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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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의 제24대 군주이자, 제6대 왕. 부차의 아버지다.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었으나 오나라가 전성기에 망하는 바람에 동시에 오나라 쇠퇴에 영향을 준 인물이 되었다.
2. 생애
2.1. 오나라의 왕위 계승
합려가 즉위하기 전, 오나라의 왕위 계승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합려의 아버지는 최초로 왕을 칭했던 수몽의 맏아들인 제번으로, 수몽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넷째 계찰이 현인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수몽 역시 넷째를 왕위에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계찰은 마땅히 형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왕위를 사양했고, 결국 첫째였던 제번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제번은 계찰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자 자신의 다음 대를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둘째였던 여제 역시 죽으면서 왕위를 셋째에게 물려주고, 셋째 여매 역시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이 이를 '''또 다시 사양하자''' 왕위는 첫째였던 제번의 아들인 합려가 아닌, 셋째 여매의 아들인 요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합려는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2.2. 즉위 전
오왕 즉위 전에는 공자 광(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오왕 요가 즉위하고 처음 몇 년 동안 초나라 정벌에 참여한다. 오자서가 합려의 식객이 된 것도 즉위 전 초나라를 공격하던 때였다.
오왕 요 9년(기원전 519년), 오왕 요가 소, 종리#s-1 두 소국을 멸한다. 같은 해에 오나라, 초나라 양국의 국경에서 발생한 사소한 문제가 양국의 불화로 이어진다. 오자서는 오왕 요에게 초나라를 정벌하는 것의 이점을 설명했으나 오왕 요는 제안을 기각한다. 이때 공자 광은 오자서의 편을 들어 원수를 갚으려는 오자서의 제안에 동의했다.
오왕 요 14년(기원전 515년), 초평왕의 초상을 틈타서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공자 광도 동원되나, 초군이 오군의 뒤를 치려고 한다며 슬금슬금 물러난다. 한편 다른 두 공자 촉용(燭庸)과 개여(蓋余)는 여전히 초나라를 포위하고 있었다. 공자 광은 나머지 두 공자가 모르게 자객 전제(専諸)와 왕을 죽일 것을 의논한다. 왕에게 거짓으로 복종하는 척 하며 열린 연회에서 공자 광의 사주를 받은 전제는 오왕 요를 죽인다. 오나라의 공자 광은 오왕에 즉위해, 합려라고 불린다. 촉용과 개여는 모든 일이 합려가 꾸민 것임을 짐작하고 초나라에 항복했고, 초소왕은 그들을 서(舒) 땅에 봉한다.
2.3. 즉위 후
오왕 합려 원년(기원전 514년), 오자서의 도움으로 오왕으로 즉위하였다. 오자서와 나랏일을 함께 보면서, 손무를 등용했다. 초나라가 백주리(伯州犁)를 죽이자, 그의 손자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망명했다. 합려는 백비를 대부로 임명하였다.
오왕 합려 3년(기원전 512년), 합려는 오자서, 백비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서(舒) 땅을 공격, 초나라로 도망간 촉용과 개여를 죽였다. 그리고 합려가 초나라의 도읍인 영(郢)까지 공격하려고 하자, 손무가 백성들이 지치고 힘들어한다는 이유로 왕을 만류했다.
오왕 합려 4년(기원전 511년), 초나라의 육과 첨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오왕 합려 5년(기원전 510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오왕 합려 6년(기원전 509년), 초나라의 영윤 낭와(囊瓦)가 오나라를 침략하자, 합려는 이에 대응하여 예장(豫章) 땅에서 초나라 군을 물리치면서 초나라의 거소를 취하였다.
오왕 합려 7년(기원전 508년),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에게 초나라 도읍 영성을 공격할 수 있나고 묻자, 오자서와 손무는 초나라의 낭와가 욕심이 많은 인물이라서 당나라와 채나라가 원망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이들 나라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합려는 군대를 크게 일으켜서 당과 채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수(漢水)에 이르렀다. 초나라는 오군을 막기 위해 한수에서 진을 쳤다.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합려에게 이 전투에 나서겠다고 하자, 합려는 부개의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부개는 자신에게 군의 통솔을 맡겼고, 전세가 유리한 상황인데 무엇을 기다리냐고 말하면서 5천 명의 병사로 초나라를 기습하여 대파하였다. 이에 합려는 병사를 풀어서 초군을 쫓았고, 영성에 이를 때까지 초군을 다섯번 격파하였다. 이 때문에 초소왕은 운(鄖) 땅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대가 영성에 도착했고, 오자서는 초 평왕의 무덤을 찾아서 그 시신에 채찍질을 하여 굴묘편시라는 일화를 남겼다.
오왕 합려 10년(기원전 503년) 봄, 월나라가 오군이 초나라의 도읍인 영성에 있어서 오나라 땅에 군사가 없는 것을 알고는 오나라로 쳐들어왔다. 합려는 월나라 토벌군을 보냈다. 한편 초나라의 사신 신포서가 진나라로 가서 초나라가 위급한 것을 알리자, 진나라는 군대를 초나라로 보내 오나라 군을 격퇴하였다. 진나라와 월나라가 동시에 오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에서 물러나게 되는 상황을 본 동생 부개는 오나라로 돌아와서 오왕이 되었다. 합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군대를 돌려, 부개를 공격하였다. 부개가 패배하고 초나라로 도망갔다.
같은 해 9월, 초 소왕은 영성으로 돌아왔고, 부개가 초나라로 망명한 것을 알고는 그를 당계(堂谿)의 제후로 봉하였고, 부개는 씨를 당계씨(堂谿氏)로 바꾸었다.
오왕 합려 11년(기원전 502년),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라고 명하였고, 부차는 초나라 번(番) 땅을 빼앗았다. 초 소왕은 오나라의 공격으로 도읍을 영성에서 약(鄀)으로 천도하였다.
오왕 합려 19년(기원전 496년) 여름,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월왕 구천(句踐)은 취리(檇李)라는 땅에서 오나라 군을 맞이하여 싸웠다. 월나라 군이 오나라 군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혔다. 오나라 군대는 후퇴하였다. 합려는 상처가 도져서 죽었다.
3. 평가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게다가 아들 부차 대에는 중원에까지 패권을 휘두르고, 천자 지위까지 노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하고 여색과 재물을 밝혔으며, 백비나 부차급은 아니어도 오나라 국력 쇠퇴에 영향을 주었다.
춘추오패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한 치부 때문에 춘추 오패로 안 꼽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 그래도 아들 부차랑 같이 명백한 준패자로는 인정받고 있다. 하긴 초나라를 그렇게나 털어먹었는데 준패자도 못된다면 말도 안되는 얘기.[6]
4. 기타 창작물
정비석이 쓴 손자병법에서는 오자서와는 친구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원래는 진나라에서 연 회맹에서 오나라 측 대표로 참석했는데 연회 도중 실수로 술잔을 깨뜨려 목숨을 위협당했으나, 오자서의 활약으로 살아남는다.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한 이후 오자서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사촌형 요를 살해하고 쿠데타로 집권하고 왕위에 올랐다. 초기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인재를 고루 등장하고 인자한 모습인 성군의 모습을 나타냈지만,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초나라 수도를 함락해서 초나라의 부를 맛본 이후 타락하기 시작했다. 초나라와의 전쟁 이후 여색에 빠져 살았는데, 손무가 이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떠날려고 하자 대충 보석 얹어주고 보내주는 등 타락한 암군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월나라의 왕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즉위하자 군대를 끌고 월나라로 쳐들어갔지만, 구천에 의해 전사하게 된다.
[1] 태자 시절 이름.[2] 달리 희이매(姬夷昧)이라하기도 한다.[3] 달리 희알(姬遏, 姬謁)이라하기도 한다.[4] 역사책마다 '''아버지가 다르다!''' 《세본(世本)》과 《춘추#s-4(春秋)》에 따르면 여매의 아들, 《사기(史記)》에 따르면 제번의 아들이다.[5] 달리 희주우(姬州于)라하기도 한다.[6] 합려에게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아서 그렇지 초나라는 이후 전국칠웅에 오를만큼 강대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