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1. 개요
2. 청동과 동
3. 왜 청동을 사용했는가?
4. 청동기로 인한 변화
5. 의의
6. 한국의 청동기 시대
6.1. 조기
6.2. 전기
6.3. 후기[1]
6.4. 특징
7. 여담


1. 개요


靑銅器時代
Bronze Age
일반적으로는 신석기 시대와 철기 시대 사이에 있었던 시대로, 인간이 청동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기를 말한다.
단 '청동기를 주로 사용했던 시대'는 아니다. 청동은 청동기시대에도 귀한 물건이어서 한정된 특권층들의 도구나 무기로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특권층의 물건 중에서도 일상용품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농기구 같은 생활 전반에는 대부분 토기와 석기를 사용했다.[2] 일상용품도 본격적으로 금속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다음 철기 시대부터다. 다만 신석기 시대보다 진보한 사회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는 같은 석기라도 좀 더 퀄리티가 높다.
신석기와 청동기 사이에는 구리만 쓰던 동기 시대(copper age)도 있었지만, 매우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생략된다.
청동의 용도가 석기나 철기처럼 모든 범위의 소재로 쓰이지 않았고 도구의 목적에 따라 석기/철기와 시대적으로 혼용되었으며, 어떤 사회는 청동기 없이 바로 철기 시대로 넘어갔기 때문에 '석기-청동기-철기'의 이른바 세 시대 체계에 논란이 있다. 현대 학계에서는 지양하는 분위기.[3]

2. 청동과 동


청동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청동(bronze)은 구리주석 등의 합금이다. 후에 산화하여 푸른색이 된 것 때문에 청동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리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산화 여부와 무관하게 청동이며 동(구리, copper)과는 다른 금속이다. (순수한 구리의 산화물도 발굴된 청동품의 녹과 마찬가지로 청녹색이다.)
청동기 시대의 금속 유물 중에서 청동이 아닌 백동이나 기타 구리 합금으로 된 것도 종종 있다. 하지만 청동이 압도적이라 굳이 따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저 청동이 유명해서 구리 합금을 대표하는 말로 쓰는 것. 대표적인 예로 구리와 알루미늄의 합금을 따로 이름 붙이지 않고 알루미늄 청동이라 부른다.

3. 왜 청동을 사용했는가?


청동의 재료인 구리주석에 비해 매장량이 적고 강도도 떨어지는 편이지만, 철에 비해 화학적으로 안정되고 녹는 점이 낮아 제련주조가 철에 비해 수월하였다. 청동의 녹는점은 약 950℃인데 비해 철의 녹는점은 1,560℃로 600℃ 이상 높다.
당시에는 온도를 이 정도까지 올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최초의 철기는 이집트에서 만들었는데, 인공적으로 녹여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운석에서 나온 철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참고로 잘 마른 장작을 태웠을 때의 온도가 1,200℃를 넘지 못하는데, 바꿔 말하면 청동이 아닌 철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불꽃의 온도를 추가적으로 300℃ 이상 상승시킬 수 있는 여건 즉 풀무가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4].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내내 철의 값이 보다도 비쌌다. 참고로 금의 녹는점은 약 1,060℃다. 더군다나 구리 광석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금속들이 불순물로 혼입되는 일이 많아서 싫어도 자연스레 청동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같은 청동기 시대의 청동기라도 주석합금이 아니라 다른 금속과의 합금이 중구난방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
진짜 청동의 경우는 구리는 그래도 좀 흔한 편이지만 주석은 전 세계적으로 매장지가 희소하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구리 제련 과정에서 광석에 포함된 불순물 금속으로 자연스레 섞여 생겨난 것이 아닌 다른 금속과 의도적으로 배합조절되어 합금된 완숙한 형태로 성장한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한반도만 해도 주석이 거의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는 국내 광산에서 채광하더라도 주석은 외부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반도 주변에서는 중국 북쪽 내몽골 지역과 양쯔강 이남 지역에 주석 광산이 발달해 있어 고대 한국사 국가들은 이런 곳에서 주석을 수입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기의 또 다른 장점은 땅 깊숙히 매장되어 있거나 반응성이 높아 산화철 등의 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하는 철광석과는 달리, 구리와 주석은 순수한 결정의 형태로 원석이 채굴되는 경우가 있어서 좀 더 찾아내기가 쉬웠다.
하지만 구하기 쉽고 제련하기 쉽다 해도 그때 그 기술로 이걸 만드는 것은 정말 토 나올 만큼 어려운 과정이었다. # 흔히 금이나 철 같은 금속성 매장물이 덩어리로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저렇게 불순물 투성이이거나 가루 형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저렇게 노가다해서 얻는 양도 쥐꼬리만큼. 모래 한 바가지 걸러내서 사금 몇 톨 건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윗 문단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구리 같은 경우는 붉으스름한 가루 형태(산화철)로 흙에 섞여있는 철과 달리 원석 형태로 지층 군데군데 박혀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철에 비해 반응성이 약해서 산화가 잘 안되기 때문. 때문에 철보다는 구리가 상대적으로 발견하기 훨씬 쉽고 추출하기 쉬운 물질이다.
당시의 청동과 돌을 서로 충돌시키면 청동이 부러지거나 휘어졌다. 그만큼 청동은 단단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청동기는 무기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권력자의 장식용, 제식(祭式)용으로 사용되었다. 당장 교과서나 관련 책에서도 이 당시의 청동기는 실생활용이 아닌 의식용이라고 못 박아놨다. 사유는 청동이 귀해서라는 이유 하나만 적었지만, 실생활에 사용하기에는 강도도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의식용이라고 해서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청동기의 등장은 인류가 그런 금속을 제련하고 가공가능한 기술을 보유했다는 징표가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지도 못한 청동기가 전쟁 무기로써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단 한번 만들면 돌보다 편하다는 것. 부서지거나 구부러진 청동 기구는 대장장이가 다시 녹여서 가공하면 재사용할 수 있다. 거기다 재료가 많고 거푸집이 있으면 균일하게 대량 생산도 가능하다. 물론 비싼 건 마찬가지라서 한번 얻은 청동 갑주, 무기 등은 자자손손 전해서 사용했고 헥토르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의 주요 전리품이기도 했다.
현재와는 달리 기원전 대부분의 문명에서 사용했던 청동기와 철기는 비슷비슷한 강도를 가졌었다. 철은 반응성이 높아서 채굴했을 때 섞여있는 불순물의 양도 많고 제련 과정을 통해 그걸 제거하는 일도 굉장히 어려운데, 때문에 당시의 발달되지 않은 야금 기술로 만들어낸 철기구는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였다.
그에 비해 청동기는 구리를 제련하면서 저절로 스며들어간 불순물 금속들이 저절로 합금되어 생기는 것이고, 더 나아가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 끝없는 기술 연구가 지속되어 상당한 야금 기술이 개발되어 중국 전국시대의 잘 보존된 청동검은 지금도 살상에 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한다. 월왕구천검이 대표적인 사례. 당시 철이 청동에 비해 우위에 있었던 점을 굳이 꼽자면 재료 수급이 용이했다는 정도.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데, 구리는 전 세계적으로 나오지만 그 수가 적고 주석의 산지는 제한적이기에 주석 산지가 아닌 경우 청동기의 대량 생산을 위해선 주석의 수입이 필수였다.
또한 청동기는 철기에 비해서 굉장한 보존성을 가지고 있다. 철은 반응성이 높을 뿐더러 한번 녹이 슬면 그 녹이 주변의 멀쩡한 조직의 산화를 가속하는 성질이 있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물이 대부분 형태가 엉망진창인 반면, 청동을 비롯한 구리 합금의 녹은 그 자체가 강력한 산화 피막이기 때문에 부식이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준다. (스테인레스강이 잘 녹슬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기원후의 철기 유물은 겉에 기름(또는 납, 흔히 왁스라 부른다) 혹은 도료를 바르거나, 담금질 과정에서 적당히 그을려 산화 피막이 있는 상태로 두거나, 거울보다 빛나게 광을 내곤 했는데, 그 이유는 미세조직을 매우 고르고 평탄하게 만들어서 산소가 침입할 틈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표면 연마는 매우 고르기는 해도 여전히 철의 반응성은 무시할 수 없으며, 사용을 거치면서 흠집이 날 수 있기 때문에 주인의 관리가 필요해진다. 전반적인 유물의 상태만 보더라도 청동 유물은 기원전 1000년 전의 무기들이 푸른 녹이 표면에 슬어있기는 해도 형태 자체는 온전하게 남아있다. 반면 철제 유물은 기원후의 유물들조차도 무기 속까지 녹슬어서는 깨져나가고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 일부 보존 상태가 좋은 철제 무기들도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일부일 뿐이다.

4. 청동기로 인한 변화


농업 혁명에 이은 청동기의 개발로 고대 사회의 형태도 상당히 많이 변하였는데, 대략 주요한 점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 청동거울[5], 청동방울[6], 향로[7] 청동기 시대에도 일상용품은 동물의 뼈, 가죽으로 만들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희소하고 강도도 부실한 청동으로 일상 생활 용품을 만들 여건도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의 청동 거울은 제사 의식을 위한 도구였지 일상 용품이 아니었다.
  • 지역 간의 장거리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구리는 그 자체로도 귀하며 특히 청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석과 혼합해야 하는데, 주석의 산지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가장 부유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청동기를 만들기 위해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브리튼 제도까지 가서 주석을 수입해왔다.
  • 한반도에서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가 널리 사용 되었다.
  • 한국의 경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고인돌이 생겨났다. 고인돌 자체는 한반도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지만, 세계적으로 거석 문화가 이 시기에 발생했던 것은 맞다. 예를 들면 스톤헨지라거나. 거석 문화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큰 돌을 아무런 실용적인 이유도 없이 어떤 사람의 의도에 의해 옮겨야 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계급 사회가 발생했다는 증거로 본다.
  • 청동기는 귀하고 물러서 농기구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물론 청동제 농기구가 전혀 발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많지도 않았던 데다 청동시 시대 농기구는 간석기인 반달돌칼이었고 금속제 농기구의 도입은 철기시대에 이르러 보편화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청동 농기구가 발견되지 않지만 베트남 지역에서는 청동 농기구로 농사를 지은 것으로 확인된다. 한반도 지역보다 구리와 주석의 희소성이 적어 청동으로 농사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5. 의의


현대 역사학에서는 그 역사적인 비중이 감소하고 있다. 청동은 이나 철에 비하여 그 매장량이 매우 적다. 애초에 청동의 재료인 주석구리의 매장량이 적은 데다가 두 재료가 나오는 광산이 서로 매우 가깝게 붙어있지 않으면 당시의 열악한 수송 능력으로는 청동기를 만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의 발전 정도와 관계 없이 사용할 수 있던 지역이 매우 한정된다. 심지어 일대에 청동을 제조할 금속이 나지 않아 석기 시대에서 바로 철기 시대로 건너뛴 짐바브웨 문명같은 케이스도 심심치않게 나온다. 심지어 대표적인 고대 문명 중 하나인 고대 이집트에서는 제2중간기 (기원전 18~16세기/제13~17왕조) 시대에 힉소스인들이 청동기 병기와 전차를 끌고 침공해올 때까지 주석을 대규모로 구할 길이 없어 순동으로 된 무기와 도구를 사용했었다.
거기다 발굴되는 대다수의 청동기는 제의 물품의 제작에 사용되었으며, 무기라고 하더라도 무기 자체의 목적보다는 의례적인 의미가 더 큰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청동기는 강도가 좋지 못한 까닭에 전쟁을 제외한 사회 전반에서 사용된 도구들은 신석기 시대에 사용되었던 여러 석기 도구들이 발전된 발전형 석기들이었다. 이는 중국춘추전국시대에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을 때, 그 당시의 철제 농기구가 '''나무로 된 농기구에 날 부분만 철로 덧댄 형태였다는 것'''으로도 방증된다. 그 전까지는 금속으로 농기구를 만들어 본 경험 자체가 부족했다는 이야기.
청동기가 워낙 귀해서 대개 제의용으로 사용된 것은 맞지만, 이것이 제의도구가 처음 발생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청동기가 없던 시절에도 동물의 뼈 등을 이용해 제의도구를 만들어왔고, 그 자리를 청동거울 등이 대체했을 뿐이다. 계급의 발생 또한 예전 학계에서는 청동기의 희귀함과 강력함이 촉발한다고 생각했으나, 현재는 이미 신석기 후기에 가축 사육을 통해 계급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 희소한 청동제 물건들로 가시화되었던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 청동기가 너무 희귀한 탓에, 그것이 시대를 구분할만큼 확실히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회의적이다. 심한 지역은 거의 청동기로 제의용품 몇 개 만들다가 바로 철기의 보급으로 직행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정말로 청동기의 등장 덕분에 사회 전반이 변화하였는지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

6. 한국의 청동기 시대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청동기 사용이 아닌 본격적인 농경 사회와 민무늬 토기의 제작, 간석기의 본격적 사용, 사회 복합도의 증가로 정의된다. 청동기는 청동기 시대 중기쯤 돼서야 나온다.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시대의 시작 시점으로는 7차 국정 국사교과서 초판까지는 기원전 10세기경이라고 나와있었는데, 7차 국정 교과서 개정판(2006년) 이후로는 기원전 2000~1500년경이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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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암각화. 청동기와 석기가 같이 그려져 있다. #
현재 청동기 시대 분기 편년안으로 가장 유력시 되는 것은 신 3분기설이다. 이는 청동기 시대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는 것이다.

6.1. 조기


  • 하남시 미사리 유형: 판석 부위 석식(바닥에 판돌 깔고 주위에 돌로 둘러친 형태) 또는 위석식 노지(화덕) 방형(정사각형) 또는 장방형(직사각형)의 주거지로 가끔 기둥자리에 초석이 설치되는 경우가 있으며, 덧띠 새김 무늬 토기(각목돌대문 토기)라는 아가리 쪽에 오돌토돌한 것들이 붙어 있는 토기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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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띠 새김 무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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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 부위 석식 노지

6.2. 전기


  • 서울 역삼동 유형: 토광형 노지(즉 그냥 땅만 판 화덕)이 있는 장방형 주거지와 공렬문 토기 흔히 박물관에는 구멍 무늬라고 되어 있는 토기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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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동 유형의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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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무늬 토기(공렬문 토기), 구연부에 뚫린 구멍이 공렬문(구멍 무늬)
  • 여주시 흔암리 유형: 주거지는 역삼동과 같고 토기만 약간 다른데 공렬문 또는 이중구연 공렬문이다.
  • 가락동 유형: 위석식 노지와 장방병 또는 세장방형(한쪽이 매우 긴 직사각형)주거지를 가지면 이중구연 또는 이중구연 단사선문(짧은 선이 여러 개 그어진) 토기 박물관에는 겹아가리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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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 주거지는 흔히 둔산식 주거리로 불린다. 노지에 돌이 둘러진 게 보이는데 저게 위석식 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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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구연 빗금 무늬(단사선문) 토기. 이중구연은 아가리가 겹쳐졌다는 뜻이다. 즉 아가리가 토기벽보다 더 두꺼움. 다만 흔암리는 최근 들어 역삼동과 같은 유형으로 취급하고 있다.

6.3. 후기[8]


  • 부여군 송국리 유형: 무시설식 노지의 원형 또는 방형의 돼지콧구멍 기둥 자리가 있는 주거지로 외반구연의 장란형 토기(쉽게 말해서 계란처럼 생겼는데 입구 부분이 벌어진 토기)로 대표된다. 참고로 이 유적의 집자리는 도무지 이전 청동기 문화 양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화덕이 사라져버려서 한국 청동기 고고학 최고의 미스터리 문화로 관심이 집중된다. 현재 외래 유입설과 자체 발생설이 논쟁중인데 어느 쪽도 확실한 증거가 없어 논쟁만 계속되고 있다.

송국리 문화는 후기를 대표하지만, 이 시기에 남한에는 북한강의 천전리식 주거지와 울산-포항-경주 지역이 검단리 유형이 나온다. 당연히 북한에는 송국리 유형이 현재까지는 발견 례가 없다. 게다가 미사리, 가락동, 역삼동-흔암리, 송국리 유형 등의 구분도 남한 기준이고 북한 쪽은 공귀리, 서포항 등 그쪽만의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남한과는 구분 방식이 다른 경우도 있어 전체적인 이해는 좀 복잡해진다.
그러나 송국리 문화는 본격적인 도작 농경(쌀농사)을 시작한 문화로 보고 있는데, 이들 문화의 파급력은 상당해서 춘천-홍천 등 북한강 일부 지역과 울산-경주 등 영남 동부 해안 지역 일부 제외하면 남한 전 지역과 제주도, 일본 큐슈까지 퍼진 문화다. 특히 이들은 일본 야요이 문화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실제 큐슈 지역에서는 송국리형 집자리가 발굴되었고, 일본 도작 문화 전파 루트에 나타나는 옹가가와식 토기는 송국리식 호형 토기를 모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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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국리의 원형 집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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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국리식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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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요이 전기의 옹가가와식 토기. 송국리 호형 토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연부가 단이 지면서 외반하고, 조몬 토기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그려져 있어 약간은 변형된 모습을 보인다. 호형 토기는 도작농경이 발전하면서 도입된 걸로 보인다.

6.4. 특징


  • 참고로 가끔 후기에 전기 철기 시대를 넣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전기 철기 시대 대표 유물이 세형동검다뉴세문경이기 때문이다. 또한 토기도 무문토기인 점토대토기여서 같은 시대 설정으로 넣어도 무리가 없다.
  • 한반도에서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가 널리 사용 되었다.
  • 대한민국 선사 시대 연구자들 중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공자가 제일 많다고 한다. 연구할 수 있는 유물도 많고 유적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무문 토기 시대'라는 말로 사용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98년도까지 동검을 포함 청동기가 고작 100개가 나왔다고 하는 게 한국 청동기 고고학의 상황이다. 이 정도면 서주 시기에 남중국에 있었던 서주와는 다른 문화인 삼성퇴 유적의 구덩이 하나에서 나온 청동기 숫자보다 못하다. 그래서 한국 청동기 문화에 대해 설명할 때 그 문화 유형을 나누는 기준은 토기와 주거지지 청동기가 아니다. 심지어 기원전 15세기로 편년되는 미사리 유형은 청동기가 없다. 덕분에 실상 문화 유형 파악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무문 토기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 최근에는 요하 일대의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면서 이 지역의 문화와 요서 지역 그리고 요동의 예맥족 세력과의 관련성과 상호 교류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며, 국사책의 고조선 건국 연대가 올라간 것도 이런 경향과 관련 있다. 물론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주장 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동북아 역사 재단에서 최근 펴낸 연구서 <요하 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 지역의 청동기 문화>, <요하유역의 초기 청동기 문화>에서 보이듯이 주류 학계도 이쪽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분명 관련성이 있긴 한데, 연구는 좀 더 필요하다"는 게 정론으로, 그 이상으로 확실하게 딱 결론 내릴 만한 가시적인 연구나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9]
  • 한국 학계에서 기자조선이 부정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렇게 요하-만주-한반도 청동기와 황하 유역의 청동기가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상나라의 기자가 정말로 조선 왕에 봉해져 왔다면 한반도에서도 황하 계통의 청동기가 발굴되어야 하나, 현재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기를 보면 황하 유역 청동기는 발견된 바 없고 오히려 만주-요하 지역의 청동기와 유사하다.
  • 춘천 중도에서 대규모 청동기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시대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청동기 시대 연구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나, 문제는 해당 지역이 레고랜드 등 대규모 레저 관광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유적지 발굴로 취소되게 생겨서 사업에 큰 지장이 생길 예정이다. 게다가 현재 발견되는 수준으로 보면 중도 전체가 경주에 맞먹을 만큼 유적 밀집 지역이라고 한다(...) #

7. 여담


  • 16~19세기 중반의 유럽에서는 무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화약의 위력이 매우 크게 발전하였는데, 주로 사용하던 철제 화약 무기의 성능이 그 위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청동으로 만든 장비를 대량으로 주조한 적이 있었다. 화약 무기는 밀폐가 잘 돼야 성능이 오르고, 밀폐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밀하게 제조해야 한다. 헌데 철의 경우 주조 난이도가 높다보니 당시 기술력으론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주조 난이도가 낮은 만큼 정밀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만큼 성능도 더 높았다. 게다가 화포의 강한 반동을 이겨내기 위해선 무작정 튼튼하기만 해선 안되고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질겨야 하는데, 기존의 무쇠는 이 부분이 취약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취성 때문에 그대로 깨져 버린다. 그렇다고 전근대에 제대로 된 탄소강, 즉 강철을 만들기에는 기술적으로 대단히 힘들어서 대체품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청동을 달리 포금(砲金, gunmetal)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무기사(武機史)에서는 이 시기를 제2의 청동기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 사유 재산과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사냥꾼이나 가정 주부와 달리 전문 지식 또는 기술로 일정한 소득을 공급 받는, 인류 최초의 전문 직업이 생긴 시기이기도 하다. 식량의 유통과 축적이 가능하여 수렵, 채집, 농업, 살림 외의 인류의 활동이 전문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기술자, 예술가, 광대, 상인, 사채업자, 매춘부, 정치인, 종교인, 군인, 건축가, 약탈꾼, 노예, 요리사 등이 존재한다.
  • 청동기 시대의 미라들을 연구하면 종종 발견 지역(매장 지역)과 성장기를 보낸 지역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나, 동서양 혼혈인인 경우가 발견된다. 일반적인 생각보다 장거리 교류가 빈번한 시대였으리라고 추정되며, 이는 사유 재산의 발달로 인해 매우 활발한 정복 활동과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정선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인골의 유전자 조사 결과 백인, 그것도 영국인 DNA가 나온 적이 있다.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로 진출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은 토하라인 뿐이었으므로, 이들 출신자 중에 일부가 무역이나 탐험 등의 목적으로 한반도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1] 만약 전기철기시대를 청동기시대에 포함시키고 무문토기 기원전 15세기 발생설을 따른다면 중기가 된다[2] 사실 토기나 석기보다 목재를 더 많이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은 하는데, 무기물인 흙이나 돌로 만든 토기석기와 달리 당연히 목기는 유기물이라 수천 년 동안 땅 속에서 썩어 사라진 지 오래라서 증거가 별로 없다. 가끔 우포늪 같은 속에서 나무로 만든 물품이 간신히 보존되긴 한다.[3] 대표적으로 일본야요이 시대 때 한반도 도래인으로부터 청동기와 원시적 철기를 동시에 받아왔기 때문에 사실상 초기 철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가 겹친다. 다만 일본에서 철의 소재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고분 시대가 끝난 아스카 시대의 일이다. 이러한 논쟁은 철기 시대 항목을 참조할 것.[4] 고대 히타이트에선 타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철기를 도입했지만 이것도 풀무를 개발하는 대신 강력한 자연풍을 이용한 것이었다. 때문에 수도 하투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었고 타지역으로 철기를 전파하긴커녕 자신들도 한정된 양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5] 대표적인 유물로 정문경이 있다.[6] 대표적인 유물로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이 있다.[7] 구정의 무게를 묻는다춘추시대의 에피소드에 나온 구정이 바로 청동으로 만든 인데, 쉽게 말해 향 같은 거 담고 불 붙여서 연기 피우는 물건이다. , 에서부터 하늘에 직접 제사 지낼 수 있는 신분으로서의 왕권의 상징하는 신물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당시 청동기물의 하이테크적 위상과 제정일치 정치 체제의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8] 만약 전기철기시대를 청동기시대에 포함시키고 무문토기 기원전 15세기 발생설을 따른다면 중기가 된다[9] 이 부분은 사학계, 고고학계 모두 학자마다 엄청나게 이론이 분분한 상태다. <요하 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 지역의 청동기 문화>만 봐도 다소 급진적인 경우는 하가점 문화의 수축과 중국 연나라계 유적/유물의 요동 진출이 넓어진다는 것을 고조선이 연에 패해 연군현이 설치된 문헌 기록과 연결시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유의미한 관련성 인정 이상으로는 최대한 나가려 하지 않는 경우 등 논문들의 내용과 연구 방향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단 관련성은 인정한다'를 뺀 나머지는 상당히 극과 극이다.