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필(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준필은 1869년 10월 18일 경상도 성주목(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경성부에서 있었던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정작 유림이 빠져 있으면서, 일제가 고종황제에게 결재하도록 강요한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에는 유림대표 김윤식의 서명이 들어있음을 알고는 이를 통분해하면서 조선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3월경 이기정(李基定)·송규선 등과 함께 곽종석의 권유에 찬동한 장석영으로부터 경성부 유생들의 상황을 전해 듣고, 장석영이 독립청원서에 서명을 해줄 것을 권유하자 송준필 또한 이에 찬동하였으며, 이에 파리장서라고 하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 한국 유림대표 137명 중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 후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이 상하이로 전달하였고,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보내졌으며, 국내의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리고 이기정·이기원(李基元)으로부터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다른 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전해 들은 그는 송회근(宋晦根) 등 초전면 고산리 야성 송씨 문중의 유력자들을 불러놓고 이 지방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기정·송회근·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문근(宋文根)·이봉희(李鳳熙)·송인집(宋寅輯)·송천흠(宋千欽) 등이 찬동하여, 성주면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유진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에 의한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안 그는 이들과 협의하여 함께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4월 2일 오후 1시, 점차 시위군중이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먼저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關帝廟)[3] 뒷산에 집결하였던 기독교도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그도 시장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겁을 먹은 일본 경찰주재소에서 발포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이에 굴하지 않고 밤 11시까지 계속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며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언도받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8월 28일 별세하였다.
사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