  • 토전사를 같이 진행하는 이세환 기자에 이어 순삭밀톡 코너를 맡았다. 현재는 삼국지 속 인물들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
  • 순삭밀톡에서 우리나라의 여러 산성들을 답사하는 캐슬어택이라는 코너 또한 맡았다. 산을 올라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죽어나가는 제작진들의 깨알 같은 모습은 덤. 어쩐지 주말에 직원들을 데리고 등반하는 부장님 같다는 평이 많다.
  •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임용한의 전쟁사 칼럼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에둘러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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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짤은 한국 정부를 까는 이야기로 쓴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의미에서 한 말도 아니다. 우선 이와 관련된 언급은 토전사에서 여러 번 나왔다. 몇가지 예시로 토크멘터리 23부 포에니전쟁 이후 카르타고가 로마가 무장해제만하면 항복을 받아주겠다는 말에 순순히 따랐을 때 언급되었으며 토크멘터리 71부와 72부에서 다루는 내용인 고려VS몽골전쟁사에서도 언급된다. 당시 몽골의 사신이 고려의 국경지대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고려조정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몽골이 곧바로 대응을 할 것처럼 취하다 갑자기 조용해지니 고려조정에서는 몽골에서도 별로 문제를 삼지 않는다 라고 생각을 하고있었지만 사실은 칸의 죽음으로 인해 몽골이 잠시 철수를 한것이었다. 당시 전근대 사회에서 정보의 교류가 원활하지않고 제한된 정보만을 받는 국가의 상황에서 어떠한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나라의 지도자나 대신들이 사건의 해석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다가 망하는 경향이 있음을 꼬집기 위함이지 단순히 최근의 세계 정세를 가지고 특정한 목적으로 한 말이 아니다.
  • 대중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던 현종 재평가의 주역이다. 임용한 박사의 현종 재평가 이후 고려 현종에 대한 내용이 온라인 상에 많이 퍼져 현재 고려 현종은 광개토대왕, 세종대왕과 같이 위대한 군주로서 기억될 수 있게 되었다.[43]
  •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정리 멘트에서 밝힌 바로는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딱히 믿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전국시대 파트에서도 일본인의 특성은 타고난 민족성이 아니라 제도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 국방TV에서 '삼국지 뒤집기'를 연재하다가 Red Pig Academy로 옮겨 '임용한의 진짜 三國志'를 연재하였다(임용한의 개인 사정상 정욱 편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조조,유비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웅'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였고(다른 인물이나 이야기를 설명하더라도 결국엔 조조나 유비에 대한 고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 반대로 동탁, 공손찬, 원소,유표 등에 대해선 상황에 맞춰서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지 못하고 몰락했다며 혹평을 내렸다. 원술에 대해선 단기적인 이익만 추구하다 남 좋은 일만 해준 인물로 평가하는데, 원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에피소드가 없다보니 원술에 대한 평가가 가장 박한 면이 있다[44]. 여포에 대해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만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본다. 그런데 여포보다 똑똑한 사람이 우리중에 몇이나 될까? 라며 지나친 저평가는 지양한다. 사실 원소나 유표도 권력을 얻는 과정을 설명할 때는 그들의 장점을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 나관중을 역사 소설가로서 매우 높게 평가한다. 종종 나관중을 천재라고 얘기하기도 하며 연의와 정사의 차이점이 나오면 그의 각색이 대단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과는 달리 정치의 필요성을 얘기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굉장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회 속기록을 참고할 일이 있었는데 명분론에만 몰두해 '내가 이런 위대한 법을 만들었소!'라고 외칠 줄만 알지[45] 이 법이 실질적으로 어떤 효과를 불러올지, 어떤 부작용이 생기고 어떤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지에 대한 고려는 하나도 하지 않다가 마지막날 돼서야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이 허용되고 '그냥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끝나는 꼴을 보면서 집어 던지고 다른 속기록을 찾아봤지만 이 패턴을 벗어나는 날이 없었다는 언급을 했다. 조선시대의 명분론에 대해 많은 대중이 답답해하고 분노를 보내는 것에 대해 '역사에 대해 저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라며 진정시키려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데, 현재 진행형인 문제이며 당장 내가 속한 집단의 현황이 그런 폐단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와 비슷하게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인문채널 휴' 등 여러 유튜브 채널에 올리는 영상에서는 영상 주제에 맞춰 역사, 문화, 인문학 또는 보편적인 교훈에 대해 이야기 할 뿐, 현실이나 특정 집단 비판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 연재중인 임용한의 전쟁史에선 정부 비판적 의견을 넣기도 한다. 가령 9월1일 125화 분열된 국가의 운명 라는 글에서 인디언의 분열과 레닌의 국가관에 대해 이야기 하며 현정부의 편가르기가 도를 넘어 없던 갈등까지 만들어서 국민들끼리 싸움을 붙인다 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3306547
  • 인문채널 휴에서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를 평론하면서 밝히길, 자신의 교양역사서 '조선 국왕 이야기'를 출판할 때 이 서적 자체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게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서적을 쓰는 와중에 로마인 이야기가 발매된 것이라며 이를 부정했다. '로마인 이야기'에 대해선 작품의 대중성은 높이 평가했으나, 한편으로 작품내 만연한 사실 왜곡, 인과관계 왜곡, 돌려넣기, 섞어넣기 등을 비판하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선 안되는 작품으로 평가했다.
  • 동생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예비역 공군 대령이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공사 교수부장을 역임했으며 2019년 9월 말 전역했다.

7. 어록


내 수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적이 내 의도대로 움직일 것이라든지, 내 능력 정도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 등)

역사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지 저주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당시 유럽은 이랬는데 조선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의 인식에 대해)

합리와 비합리와의 싸움이 아니라 그쪽 입장에서 합리와 다른쪽 입장에서의 합리와의 싸움이다.

미래의 시각으로 결과를 알기 때문에 결과론 적으로 한쪽이 비합리로 보일진 몰라도 스스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후대인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긴 쪽의 선택지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각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을 많이 착각하는데,

과거에 A라는 행동을 했고 B라는 결과가 나왔으니 A라는 행동을 하자, 하지 말자라는 것이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왜 그 사람들은 A라는 행동을 했는가까지 아는 것이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조선은 국방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8. 출연 프로그램



8.1. 방송



8.2. 유튜브



[1] 인문채널휴[2] Red Pig Academy[3]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진학에 있어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4] '전쟁과 역사', '조선국왕이야기' 등 임용한의 초기 저서들을 보면 분명 연세대 신학과와 사학과를 모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임용한은 감리교 목사이기도 했다. 학부를 두 번 나온 것은 허준과 이세환 기자와의 허준의 허튜브 고인물 방송에서 이야기 중에 나온다.[5] 200회로 종영[6] 전쟁영화를 주로 리뷰하는데, 꼭 전쟁영화로 국한하는 것은 아니고 황야의 7인, 무숙자, 황색리본을 한 여인 등의 서부영화, 007 시리즈, 7인의 사무라이, 코만도, 월드워 Z, 소림사, 동방불패 등의 영화도 리뷰하고 있다.[7] 기존의 인문채널휴 채널[8] 원래 《전쟁과 역사》 1권에서 고조선 멸망부터 후삼국 통일까지 다루었는데, 개정증보판 《한국고대전쟁사》 1-3권으로 그 시기를 더 자세하게 서술했다. 《전쟁과 역사》 2권은 고려시대 거란 1-3차 침입과 여진 정벌을, 《전쟁과 역사》 3권은 묘청의 난, 거란 전쟁, 몽골 항쟁, 삼별초의 난, 홍건적 및 왜구와의 전쟁을 다뤘다.[9] 요동성이 함락당할 때 관리가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 백암성주가 부하들의 눈치를 보며 항복을 번복하다가 당에 항복을 한 것, 고혜진·고연수의 군대가 주필산에서 당군과 대결하다가 궤멸하고 안시성의 기록이 없는 것 등[10] 상식적으로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가 누가 고구려를 계승했는가 말싸움에서 졌다고 조용히 철수하고 영토를 양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회군이나 다름없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다.[11] 손자도 외국과의 분쟁에서 벌모(伐謀)가 최선이고 그 다음으로 벌교(伐交), 벌병(伐兵)이며 공성(攻城)이 최하라고 했다. 서희의 협상은 완벽한 벌모에 해당한다. [12] 서희가 직접 여진을 구축하고 강동 6주 성을 쌓아 고려의 북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참고로 10년 전에 이겸의의 고려군이 이 지역을 침공했다가 대패한 바 있다. 서희는 2년간 이 사업을 진행한 뒤에 병을 얻어 3년간 투병 후 사망했다.[13] 흔히 우리가 배우듯이 서희가 세 치 혀로 나라를 구했다는 식의 표현은 서희의 진정한 공로와 노력을 폄하한다는 것이 그의 일갈이다.[14] 《전쟁과 역사》 2권 108쪽[15] 《전쟁과 역사》 2권 238-239쪽[16] 1권 2001년, 2권 2004년, 3권 2008년[17] 특히 동양의 전투 기록은 정말 성의(?)가 없고, 문관의 시각에서 성리학적 가치에 따라 기록되어 있어 군사학적으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18] 《전쟁과 역사》 1권이나 《한국고대전쟁사》 1-3권은 상대적으로 기록이 너무 소략하고, 지형도 비정되지 않은 고대를 다루다 보니 전투를 복기하여 서술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전쟁의 흐름과 전략 분석에서 빼어난 혜안이 돋보인다. 고수전쟁, 고당전쟁, 성왕, 무왕, 의자왕의 대신라전쟁과 백제부흥운동, 그리고 나당전쟁의 서술 역시 압권.[19] 여현덕, 임용한 공저[20] 태조~예종까지 다뤘다.[21] 성종~인종까지 다뤘다. 본인 말로는 조선국왕 이야기 3권은 너무 힘들어서 언제 쓸지 모른다고 밝혔다.[22] 역사학자 18인 공저[23] 윤훈표, 임용한, 김인호 3인 공저[24] 윌리엄 위어 저, 임용한, 강영주 공역[25]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김인호, 임용한, 한정수 공저[26]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기획, 임용한 총괄 및 공저[27] 2009년 저서 《난세에 길을 찾다》의 개정판.[28] 니탕개의 난, 을묘왜변 등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었다.[29] 임용한, 이혜옥, 노혜경, 김태완, 윤성재 공저[30] 임용한, 김인호, 노혜경 공저[31] 김인호, 노혜경, 윤훈표, 임용한 역[32]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은 역주본으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각 5천 부씩만 발행되었으며 차후에 정식 출판본으로 다시 출간될 예정이다.[33] 인문채널 휴 강의가 많아지면서 하차, 대신 윤지연 아나운서 합류[34] 산호초인 타라와에는 내륙 산지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산호초가 아니어서 저걸 할 수 있었던 펠레리우에서 미군은 석 달 동안 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서야 완전 점령이 가능했다.[35] 다만 지뢰며 철조망 같은 장애물을 해안가에 잔뜩 쌓아놨던데다 상륙도 이상한 데서 하는 바람에 기동성 자체가 떨어지다보니 상륙이 안 된 건데 그 상황에서 대체 어디에 돌격해서 싸우라는 이야기인지는 좀....[36] 정확하게는 몽골은 어떤 나라와도 대등한 외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정도를 덧붙였다.[37] 동북아역사재단·경북대학교 한중교류연구원 엮음,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2011, 74쪽.[38] Ishjamts N. et. al., Mongolyn ezent gürnii gadaad khariltsaa (ⅩⅢ~ⅩⅣ), 1995, 55~65쪽.[39] 정확하게는 차라리 식민지배라고 한다면 인정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현실과 정반대인 권력관계를 이미지화 시킬 수 있기에 그런듯.[40] 역사적으로 도로와 운송망은 정치적 목적에서 건설되고 이것이 높은 경제성을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로마의 도로는 지방을 통제할 목적에서 건설되었으나, 그 도로를 중심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41] 운하건설은 막대한 비용이 든다. 중국이나 이집트 처럼 단순히 평지를 파는 것이라면 문제가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비용이 든다, 암반층이 등장하면 팔 수가 없다. 비슷한 예로 파나마 운하의 경우 드러나 암반층을 파는것이 불가능하자, 아에 물을 산으로 올려서 배을 산으로 보내는 식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니까 태안반도의 운하건설은 20세기급 과학기술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42] 소장했던 유일한 제트기 라인이었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43] 물론 오프라인에서는 여전히 존재감이 없다. [44] 임용한은 조조와 유비를 제외한 다른 군벌들에 대해선 결국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한계점을 중점적으로 설명하면서도, 그 들이 그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장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원술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인물에 대한 에피소드에서 잠깐 언급하는 수준이다보니, 원술에 대해 좋은 이야기나 나올리가 없었다.[45] 원래 발언을 인용하자면 '하늘에다 대고 짖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