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천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천흠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출신이다.
1919년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조선 유림 대표 137인 중 한 명으로서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에 서명을 했으며, 그 직후 4월 2일의 성주면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정(李基定)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기정을 찾아가 국내의 정세를 설명하고 군내의 유림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군내의 유력한 유림 이기정·성대식(成大湜)·송수근·송우근(宋祐根)·장석영·송훈익·김희규(金熙奎)·송준필·이봉희(李鳳熙)·송회근·송문근·송규선·송인집 등과 성주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대가면 옥화동교회의 유진성 목사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유림들과의 협의하에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경, 계획대로 경산동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여 있던 기독교도들이 먼저 성주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장에서 대기 중이던 그는 60여명의 유림들과 함께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시 후퇴하였으나, 이날 밤 10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그는 피신하여 옥고를 면하였다.
그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궐석판결로 징역 10개월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같은 해 김좌진과 내통하여 군자금 700원을 거두어 만주로 탈출하기 직전, 신의주에서 체포되었으나 호송경관을 구타하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만주로 가지는 못했다.
1920년 경상남도 출신 의열단원 이국필과 접선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고 그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카마츠시(若松市)를 근거로 비밀활동을 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 '상화회'에 가입하였으며 관동 대지진 시 항의서를 일본 주요 기관에 제출하기도 했다.
1924년 의열단의 비밀지령를 받고 김지섭을 맞아 그에게 건넬 폭탄을 자택에 은닉하여 니주바시(二重橋) 의거를 직·간접적으로 도왔으며, 재일교포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도쿄에서 일본인 기업주와 담판 도중 충돌하여 일본인 수십명과 격투를 벌였다.
또 1925년 기후현 철도 공사장에서 한국동포에 대한 차별대우에 분격,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자 항의하다가 일본인 20여명과 충돌하여 심한 부상을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7년 의열단 이국필 등과 같이 히로히토를 암살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의 즉위식 날을 기다리던 중, 동지들과 예비검속되어 목적을 달성치는 못하였다.
그후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 거주하면서 수십차례의 예비검속을 받았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